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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당(朴世堂)

조선시대사인물

 조선후기 『서계선생집』, 『신주도덕경』, 『색경』 등을 저술한 학자.   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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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당 초상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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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서계선생집』, 『신주도덕경』, 『색경』 등을 저술한 학자.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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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계긍(季肯), 호는 잠수(潛叟)·서계초수(西溪樵叟)·서계(西溪). 박응천(朴應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좌참찬 박동선(朴東善)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 박정(朴炡)이며, 어머니는 양주윤씨(楊州尹氏)로 관찰사 윤안국(尹安國)의 딸이다.
영역닫기영역열기생애 및 활동사항
4살 때 아버지가 죽고 편모 밑에서 원주·안동·청주·천안 등지를 전전하다가 13세에 비로소 고모부인 정사무(鄭思武)에게 수학하였다. 1660년(현종 1)에 증광 문과에 장원해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었고, 그 뒤 예조좌랑·병조좌랑·정언·병조정랑·지평·홍문관교리 겸 경연시독관·함경북도 병마평사(兵馬評事) 등 내외직을 역임하였다.
1668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를 다녀왔지만 당쟁에 혐오를 느낀 나머지 관료 생활을 포기하고 양주석천동으로 물러났다. 그 뒤 한때 통진현감이 되어 흉년으로 고통을 받는 백성들을 구휼하는 데 힘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맏아들 박태유(朴泰維)와 둘째 아들 박태보(朴泰輔)를 잃자 여러 차례에 걸친 출사 권유에도 불구하고 석천동에서 농사지으며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만 힘썼다.
그 뒤 죽을 때까지 집의·사간·홍문관부제학·이조참의·호조참판·공조판서·우참찬·대사헌·한성부판윤·예조판서·이조판서 등의 관직이 주어졌지만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702년(숙종 28)에는 이경석(李景奭)의 신도비명(神道碑銘)에서 송시열(宋時烈)을 낮게 평가했다 해서 노론(老論)에 의해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지탄되기도 하였다.
학문과 사상은 성장기의 고난과 청·장년기의 관리 생활을 통한 개혁 의식, 그리고 당쟁의 와중에서 겪은 가족의 수난과 어려운 농촌에서 지낸 경험 등을 통해서 형성된 사회 현실관의 반영이라 하겠다.
박세당이 살았던 시기는 보기 드문 민족적 시련과 정치적 불안정 및 민생의 곤궁이 매우 심하였다. 즉 병자호란의 국치와 당쟁의 격화로 말미암아 국력은 약화되고 민생이 도탄에 허덕이던 시기인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내외의 현실을 직시하며 국가를 보위하고 사회 개혁을 통한 민생의 구제를 목표로 하는 사상적 자주 의식을 토대로 해서 학문과 경륜을 펼쳤던 것이다.
박세당의 근본 사상에 대해서는 유학의 근본 정신을 추구했다는 견해가 있고, 주자학은 물론 유학 자체에 회의해 노장학(老莊學)으로 흐른 경향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학문의 근본 입장은 당시 통치 이념인 주자학을 비판하고 중국 중심적 학문 태도에 회의적이었다고 보는 데는 이론이 없다.
그 만이 아니라, 17세기 우리 나라의 사상계는 국내외적 시련에 대한 극복을 위해 사상적 자주 의식이 제기되어 이의 수정과 사회적 개혁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입장도 주자학에 비판적이었다.
이러한 사상적 반성이 싹튼 것은 16세기에 비롯했지만, 주자학에 대한 정면 도전이 표면화한 것은 이때부터이다. 이 때문에 주자학의 열렬한 신봉자들인 송시열 등은 주자학 비판자들을 사문난적이라 하며 이단으로 배척하였다. 이러한 배척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이 박세당과 윤휴(尹鑴)·윤증(尹拯) 등이었다.
