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사문화
개념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물체를 자르고 베고 깎거나 전쟁에 사용하기 위해 예리한 날을 만든 도구 또는 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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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칼은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용도와 기능에 맞게 돌, 청동, 철, 플라스틱 등으로 만들어져 다양하게 발전한 도구이자 무기이다. 처음에는 돌을 깨거나 갈아서 만든 돌칼이 사용되었지만, 청동기시대에 간돌칼 형태로 전형을 갖추었다. 이와 함께 양날의 요녕식 동검과 같은 특정 계층의 권위 상징물로 칼이 출현하였다. 그 후 요녕식 동검을 계승한 한국식 동검이 전쟁 무기로서 입지를 굳혀 나갔으며, 마침내 원삼국시대부터 철제 칼이 등장하여 조선시대까지 중요한 전쟁 무기로서 위력을 발휘하였다.

정의
선사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물체를 자르고 베고 깎거나 전쟁에 사용하기 위해 예리한 날을 만든 도구 또는 무기.
1. 칼의 출현

칼은 시대에 따라 돌 · 청동 · 철 등 다양한 재질로 제작되었으며, 그 용도와 기능에 맞게 다양한 형태로 변화 · 발전하였다. 한반도에서 가장 먼저 나타난 칼은 돌칼이다. 구석기시대부터 돌을 깨뜨려서 모양을 다듬고 용도에 맞게 날을 만든 석기를 사용하였으나 정형을 갖추지는 못하였다.

그 후 신석기시대에는 갈아서 만든 외날돌칼과 돌을 깨뜨려서 날 부분만 잔손질하여 만든 반달돌칼 등이 사용되었다. 외날돌칼은 고성 문암리 유적의 출토품이 유일하다. 반달돌칼은 한국과 중국 동북지방에서 널리 쓰인 농기구이다.

신석기시대 후기부터 잔손질로 떼어내 날을 만든 반달돌칼이 나타나 청동기시대와 초기 철기시대까지 오랜 기간 사용되었다.

반달돌칼은 몸통에 2개 뚫린 구멍에 끈을 끼워 손에 걸어서 사용하는 농기구로서 주로 곡식의 이삭을 따는 데 쓰였다. 반달 모양이 대부분이지만 세모, 긴네모, 물고기 모양, 빗 모양, 배 모양 등 시기와 지역에 따라 다양하다. 한국 동북지방에는 긴 네모와 빗 모양이 많고 서북지방과 중남부지방에는 물고기 모양과 배 모양, 삼각형이 많이 나타난다. 특히 삼각형 돌칼은 벼농사가 본격화되는 송국리 문화의 전형적인 돌칼로서 중남부지방에서만 발견된다.

간돌검은 가장 먼저 나타나는 무기이다. 생활 유적과 무덤에서 모두 발견되는데, 실제 사용되기도 했지만 무덤 부장품이 많다. 간돌검은 손잡이와 칼몸을 하나로 만든 유병식(有柄式)과 따로 만들어 조립하는 유경식(有莖式)이 있다.

유병식은 다시 손잡이 중앙부 홈의 유무에 따라 일단병식(一段柄式)과 이단병식(二段柄式)으로 구분되며, 홈 대신 두 줄의 돌대를 만든 유절병식(有節柄式)도 있다.

유경식은 충청남도 부여 송국리 유적에서 출토된 것처럼 손잡이는 나무를 깎아 조립한 후 끈으로 묶어 고정하거나, 전라남도 보성 봉릉리와 경상북도 안동 지례리 고인돌에서 출토된 것처럼 나무 손잡이에 검파두식을 매달아 사용한 것도 있다.

이단병식은 길이가 30㎝ 내외의 것이 많으며, 칼코등이가 강조되지 않았다. 또 칼몸에 세로로 피홈[血溝]을 만든 것이 많고 검신에 사용 흔적도 있어 실생활이나 무기로도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단병식은 가장 보편적인 간돌검으로 주로 한강 이남의 남부지방에서 많이 발견된다. 손잡이에 비해 칼몸이 길지 않고 칼코등이가 강조되지 않은 것에서 칼몸이 길고 칼코등이가 강조되는 것으로 변화한다. 특히 김해 무계리 유적 출토품처럼 손잡이 부분이 장식적이고 비실용적인 것은 소유자의 위세용 또는 의례용으로 사용된 것이다.

유절병식은 이단병식의 변형으로, 이단병식에 비해 칼몸의 길이가 길며, 주로 남부지방에서만 발견된다.

2. 청동제 칼의 등장

2.1 요녕식 동검

돌칼에 뒤이어 나타나는 칼은 요녕식 동검과 청동도자 등의 청동제 칼로서 금속제 칼의 서막을 열었다. 요녕식 동검은 중국 요녕 지역을 중심으로 출토된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그 지역이 만주 지역이자 고조선 강역이라 하여 만주식 동검, 고조선식 동검이라고도 한다. 또 모양이 비파 같다 하여 비파형동검이라고도 한다.

