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지정면적은 1만 933㎡이다. 1970년 후반부터 알려져 1989년 12월∼1990년 2월까지 부산광역시립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되었다. 유적의 범위는 1만여 평에 달하나 발굴 조사된 부분은 150여 평이다.
고분군이 분포하는 곳이 지금은 행정구역상 부산광역시에 속해 있으나 김해시에서 남쪽으로 직선 거리 10㎞되는 곳이고 낙동강의 서안지역이므로 김해지역의 한 고분군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고분군은 해발 52m의 소구릉을 중심으로 주위의 경사지에 영조되어 있다. 동북쪽에는 4∼5세기대의 덧널무덤〔木槨墓〕이, 남서쪽에는 5∼6세기대의 돌덧널무덤〔石槨墓〕가 분포되어 있다. 발굴조사된 유구는 모두 26기로 구덩식〔竪穴式〕돌덧널무덤 15기, 소형 돌덧널무덤 7기, 움무덤〔土壙墓〕2기, 독무덤〔甕棺墓〕옹관묘 2기이다.
구덩식돌덧널무덤은 목재를 뚜껑으로 한 것과 석재를 뚜껑으로 한 것이 구분된다. 목재를 뚜껑으로 한 것은 돌덧널의 평면형태가 장방형이고 돌덧널의 바닥에 깬돌을 깐 특징이 있다. 이러한 무덤으로는 제5호분이 대표적이다. 돌을 뚜껑으로 한 것은 돌덧널의 평면형태가 세장하고 바닥에는 아무런 시설을 하지 않은 특징이 있다. 이러한 무덤으로는 제2·6·7·8·9호분 등이 있다.
무덤구덩이〔墓壙〕가 깊고 뚜껑돌이 없는 2기의 돌덧널무덤은 발굴조사된 유구 중 가장 이른 것으로 5세기 중엽으로 비정된다.
소형 돌덧널무덤은 독무덤과 함께 소아용으로서 구덩식돌덧널무덤의 배묘적(陪墓的)인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소형 돌덧널무덤 중 돌덧널의 이음돌덧널〔合口式石槨〕의 내부에 이음독〔合口式甕棺〕을 안치한 것이 1기 있다.
움무덤은 출토토기로 보아 구덩식돌덧널무덤과 동일한 시기의 무덤이다. 무덤을 설치한 암반이 단단해서 석벽을 쌓지않은 것으로 보인다.
출토유물은 약 300여 점인데 3분의 1이 도굴된 갱내에서 교란된 채로 수습되었다. 그 가운데 뚜껑굽다리접시·목항아리·항아리 등의 토기류가 170여 점, 칼·화살촉·손칼 등의 철기류가 100여 점, 기타 금동제가는고리귀걸이 등의 장신구류가 30여 점인데, 토기류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생곡동가달고분군에서 출토된 토기류는 신라토기의 특징을 가진 것도 있으며, 가야지역의 독특한 형식인 이른바 창녕식 굽다리접시·납작바닥짧은목항아리〔平底短頸壺〕·유공광구호(有孔廣口壺) 등도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이 고분군을 축조한 집단의 출자나 성격과 관련된 것으로 믿어지는데, 이곳이 김해예안리고분군과 함께 신라의 가야에 대한 전초기지로 이용되었기 때문이란 견해가 있다.
이 고분군의 중심연대는 출토된 토기로 보아 5세기 전반∼6세기 중엽 무렵으로 편년할 수 있고 출토된 유물이 비교적 빈약한 것으로 보아 하위집단의 무덤들로 평가될 수도 있다. 그러나 도굴갱과 주변에서 철제의 판갑옷편〔板甲片〕과 낚시바늘·작살·고리자루큰칼〔環頭大刀〕등이 수집되었는데, 특히 판갑옷편과 고리자루큰칼의 경우 이 고분군 축조집단의 지위가 그렇게 낮지는 않았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정황을 통해서 이 고분군은 김해지역과 주변지역의 교류상황을 밝힐 수 있는 단서가 되며, 철제갑주류 등은 이 집단의 성격 및 피장자의 지위 등을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