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재산의 포기와 독신생활이 공통적인 특징이며 집중적인 명상과 여러 형태의 고행이 수반되기도 한다. 수도생활에 전념하고 있는 사람을 불교에서는 ‘승려’ 또는 ‘수행자’라 하고, 가톨릭에서는 ‘수도자’라 하고 이슬람에서는 ‘수피(sufi)’라고 한다.
또한 신자들의 영성(靈性)을 개발하고 완벽한 종교생활을 영위하기 위하여 많은 종교에서는 평신도들에게도 수도생활이 권장된다.
수도회의 제도가 독특한 형태로 가장 체계화되어 있는 종교가 가톨릭이기 때문에 수도회라고 하면 보통 가톨릭의 경우를 일컫는 것이 상례이다.
수도원(修道院)은 수도사들이 공동생활을 하는 주거장소를 말하는데, 가톨릭에서 정규 수도원이 되기 위해서는 최소 6명의 서원 수도자가 있어야 하고, 성직수도회의 경우는 6명 중 4명이 신품성사를 거친 사제이어야 한다.
회원들도 교리법에 의하여 합법적으로 인가된 회칙에 따라 공식서원을 한 사람들로 구성되는데, 이들을 수사(修士) 또는 수녀(修女)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 나라에 전적으로 봉사하기 위하여 가정과 재산을 포기하고 하느님의 뜻에 끝까지 복종한 것을 본보기로 하여 가난과 독신, 그리고 수도규칙과 수도원장에 대한 순종을 세가지 복음적 권고라 하여 가톨릭 수도생활의 원형으로 삼고 있다.
수도자의 교회 내 신분은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중간이 아니라 특수한 은사의 부름(聖召)을 받아 이바지하는 신분이므로 성직자냐 평신도냐에 관계없이 수도자가 될 수 있다.
수도생활의 근거는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찾아볼 수 있다. 물론, 구약에서는 본래 의미의 수도생활에 대한 언급이 없으나 구약의 예언자 가운데 엘리야와 예레미야는 은둔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에 대한 헌신과 독신생활을 함으로써 수도생활의 선구자로 간주될 만하다.
구약 말기에 나타난 에세네파(Essener派)와 쿰란집단도 공동생활의 강조, 복종의 규율, 독신제와 재산 포기에 의한 가난을 신조로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수도생활의 전형적인 모습은 예수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예수는 천국을 위한 독신생활과 가난을 가르쳤고,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뜻에 복종한 완전한 순명의 모범을 보임으로써 완전한 자의 길을 가르쳤다고 간주된다.
제도로서의 수도회가 처음 생긴 것은 4세기경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은수자(隱修者)라 하여 사막이나 광야에 머물면서 하느님과의 보다 밀접한 관계를 맺으려는 이가 있었다.
그 중 성 안토니오가 가장 유명하며 수도자의 아버지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런 수도생활은 4세기부터 6세기까지 주로 이집트와 팔레스티나, 그리고 시리아지방에서 성행하였다. 후대로 내려와서 독수도(獨修道) 생활과 함께 집단 수도생활이 나타났다.
성 바코미오는 이전의 독수생활과는 전혀 다른 집단 수도생활을 처음으로 주도한 사람이다. 이와 같이 집단적인 수도회가 생김에 따라 독수생활이 불가능했던 여자들도 세속을 떠나 복음적 권고를 실천할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성 아타나시오가 『성 안토니오전』을 저술하여 수도생활의 이상을 서방에 소개하자 많은 사람들이 이를 추종하게 되었고 그 영향으로 서방에도 수도회가 나타나게 되었다.
서방의 초기 수도제도는 이집트 수도생활의 영향을 받아 독수도자와 회수도자(會修道者)의 제도를 혼합한 것이었다. 그 뒤 발전을 거듭하여 유명한 ‘성 베네딕토 규칙’이 나타나게 되었고, 8세기부터 13세기까지 모든 서방의 수도회는 이 규칙을 따르게 되었다.
이 규칙의 특징은 정주제도(定住制度)로서 한 번 어느 수도회에서 서원하게 되면 다른 수도회로 옮길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에 수도회가 안정된 자립적 공동체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
13세기까지만 해도 수도자 중에는 사제가 거의 없었다. 성 바코미오, 성 베네딕토 모두 평신도였다. 당시 수도자들은 만일 신품을 받으면 겸손의 덕을 지키기 어렵고 하느님을 찾는 일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주교들은 수도회가 훌륭한 인재양성소임을 파악하고 사목상의 필요에 의하여 일부 수도자들로 하여금 신품을 받도록 하여 사제가 되게 하였다.