전형적인 형식은 칼몸 하부가 넓고 둥그스름한 비파 모양이며, 중앙부 위에 돌기가 크게 돌출된 것이다. 그 후 칼몸의 너비가 좁아지고, 돌기가 미약해지는 것으로 변화한다. 또 칼몸 아래에 슴베가 있어 손잡이를 결합하는 구조인데, 이는 중국식 동검이나 북방 지역 동검의 큰 차이점이다. 주로 고인돌이나 돌널 · 돌덧널 등 집단 우두머리의 무덤에서 위세품으로 출토되는 경우가 많다.

2.2 세형동검

그 후 서기전 5세기~서기전 2세기의 초기 철기시대에는 요녕식 동검에서 변화 · 발전한 세형동검[한국식 동검]이 사용되었다. 세형동검은 거푸집이 다수 출토되어 각 지역의 중심 세력들이 직접 만들어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세형동검 형태로 파낸 거푸집 2매를 합쳐서 만든 주입구에 청동 용탕을 부어 형을 떠낸 다음 숫돌에 갈아 몸통과 날을 갈아 완성하였다. 요녕식 동검에 비해 칼몸이 가늘어지고 칼몸과 기부(基部)가 곡선적인 것에서 직선적으로 변화하며, 등대와 칼날 사이에 긴 피홈이 파여 있고 칼날과 등대에는 절대(節帶)와 결입부(缺入部)가 있는 것이 전형적인 것이다. 그 후 결입부의 마디가 뚜렷해지며, 등대의 갈린 면이 기부까지 미치고 결입부도 직선화되는 것으로 퇴화된다.

세형동검은 원삼국시대 전기까지도 사용되지만, 슴베 부근에 구멍이 뚫리는 등 퇴화된 세형동검 또는 동검 형태의 철검 형태로 변한다. 세형동검은 전체적으로 크기가 비슷하게 규격화되고, 칼몸과 손잡이가 결합식인 점, 결입부와 절대 · 등날이 있는 점, 'T'자형의 손잡이와 검파두식(劍把頭飾)을 결합하여 사용한 점 등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청동기시대 후기~초기 철기시대 한민족의 역사 무대인 한반도와 중국 동북지방에서 발견되고 있어 한국형 동검이라고도 한다.

한편 초기 철기시대에는 중국식 동검을 수용하거나 이를 모방 제작하여 사용하기도 하였다. 중국식 동검은 칼몸과 손잡이를 함께 주조한 것으로, 중국 춘추시대 후기부터 한대에 걸쳐 사용되었다. 도씨검(桃氏劍)이라고도 하며, 한반도에는 전국시대 후기부터 유입되기 시작하였다. 평양 석암리에서 진25년(秦二十五年: 서기전 222) 명문이 새겨진 꺾창을 비롯하여 완주 상림리 유적, 함평 초포리 적석목관묘 등 다수의 유적에서 한국식 동검 문화 후기 유물들과 함께 출토되었다.

그중 완주 상림리 유적에서는 26점이 가지런히 출토되었는데, 납 동위원소의 구성비가 금강 유역에서 발견되는 한국식 동검과 일치하여 중국식 동검을 모방하여 현지에서 제작했음을 알 수 있다.

3. 철제 칼 시대로의 전환

3.1 칼의 철기화

청동 칼은 철기 문화의 유입 · 확산과 함께 철제 칼로 전환된다. 그러나 다른 농공구나 무기에 비해 칼의 철기화는 상대적으로 늦게 이루어졌다. 서기전 3세기 중국 전국시대 연(燕)나라의 철기 문화가 파급되어 농공구는 철기화되었지만, 칼은 한국식 동검이 계속 사용되었다. 그것은 한국식 동검이 그만큼 실용적이고 위력적인 무기로서 뿌리 깊게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비로소 철제 칼이 등장한 것은 서기전 108년 서북한 지역에 낙랑군이 설치되면서 한대(漢代) 철기 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되는 원삼국시대부터이다. 이때부터 한국식의 청동기는 급격히 줄어들고 칼을 비롯한 대부분의 무기가 쇠로 만들어진다. 이제 칼의 소재가 청동에서 철로 바뀌어 강력한 철제 칼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3.2 동병철검과 철장검

철제 칼이 나타나는 원삼국시대 전기에는 칼 몸만 청동에서 쇠로 바뀐 세형동검 전통의 동병철검(銅柄鐵劍)과 전혀 새로운 형식인 한식(漢式)의 철장검(鐵長劍) · 도(刀)가 함께 사용되었다.