이들은 주자학 비판에 있어서는 공통적이었지만 학문 연구의 입장은 달라 대략 세 방향을 띠었다. 첫째는 고대의 유학, 특히 한(漢)나라 때의 유학을 빌어 통치 이념을 수정하려는 윤휴와 같은 남인(南人)계통의 학파이고, 둘째는 명나라 때 왕양명(王陽明)의 유학을 도입해 채용해보려는 최명길(崔鳴吉)·장유(張維) 등 양명학파(陽明學派)이며, 셋째는 노장 사상을 도입해 새로운 시각을 모색하려는 박세당 계통이었다.
박세당은 당시의 학자들이 꺼려한 도가 사상(道家思想)에 깊은 관심을 보여 스스로 노장서(老莊書)에 탐닉하면 되돌아올 줄 모르고 심취하게 된다고 고백할 정도이었다.
이러한 학문 경향을 지니게 된 배경에는 젊었을 때 지녔던 정치와 사회에 대한 개혁적 사고 때문이었고, 또 백성의 생활 안정과 국가 보위에 있어서 차별을 본질로 하는 유가 사상(儒家思想)에 회의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해서 지방(海西地方)의 암행어사와 함경북도병마평사를 역임한 뒤, 홍문관수찬으로 있으면서 응구언소(應求言疏)를 올린 적이 있다. 그 내용은 양반 지배 세력의 당쟁과 착취로 비참한 경지에 이른 백성들의 생활 안정책과 무위도식하고 있는 사대부(士大夫)에 대한 고발이었다.
요역(徭役)과 병역의 균등화를 주장했고, 모든 정치·사회 제도가 문란하므로 개혁하지 않을 수 없고 모든 법률이 쇠퇴했으므로 혁신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국민 가운데 공사천민(公私賤民)이 6할, 사대부 양반이 2할, 평민이 2할인데, 사대부 양반은 8∼9할이 놀고 먹으니 이는 봉록(俸錄)만 받아먹는 나라의 커다란 좀[蠹]이라고 하였다.
대외정책에 있어서는 중국 대륙의 세력 변동에 주체적으로 적응하는 실리주의를 주장하였다. 고대 삼국 가운데 국력이 가장 미약했던 신라가 당나라에게 망하지 않은 원인이 외교 정책의 현실주의적 실리 추구에 있었다고 지적하였다.
그러면서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와 자기의 선조 박상충(朴尙衷)에 관한 평가도 고려에 대한 충절보다는 원나라·명나라 교체의 국제적 변동에 대처하려는 대외 정책으로 신흥 명나라를 섬기고 원을 배척할 것을 주장한 실리주의자로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당시 시대 분위기가 숭명배청(崇明排淸)이 풍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현실적 생존과 국가의 보위를 위해 국제 사회에서의 주체적 적응이란 입장에서 존명사대(尊明事大)의 명분을 버리고 민족 자존의 실리를 위한 친청정책(親淸政策)을 주장했던 것이다.
대내외 정책에 대한 개혁 의식을 가졌던 박세당은 관직을 버린 뒤 『논어(論語)』·『맹자(孟子)』·『대학(大學)』·『중용(中庸)』 등 사서와 『도덕경(道德經)』 및 장자(莊子)의 연구를 통해 주자학적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려는 학문적 지향을 취하였다.
