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5년(고종 2) 서원철훼령이 내려 만동묘가 헐리게 되자, 춘추대의 정신이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훼손하지 말 것을 상소하였다. 1888년(고종 25) 의정부의 천거로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았다.
1894년(고종 31)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찾아오는 손님도 만나지 않는 등 칩거하였다. 동학군이 봉기하자 향약을 보급하여 향인을 교화했으며,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내려지자 자정(自靖)의 생활로 학문을 닦고 연구하는 데만 전념하였다.
1903년 학행이 뛰어나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받아 고종이 홍문관서연관(弘文館書筵官)에 임명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 뒤 영동군 학산면 활산에 강당을 세우고 많은 문인들을 지도 · 계발하여 천리를 밝히며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정력을 기울였다.
1905년 형 송병선이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을 파기하기 위해 활동하다 순국하였음을 듣고, 옳은 길을 지켜 죽을 때라고 “은산철벽에 불타 버리지 않는 것은 오직 옥(玉)이다.”며 구국활동을 결심하였다. 그 해 11월 「토오적문(討五賊文)」을 지어 전국의 유림에게 배포하며, 민족정기를 드높이고 국권을 회복할 것을 호소하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나라를 위하는 충성과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에는 순국하는 길밖에 없다.” 하고 그 해 9월 5일 강당 위 서산의 높은 봉우리에 올라 투신자살하려고 하였다. 그 때 마침 문인 김용호(金龍浩)가 뒤에서 껴안아 실패하자, 그 뒤 두문불출하고 망국의 슬픔을 시로써 달래었다.
이 때 영동군 양산의 일본 헌병대가 은사금을 가져오자 이를 질책하여 거절하였다. 1912년 일제가 회유책으로 경학원(經學院) 강사에 임명하였으나 이를 거절하고, 대의를 지켜 순국할 것을 결심, 유서를 남긴 뒤 독약을 먹고 자결하였다.
저서로는 15권의 문집과 『독서만록(讀書漫錄)』, 『학문삼요(學問三要)』, 『사례축식(四禮祝式)』, 『용학보의(庸學補疑)』, 『주서선류(朱書選類)』 등이 있다.
1914년 왕명으로 영동에 문충사(文忠祠)를 지어 형 송병선과 함께 배향했으며, 1966년 전국 유림들이 뜻을 모아 대전시 용운동에 용동서원(龍洞書院)을 짓고 이 곳으로 문충사를 옮기었다.
1973년 영동역 앞에 ‘순국의사심석재송선생병순지상(殉國義士心石齋宋先生秉珣之像)'이라 이름 붙여진 동상이 세워졌다. 1968년에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