동병철검은 칼몸과 자루에 끼우는 슴베가 모두 짧은 형태로서 한국식 동검과 함께 사용되기도 하였다. 이 철 단검은 칼몸과 슴베, 칼집 장식과 검파두식 등이 모두 한국식 동검의 그것과 같고, 칼만 청동에서 철로 바뀐 것으로 이전 시기의 세형동검을 본떠 만든 것이다. 그 후 원삼국시대 후기에 이르면 칼 전체가 쇠로 바뀌었다. 특히 이 시기 세형동검과 동병철검은 화려한 목칠제(木漆製) 칼집을 가진 것이 많아 소유자의 권위를 나타내는 위세품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칼집은 세형동검 모양으로 파낸 2매의 나무판을 여러 개의 청동 테두리를 끼워 결합하여 만든 것으로, 표면에는 여러 차례 검은 옻칠을 하였다. 이와 같은 화려한 칼집 장식을 가진 세형동검과 동병철검이 실용적이면서도 위세품으로 기능한 데 비해, 무력적 권위의 표출과 동시에 칼이 위력적인 무기로서 기능하게 된 것은 길이가 50㎝ 이상인 철장검이 등장하면서부터이다.

이때부터 칼의 완전한 철기화가 이루어지고, 강철제의 위력적인 전쟁 무기로서 사용된다. 철장검의 복식품으로서 피장자의 허리에 패용되고, 손잡이 끝부분에 소용돌이 형태의 운기문 의장이 더해지거나 칼에 부속된 검심(劍鐔)과 청동제 장식 등의 의장을 통해 화려한 칼집에 넣어 패용한 철검이 위세품으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3.3 환두대도

철제 단검 · 장검의 사용과 더불어 마침내 외날 칼인 도(刀)의 철기화도 이루어진다. 원삼국시대 전기에 손잡이 끝에 둥근 고리를 가진 환두도자(環頭刀子) 또는 삭도(削刀)가 먼저 나타나며, 후기에는 무기 전용의 고리자루 큰칼도 나타난다. 이와 같이 손칼이나 대도(大刀)의 손잡이 끝에 둥근 고리를 만든 것은 고리에 끈을 걸어 허리에 차거나, 전쟁 무기로 실제 사용할 때 칼을 놓치지 않도록 끈을 묶어 칼을 쥔 손과 결박하거나 또는 고리에 장식 수술을 매달아 소유자의 권위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삭도나 단검처럼 출현기의 도검(刀劍)은 길이가 짧은 것이 대부분이다. 그 후 원삼국시대 후기 · 삼국시대에 이르면 제철 기술이 발달하고 전쟁이 잦아지면서 실제 전쟁 무기로 사용되면서 길이가 급속히 길어진다.

고리칼은 중국 한대(漢代)의 칼에서 유래하였는데, 3C 후반 이후 그 영향으로 길이 60㎝ 이상인 환두대도가 제작되어 궁시(弓矢), 창과 더불어 중요한 전쟁 무기의 위치를 차지함과 동시에 권위 상징물이 되기도 하였다.

환두대도의 출현은 전연성이 뛰어난 철이 청동의 한계를 극복해주고, 첨단의 제철 기술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한편으로는 찌르거나 베는 기능을 주로 하는 검으로는 새로 개발된 철제 갑주(甲冑)에 대응하는 데 한계가 있었던 것도 철제 (환두)대도의 개발을 추동하였다.

철제 갑주는 타격을 가하는 것이 공격 효능을 높일 수 있기 때문에 타격과 베는 기능을 동시에 해낼 수 있는 두껍고 큰 환두대도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와 함께 길이 50㎝ 전후의 중도(中刀), 30㎝ 전후의 소도(小刀) 등 다양한 크기의 칼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전술에 따라 다양한 크기의 칼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제 칼의 장대화와 기능에 따른 분화가 완료되어 전쟁 무기로서 확고하게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모습이 각 지역마다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국가 형성 과정에서 크고 작은 전쟁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군비 강화의 일환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결과 종전의 철검은 시대적 상황에 부응하지 못해 점차 자취를 감추게 된다. 삼국시대에도 장검이 제한적으로 사용되기는 하였지만, 그 기능은 유명무실해지고 도(刀)가 그 기능을 대체하게 된다. 도는 검에 비해 쉽게 만들 수 있는 데다 두꺼워서 잘 부러지지 않고 타격력이 뛰어나다. 또한 무기 기능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곡률을 조정할 수 있으며, 길이가 길어 기병전에서도 유리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 결과 검에서 도로 빠르게 대체될 수 있었다.

3.4 장식대도

환두대도가 대표적인 칼로 인식되지만, 실제로는 고리가 없는 목병대도(木柄大刀)가 더 많이 사용되었다. 환두대도는 원삼국시대에는 고리 안에 장식이 없는 소환두대도가 주류를 이루며, 삼국시대가 되면 고리 안에 다양한 의장으로 장식된 장식대도가 중요한 위력적인 무기이자 권위 상징물로 자리 잡는다. 목병대도는 칼의 슴베에 나무 손잡이를 감싸서 사용하는 실용의 전쟁 무기로서, 전투 시에 손에 오는 충격을 완화하여 악력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도록 개발된 무기였다.

장식대도는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지배층 무덤에서 출토되는 무기이자 복식 구성품이다. 이나 귀걸이, 목걸이, 허리띠장식, 금동신발 등 화려한 신분 상징 유물들과 함께 출토되어 소유자의 신분과 권력, 군사적 위상을 대변해 준다.