박세당은 육경(六經)의 글은 그 생각이 깊고 취지가 심원(深遠)해 본 뜻을 흐트러뜨릴 수 없는 것인데, 후대의 유학자들이 훼손했으므로 이를 바로잡아 공맹(孔孟)의 본지(本旨)를 밝혀야 한다는 뜻에서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박세당의 학문은 자유분방하고 매우 독창적이었다. 예를 들면, 유가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인(仁)에 대해, 공자가 말하는‘인’이란 인간과 동물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자연 조화(自然調和)의 심정이 아니라 동물에 대한 인간 중심적인 사랑이며, 사람과 동물에 차별을 두지 않는 순수한 사랑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맹자의 인에 대하여도, 맹자의 차마 할 수 없는 심정인 불인지심(不忍之心)으로서의 ‘인’이란 도살장과 부엌을 멀리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 고작일 뿐, 역시 살생을 배격하지 않는 잔인성을 그대로 말한 것이라고 꼬집는다. 또한, 맹자가 ‘왕도(王道)’란 민심을 얻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고 말했지만, 민심을 얻는 데만 뜻을 먼저 둔다면 이는 패자(覇者)의 행위이고 왕도는 아닐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주자가 제왕권체제(帝王權體制)를 강화하기 위해 설정한 모든 만물의 근원적 원인자(原因者)로서의 태극(太極)에 대한 이해에도 이의를 제기하였다. 주자는 임금과 신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현실적 차별이 이러한 현상에 앞선 원인자인 태극에서 연유한다고 주장해, 인간이 제왕권(帝王權)에 복종하는 것은 거역할 수 없는 당연한 도리라고 보았다. 또 인간이 감각적 욕구를 추구하는 것은 인욕(人欲) 또는 인심(人心)으로서 악행(惡行)이라고 피력하였다.
그러나 태극에 대한 이해의 부족과 함께 감각적 욕구를 작용시키는 감성(感性)도 인간의 불가피한 기능임을 지적하였다. 도심(道心) 못지않게 인욕의 충족도 중요시했던 것이다. 이는 백성들의 생활 안정을 위해 명분론보다도 의식주와 직결되는 실질적인 학문이 필요하다는 실학 사상을 나타낸 것이라 보겠다.
도를 밝히는 것은 지식과 언어에 있지 않고 실천에 있으며, 백성들이 실질을 떠나서 허위의 비현실적인 가치관만을 배우게 되면 이는 다스리려 해도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렇게 백성의 생활 가치를 신장시키는 것에 학문의 목표를 두었기 때문에, 이단시되던 노장학까지도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 노장학도 본질면에서 보면 세상을 바로잡는 길에 보탬이 되고 버릴 것이 없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것은 도가 사상이 차별 사상이 아니고 민중 중심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정치인의 지배 욕구의 포기를 근본으로 하는 것이 『도덕경(道德經)』의 정신이라고 주장하였다. 노자의 무위(無爲)란 일하지 않는 불사(不事)가 아니라, 사사로운 욕구에 얽매이지 않는 무욕(無欲)의 정치 태도라고 보았다. 장자의 무위자연도 자연을 벗삼아 사는 것이 아니라 치자(治者)에게 과도한 지배 욕구를 버리고 백성들의 생활권을 신장시키는 데 힘쓸 것을 요청한 무욕의 뜻이라고 이해한 것이었다.
스스로 무욕을 실천하는 생애를 보냈지만 정치와 사회 현실에 전연 무관심하지 않고, 비교적 혁신적 사고를 지녔던 소론파(少論派)와 빈번하게 교류하였다.
소론의 거두인 윤증을 비롯해 같은 반남박씨로 곤궁할 때 도움을 준 박세채(朴世采), 처숙부 남이성(南二星), 처남 남구만(南九萬), 최석정(崔錫鼎) 등과 교유하였다. 그리고 우참찬 이덕수(李德壽), 함경감사 이탄(李坦), 좌의정 조태억(趙泰億) 등을 비롯한 수십 인의 제자를 키우기도 하였다. 학문과 행적에 대한 변론은 계속되어 박세당이 죽은 지 약 20년이 지난 1722년(경종 2)에야 문절(文節)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저서로는 『서계선생집(西溪先生集)』과 『대학(大學)』·『중용(中庸)』·『논어(論語)』·『상서(尙書)』·『시경(詩經)』 등의 해설서인 『사변록(思辨錄)』, 그리고 도가에 대한 연구서인 『신주도덕경(新註道德經)』 1책과 『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註解刪補)』 6책이 전한다. 편저로는 농서(農書)인 『색경(穡經)』이 전한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6년)
김만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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