장식대도는 칼 손잡이 모양과 문양 장식 따라 소환두대도(素環頭大刀), 삼엽문환두대도(三葉紋環頭大刀), 삼환두대도(三環頭大刀), 용봉문환두대도(龍鳳紋環頭大刀), 원두대도(圓頭大刀), 규두대도(圭頭大刀), 귀면장식대도(鬼面裝飾大刀) 등으로 나뉜다.

이러한 장식대도의 고리는 금이나 금동으로 도금하거나 얇은 은판을 덧씌워 장식하거나, 금 · 은의 귀금속을 상감(象嵌)하여 용, 귀갑(龜甲), 꽃, 물결, 직선, 점 등 다양한 문양을 표현하였다. 이처럼 화려한 장식대도는 실제 무기로 사용되기도 했겠지만, 주로 그 소유자의 정치 · 군사적인 지위와 권위를 나타내는 위세품(威勢品)으로 사용되었다. 장식대도가 무기이자 복식 구성품이라는 점에서 그 소유자는 당시 정치적 지배자임과 동시에 군사지휘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소환두대도는 도가 등장하면서부터 나타나는 가장 이른 환두대도이다. 고리 안에 장식이 없는 것이 많지만 고리와 손잡이, 칼집 일부를 금이나 은으로 장식한 것도 있다. 고리는 원형, 타원형, 상원하방형(上圓下方形)이 있으며, 가장 낮은 위계의 장식대도이다.

삼엽문환두대도는 고리 안쪽에 인동당초 형태의 세 갈래 잎을 형상화하여 장식한 것으로, 소환두대도에 이어서 원삼국시대 말부터 나타난다. 소환두대도와 마찬가지로 삼국과 가야 모두 사용한 장식대도지만 고리와 고리 안의 삼엽 모양이 조금씩 차이가 있다.

고리나 삼엽 문양에 장식이 없는 것이 먼저 나타나며, 곧 금 · 은으로 장식한 것이 주류를 이룬다. 고구려에서 가장 먼저 채용되어 곧이어 신라를 비롯한 주변의 여러 나라로 파급된 것으로 추정되나 고구려는 자료가 많지 않아 정확한 내용을 알기 어렵다. 백제는 전라남도 나주 신촌리 9호분 을관 · 복암리 3호분 96석실 등에서 출토된 것이 있지만, 일본 나라현 주성산(珠城山) 1호분과 후쿠이현 마루야마스카[丸山塚] 고분 출토품과 거의 같아 왜와의 교류를 통해 들어왔을 가능성이 높다.

삼엽문환두대도는 신라에서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되었다. 처음에는 삼환(三環)이나 둥근 고리 안에 삼엽을 장식하였으나 5세기에 들어서면서 상원하방형의 고리 안에 삼엽을 장식하는 것으로 정형화되었다. 가야에서는 금 · 은으로 장식된 삼엽문환두대도는 확인되지 않았다. 따라서 백제와 가야는 삼엽문환두대도를 자체 제작하여 장식대도로 사용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삼환두대도는 손잡이 끝에 ‘C’자 모양의 고리 세 개가 삼각형으로 연결되어 있는 칼로서 ‘삼루환두대도(三累環頭大刀)’라고도 한다. ‘C’자 고리에는 운기문이 타출된 금 · 금동 · 은판으로 감싸서 장식하였다. 신라 지역에서만 발견되고 있어 신라 장식대도라고 할 수 있다.

경주, 대구, 경산, 의성, 성주, 창녕, 양산, 부산 등 신라의 중앙과 지방의 지배자 무덤에서만 출토되는데, 특히 경주에서는 신라 배타적인 중앙 지배층 무덤인 황남대총 남분, 금관총 등 최고 위계의 돌무지덧널무덤에서 묘주(墓主)의 복식품으로 착장된 경우가 많아 최고 위계의 장식대도임을 알 수 있다.

그 후 6세기 이후가 되면 용봉문환두대도가 그 자리를 대체하면서 한 단계 격이 낮아진다. 용봉문환두대도는 고리 안에 용이나 봉황 또는 용 · 봉황 의장을 넣어 장식한 대도로서, 고리 외면에는 문양이 없는 것도 있고, 가운데 쪽으로 향하고 있는 두 마리의 용을 표현한 것도 있다. 용과 봉황의 구분이 어려운 경우가 많지만, 용은 윗입술이 위로 뒤집히고 혀를 길게 내밀고 있으며, 봉황은 입이 새부리 모양으로 끝이 아래를 향하고 있다. 그중 봉황만 장식된 경우가 많다.

용봉문환두대도 중에 용이 장식된 것은 무령왕릉 환두대도 등 3례밖에 없다. 또 용과 봉황이 함께 장식된 경우는 있지만, 쌍용이나 쌍봉으로 장식된 것은 없다. 또 고리 안쪽에는 장식이 없고 고리 외면에만 용문을 장식한 것도 더러 있다.

손잡이 위쪽의 연금구(緣金具)와 아래쪽의 초구금구(鞘口金具)는 금동 바탕에 두 마리의 용이 목을 반대 방향을 교차하는 문양이 있는 것이 많은데, 타출(打出) 기법으로 돋을새김한 것과 문양이 없는 바탕판 위에 투조한 용 문양판을 덧씌운 것이 있다. 이와 같이 용봉문환두대도는 용과 봉황이 상징하듯, 삼국시대 각 나라의 최고 위계의 장식대도로서 최첨단의 금속 공예 기술을 망라되었다.

환두 계통의 장식대도는 6세기 이후가 되면 점차 자취를 감추고, 손잡이 끝부분 전체가 통금(通金)으로 장식된 원두(圓頭)대도나 규두(圭頭)대도, 방두(方頭)대도 등으로 대체된다. 원두대도는 은판으로 둥근 모양의 머리 부분을 만들어 손잡이 끝에 끼워서 사용하는 것으로, 가운데에 끈을 끼우거나 수술을 매달기 위한 심엽형(心葉形) 또는 원형의 구멍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다.

지금까지 충청남도 공주 송산리 고분군과 경상남도 창녕 교동 고분군 등 백제와 가야 지역에서만 확인된다. 그중 교동 출토품의 칼등에는 백제의 관등 이름인 ‘내솔(奈率)’ 명문이 금으로 상감되어 있어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원두대도에서 파생된 머리가 홀 모양인 규두대도와 방형인 방두대도도 드물게 확인된다.

규두대도와 방두대도는 각각 전라남도 나주 복암리 3호분 5호 석실과 7호 석실, 경상남도 창녕 명리Ⅲ-1호분에서 출토된 것[은삼감]이 있다. 6세기 전반 이후의 이러한 장식대도들은 일본 고분시대 후기 고분에서 출토되는 사례가 많아 왜에서 유입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백제 원두대도 계통일 가능성이 높다.

그 외 나주 복암리 3호분 7호 석실에서 출토된 귀면문(鬼面紋)대도도 있다. 이 장식대도는 머리 부분에 삼환두대도처럼 'C'자 고리 세 개를 삼각형으로 연결하고 그 안에 귀면 의장을 넣은 것이다. 이와 유사한 것이 일본 아오모리현[靑森縣] 단후평(丹後平) 15호분에서 출토되었는데, 백제 또는 영산강 유역에서 유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장식대도 중에는 금 · 은 · 동의 귀금속을 이용하여 용문, 봉황문, 귀갑문(龜甲紋), 화문(花紋), 선문(線紋), 파상문(波狀紋), 점문(點紋) 등의 다양한 문양을 상감(象嵌)한 장식대도도 있다.

신라 삼환두대도를 제외한 거의 모든 종류의 대도에서 상감기법이 확인되는데, 상감은 환두대도의 고리와 고리 안의 삼엽, 용, 봉황 의장 부분은 물론, 칼 몸에도 적용되어 있다. 장식대도의 경우 상감은 선상감과 점상감이 적용되었다. 장식대도를 포함하여 상감 기법이 적용된 유물은 아직 고구려에서는 확인된 바 없고, 고구려 문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신라에서도 상감장식 대도는 호우총 출토 용봉문환두대도 등 극소수밖에 없다.

반면에 백제 지역에서는 4세기 중후엽부터 장식대도를 포함하여 많은 유물에서 확인된다. 또한 백제 문물의 영향을 많이 받은 가야와 왜에서도 상감 장식대도를 비롯한 상감 유물들이 많이 확인되고 있어 백제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그 대표 예로 앞서 언급한 경상남도 창녕 교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내솔(奈率)’명 금상감 원두대도와 일본 나라현[奈良縣] 덴리시[天理市]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에 보관되어 있는 칠지도(七支刀)를 들 수 있다.

칠지도는 단조(鍛造)로 만든 칼[검]의 앞 · 뒤 양면에 글을 새겨 넣을 수 있도록 가장자리를 따라 금선(金線)으로 구획하고, 앞 · 뒤 양면의 구획 안에는 '칠지도(七支刀)'라는 검명(劍名)과 함께 "태화(泰和) 4년(근초고왕 24: 369년) 백제 왕세자가 왜왕을 위해서 칠지도를 만들어 하사한다"는 61자의 명문이 금상감(金象嵌) 되어 있어 백제에서 만든 것임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 외 다른 상감 장식대도 역시 그 의장이나 상감 기법 등이 백제의 그것과 같아 일본의 상감 장식대도는 기본적으로 백제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4. 삼국시대 이후 칼의 변천

철제의 칼은 6세기 중엽 이후 출토 사례가 급격히 감소한다. 이러한 현상은 실제로 철제 칼의 제작 · 사용이 감소한 것이 아니라 통일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실전에 사용되고 무덤 부장을 엄격히 제한했기 때문이다. 그 후 삼국통일 후에는 종전에 비해 철제 무기의 생산량이 줄어들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실물로 출토되는 사례도 거의 없다.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의 "무기를 녹여서 농사에 필요한 농기구를 만들라"는 유조가 반영된 결과이다. 이 시기 칼의 모습은 무덤 둘레의 십이지신상과 석탑의 탑신에 새겨진 각종 신상(神像)이 들고 있는 칼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그중 김유신묘(金庾信墓)의 십이지신상 중 용, 뱀, 양이 들고 있는 칼은 모두 둥근 고리를 가진 소환두대도이다. 반면에 묘 주변에 묻혀있던 원숭이가 짚고 있는 칼은 용 또는 귀면(鬼面)이다. 그 외 석탑의 탑신부에 새겨진 칼은 소환두대도가 대부분이고, 가끔 삼엽 · 삼환두대도로 추정되는 것도 있다. 이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도 소환두대도를 기본으로 이전부터 이어지는 다양한 형태의 장식대도를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더불어 당나라의 문물의 수용과 함께 당에서 발달한 칼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일본 쇼소원[正倉院] 보관 유물에 다수의 통일신라 장식대도가 보관되어 있고, 나라[奈良]시대 이후에는 환두대도를 ‘고려검(高麗劍)’이라고 기록한 점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의 장식대도가 일본에까지 알려질 정도로 유명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역시 철제 칼은 충청북도 청주 봉명동 고려 무덤에서 출토된 것 이외에 알려진 사례가 없어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다. 다만 고려가 정치 · 문화적으로 신라의 전통을 계승하였으므로 도검 역시 신라의 그것을 계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고려시대에 만개한 수준 높은 금속 공예 기술로 보아 도검에도 화려한 금장식이 가미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사(高麗史)』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등에 날이 길고 곧으며, 칼코등이를 가진 칼이 묘사되었는데, 봉명동 무덤에서 출토된 칼 모습 그대로이다. 그런데 고려 현종 때 " 강조(康兆)가 거란의 제2차 침공을 통주성(通州城)에서 맞아 싸울 때 검거진법(劍車陣法)으로 물리쳤다."고 한 것으로 보아 칼을 이용한 다양한 전술이 구사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또 국가적 행사였던 " 연등회(燃燈會) · 팔관회(八關會)에 참가하는 군사들은 계급에 따라 은장(銀粧) 칼과 금장(金粧) 칼을 찼다."는 기록, 그리고 "문지기 병사[장교]들이 칼자루는 백금으로 칼몸은 쇠뿔로 상감한 길고 예리한 칼을 소지하였으며, 칼집은 물고기 가죽[魚皮] 바탕에 옥 등으로 장식하였다."고 한 기록으로 보아 철제 칼이 위력적인 전쟁 무기나 방호 무기로서 뿐만 아니라 계급에 따라 다양한 의장의 장식 칼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이는 옛날 제도의 유습이다."라고 특별히 부기한 것으로 보아 도검 그 자체는 물론 신분과 계급에 따른 도검 형태 및 의장의 차별화 등이 통일신라에서 거의 그대로 이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와 더불어 고려 후기에는 원나라의 간섭 아래에 있었던 만큼 원의 영향을 받은 칼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을 대표하는 칼은 군사용의 환도와 장도, 호신용의 창포검과 횃대 · 좌장검 등이 있다.

환도는 길지 않은 칼몸이 등 쪽으로 약간 휘어 있고, 손잡이와 칼몸 사이에 칼코등이가 있으며 칼집에 고리를 달아 허리에 찰 수 있도록 만든 칼로서 요도 또는 패도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이후에는 일본도(日本刀)의 영향으로 개량되기도 하였다.

장도는 긴 자루 끝에 폭이 넓고 긴 칼날을 끼운 칼로서, 월도(月刀), 언월도(偃月刀), 언월청룡도(偃月靑龍刀) 등이 있다. 길이 2m의 언월도는 너무 무거워 실전보다는 훈련이나 행사 시의 시위용(示威用)으로 사용하였다. 조선 후기의 반차도(班次圖) 등에서 그 모습이 확인된다.

호신용 도검은 위급할 때 몸을 보호하기 위해 소지했던 칼로서 창포검(菖蒲劍)과 횃대, 좌장검 등이 있었다. 창포검은 임기응변으로 칼이나 창으로도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도검이다. 횃대는 천장에 매달아 옷을 걸쳐 놓는 데 사용하다가 유사시에는 무기로 사용하였다.

이 외에도 일정한 모양을 갖추지 않고 호신용 칼이 많은데, 칼을 소장한 사람의 기호와 체격에 맞게 다양한 형태와 크기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전쟁의 주력 무기는 궁시(弓矢)가 차지하고, 칼은 실전 무기로서의 중요성이 저하되었다. 무과(武科) 시험 과목에 기승술(騎乘術) · 궁술[弓術] · 창술(槍術)은 있지만 도검술(刀劍術)은 빠져있는 것이 이를 대변한다. 그러나 무력적 권위 상징물의 기능은 여전히 지속되었다.

또 조선시대에는 무(武)보다 문(文)이 숭상되었으므로 칼이 널리 보급되지 못하였다. 더구나 임진왜란 때부터는 화력 무기인 총을 사용하게 되면서 전투용 도검은 더욱 쇠퇴하였다. 그렇지만 일상생활용 칼은 다양한 용도로 분화되고, 제작 기법도 발달하면서 각계 각층으로 보급되었다.

전국 어디에나 큰 마을에는 대장간이 생겨서 부엌칼을 자유로이 만들어 공급하였으며, 여인들과 선비들은 전문 공방에서 제작된 은장도(銀粧刀)로 대표되는 소형의 장식 칼을 소지하면서 호신 · 의장 · 실용 등 다목적으로 사용하였다.

5. 근대 이후 칼의 종말

실전 무기로서 칼의 생명이 완전히 끝나는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였다. 구한말의 신식군대는 마침내 전통 무기인 대도(大刀)를 버리고 신식군도(新式軍刀)를 패용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주로 의장용으로 사용되고 실전 무기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는 일본군의 군도가 치안과 무력 진압용으로 사용되었는데, 조선 사람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군인이나 순사(巡使)는 물론 관리나 학교 교사에게까지 칼을 채워 무단공포정치(武斷恐怖政治)의 상징물로 사용하였다.

광복 후 대한민국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군대나 경찰에서도 칼이 완전히 사라진다. 군대에서는 총기만 사용하고, 경찰에서는 칼 대신 경찰봉이라는 나무방망이를 차게 되었고, 군도(軍刀)는 고대 이래의 군사적 의장용의 잔영만 남게 된다. 오늘날 대통령이 새로 임명된 각급 참모총장이나 군 장성에게 화려하게 장식된 삼정검 수여하는 것도 그 전통이다.

6. 칼과 문화

이와 같이 칼은 구석기시대~현대까지 그 역사가 오랜 만큼, 칼과 관련된 상징 · 설화 · 속담 · 시가(詩歌) · 민속이 많다. 무엇보다 칼은 무기 중에서도 영험한 위력을 가진 상징물로 인식되었다.

"태화 4년(369년) 5월 16일 병오일 한낮에 백 번이나 단련한 강철로 칠지도를 만들었는데 이 칼로 온갖 적병을 물리칠 수 있다."라는 칠지도 명문, 조선 선조 27년(1594) 4월에 태귀련과 이무생이라는 두 사람이 제작하였다는 두 자루 칼의 칼몸에 똑같이 새겨진 "석 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강이 떨고, 한바탕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라는 명문을 통해 칼이 영험한 위력을 가진 것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외에도 칼의 영험한 위력을 강조한 기록은 곳곳에 산재한다.

그 다음 칼은 고대 이래 용감한 남성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원삼국시대~삼국시대 무덤에서 묘주가 허리에 큰 칼을 차고 있는 경우 모두 남성이자 전사 또는 군사지휘관적 인물이었다.

또 실용 무기로서의 철제 도검에서부터 다양한 의장으로 장식된 장식대도에 나타나는 바와 같이 고대에는 칼의 형식과 의장이 정치 · 군사적인 계층을 구분하는 수단이기도 하였다. 신라 진흥왕 때의 화랑에 검군(劍君)이 있고, 후백제왕 견훤(甄萱)의 아들인 신검(神劍, 2대왕) · 양검(良劍) · 용검(龍劍) 등 칼을 상징한 이름은 용감하고 씩씩한 남아가 되라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다.

설화로는 고구려 동명성왕의 단검(斷劍), 김유신(金庾信)의 신검(神劍), 장보고(張保皐: 弓巴)에 얽힌 이야기 등이 있다. 동명성왕의 단검 설화에서 칼은 동명왕의 뒤를 이은 최고 권력자 유리명왕(瑠璃明王)이라는 남아(男兒) 탄생의 신표(信標)로 여겨졌으며, 김유신의 신검 설화는 충신 김유신의 보검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해주고 백제와 당나라군을 물리치는 군사력과 국가 보위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장보고의 장검 설화는 반역자는 스스로 차고 있던 장검으로 처참하게 처단되고, 장검이 군사력의 상징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칼은 설화 차원을 넘어 종교 상징물이 되기도 하였다. 고대 이래 만연한 도교 의식에 거울 · 악기와 더불어 칼이 세 가지 중요한 법기(法器)로 사용되었다. 광주 신창동 저습지 유적에서 북과 거울 모양 목제품과 함께 출토된 목검(木劍)은 도교 의례 시에 천지감응(天地感應)의 매체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칼은 고대(古代) 이래 생활 도구, 전쟁 무기로서 뿐만 아니라 사악한 기운을 끊고 재앙을 막는 도구로도 인식되었다. 조선시대 임금이 사용한 어도(御刀), 임금의 좌우에서 호위하는 관원(官員)이 패용한 운검(雲劍) · 별운검(別雲劍), 사악한 기운을 끊고 재앙을 막는 의미로 사용된 인검(寅劍) 등이 의식에 사용되거나 특별한 의미를 지닌 다양한 칼이 제작되어 사용되었다.

현전하는 태조 이성계의 어도는 몸통이 등 쪽으로 약간 휜 곡도(曲刀)지만, 칼끝은 날 쪽으로 휜 독특한 형태의 칼이다. 손잡이는 물고기 가죽[魚皮]으로 감싸고, 그 끝에는 용머리를 조각하여 단청으로 채색한 후 용의 턱에 철환을 달고 붉은 수술을 드리웠다. 칼집은 나무에 한지를 바르고 다시 어피로 감싼 후 두텁게 주칠(朱漆)을 하여 왕의 위용을 드러내고자 했다. 운검은 자루와 칼집을 상어가죽[魚皮]으로 장식하였는데, 어피의 무늬가 용이 내뿜는 상서로운 구름과 같다 하여 운검이라 불렀다.

칼의 상징적 기능을 가장 잘 나타낸 것이 인검(寅劍) 혹은 칠성검(七星劍)이다. 인검은 인년(寅年), 인월, 인일, 인시[새벽 3∼5시]에 만들었는데, 12간지 중 호랑이를 뜻하는 인(寅, 혹은 辰)이 양의 성질을 지녀 음습한 기운을 물리칠 수 있다고 여겼다. ‘인’이 네 번 들어가면 사인검, 세 번 들어가면 삼인검이 되는데, 칠성검도 인검의 범주에 든다. 인검은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해 만들었기 때문에 북두칠성과 같은 별자리나 주문(呪文) 등 다양한 상징을 상감해 넣었다.

도검은 장수의 굳건한 기개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남이(南怡)의 한시(漢詩)와 김종서(金宗瑞), 이순신(李舜臣)의 시조에 칼은 엄청나게 큰 장도(長刀)로서 군대의 지휘 또는 위엄을 갖춘 용감한 장수의 상징물로 묘사되었다.

충청남도 아산 현충사(顯忠祠)나 경상남도 충무 충렬사(忠烈祠)에 보관된 이순신 장군의 칼은 가슴까지 오는 크고 장대한 칼로서 들기도 버거워 그 상징적 의미를 짐작코도 남는다.

도검과 관련된 속담들도 많아 칼이 일상생활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말해 준다. 속담에서의 칼은 강력한 무기나 위험스러운 흉기라는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고, 그 밖에 예리한 도구 또는 권위의 상징 등의 의미로도 많이 사용되었다.

이 밖에 전쟁에서의 용검술(用劍術)을 춤으로 승화하여 전쟁에서 죽은 전사자의 넋을 위로하며 칼을 휘두르며 추는 진주검무(晉州劒舞)도 신라 이래 고려~조선과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 칼은 망나니나 무당들이 춤을 추고 사형을 집행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사형을 집행하는 망나니가 사형수의 목을 내리치기 전에 겁에 질린 사형수의 혼을 빼기 위해 한바탕 칼춤을 추고, 급기야 그 칼로 사형을 집행하였는데, 여기서 망나니 칼춤이라는 말이 회자되었다.

신칼은 무당이 굿을 하면서 춤을 추며 악귀를 쫓는데 썼던 주구(呪具) · 무점구(巫占具)이다. 무칼 · 명도칼 · 대신칼 · 신명도 · 대번지 · 시왕대번지 등으로 불렸다. 길이 20∼30㎝의 놋쇠 칼 한 쌍의 손잡이에 40㎝ 정도의 한지 술을 여러 가닥을 달아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7. 의의와 평가

칼은 구석기시대부터 현대까지 시대에 따라 그 재질은 물론, 그 용도와 기능 역시 시대적 요청에 맞게 변화하였다. 그 결과 가장 보편적인 도구이자 무기로서 칼 그 자체의 시대적 흐름 파악은 물론 이와 공반되는 다른 고고학 자료의 연대를 파악할 수 있는 기준 자료가 되고 있다.

또 칼은 일반적인 도구나 무기 이외에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어 각 시대의 다양한 사상적 흐름도 파악할 수 있다. 단순한 생활 도구로서, 문자의 서사 도구로서, 엄청난 위력을 가진 전쟁 무기로서, 지배층의 정치 · 군사적인 권위 상징물이자 다양한 상징물로 사용되는 등 엄청난 콘텐츠를 담고 있다.

그중에서도 철제 칼이 나타나는 원삼국시대 이후에는 칼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 전쟁 무기인 만큼 칼의 변화 과정을 통해 각 시대별 무기 변화는 물론 군사 조직, 전술, 전쟁 양상까지 읽어낼 수 있다.

또 삼국시대 이래 장식대도로 대변되는 화려한 칼에는 당대 최고의 금속 공예 기술이 망라되어 각 시대별 금속 공예 기술을 파악하는 데도 매우 중요하게 활용되고 있다. 이와 같이 칼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며, 실생활과 전쟁 무기로 사용되는 가운데 일상생활에도 많은 영향을 미쳐 칼에 얽인 전설, 설화, 민담 등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를 통해 사상 · 관념을 이해하는 데도 칼은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참고문헌

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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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잡기(東京雜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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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단행본

『한국의 칼』(국립대구박물관,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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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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