그에 따라 사목에 알맞은 아우구스티노 수도회가 형성되었다. 이 밖에도 설교를 목적으로 하는 노르베르토회와 이단 알비파를 회개시킬 목적으로 창설된 도미니코회도 나타났다. 특히, 도미니코회는 정주제도를 폐지하여 회원들이 자유로이 돌아다니면서 설교하게 하였고, 학문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게 하여 예수회와 쌍벽을 이루며 세계적인 학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성 도미니코와 같은 시대 사람으로 성 프란치스코가 있는데, 그는 이전의 수도회를 본받지 않고 오직 예수와 사도들의 생활방식에 따라 사는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또한 이 수도회는 개인적인 가난과 청빈뿐 아니라 단체적인 가난도 요구하였기 때문에 회원들은 구걸하는 경우가 많아 ‘탁발 수도회’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한편, 예언자 엘리야가 가르멜 산에서 극기생활한 것을 본받아 1247년에는 가르멜수도회가 창설되었다.
16세기에 성녀 테레사와 십자가 성 요한은 이 수도회를 개혁하여 신비적 관상생활(觀想生活)을 하는 가르멜회의 영성을 결정짓게 하였다. 중세가 지난 뒤 종교개혁이 이루어지고 계몽주의가 성행하는 등 가톨릭에 대한 도전이 거세지는 가운데 성 이냐시오는 포교사업을 위하여 1534년 ‘예수중대’를 조직하였으며, 나아가 여기에서 예수회가 형성되었다. 이 회는 이전보다 더욱 집중적인 조직을 가지며 완전한 순명과 철저한 학문연구로 유명하였다.
예수회 이후의 수도회는 대부분 일정한 목적을 띠고 세워졌는데 성 요한 수도회는 병자의 간호, 성 요한 돈 보스코의 살레시오회는 청소년 교육, 이탈리아 돈 알베리오네의 성 바오로 수도회는 출판과 매스컴의 사도직을 목적으로 하는 등이다.
이 밖에도 외관상 수도회와 같지만 회원들이 수도서원을 하지 않는 많은 단체들이 생겨났다. 그 중 1663년에 창설된 파리 외방 전교회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이런 단체는 주로 재속 신부들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최근에는 수도자라는 명칭을 거부하고 사회인으로서 복음적 권고를 지키려는 자들이 많이 생겼는데 이들 집단을 재속회라고 한다. 대체로 여자의 수도생활은 남자보다 훨씬 엄격하여 남자에게는 사회활동을 허락하면서도 여자에게는 기도와 희생의 사도직만을 맡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근대에 들어서는 여자 수도자에게도 대부분 외부활동을 허락하고 있지만, 수녀회 중에는 외부사람의 출입을 허용하지 않는 곳도 있다. 수적으로 수녀가 수사보다 훨씬 많으며 교회 내 자선사업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다.
엄격하게 보면 우리나라 가톨릭 교회의 창립기부터 동정녀와 은수자가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홍유한(洪儒漢)은 소백산 기슭에서 자발적으로 은수생활을 했으며, 강완숙(姜完淑:골롬바)을 중심으로 독신자와 동정녀의 공동체가 생겨났음을 미루어 볼 때 나름대로 수도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심지어는 유교사회의 엄격한 사회규범 속에서 동정생활을 하기 위하여 동정부부의 길을 택한 사례까지도 있었다. 그러나 박해시대에는 공식적인 수도생활이 불가능하였다.
최초로 정식 수도회가 형성된 것은 1888년(고종 25)으로 조불수호통상조약(고종 23) 체결 2년 후였다. 이때 처음으로 한국에 진출한 수도회는 프랑스 샤르트르에 본원을 둔 성 바오로회였다.
이 회는 당시 조선교구장이었던 주교 블랑(Blanc)이 선교·구제·교육사업을 위한 수도자를 요청하여 들어온 것으로, 2명의 수녀가 한국에 온 뒤 4명의 조선인 수녀 지원자를 선발하여 곧바로 양로원과 고아원을 운영하였다.
두번째는 독일 남부 오틸리엔에 본부를 둔 성 베네딕토회로 1908년 진출하였으며 남자 수도회로서는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주교 블랑의 후임인 주교 뮈텔의 초청으로 한국에 온 이 수도회는 고등교육과 포교를 통하여 교회와 사회의 지성인 양성에 목적을 두고 서울에 수도원과 학교를 설립, 고등교육과 기술교육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1920년 원산교구를 담당하게 되면서 포교를 위한 평범한 수도회가 되었다. 최초로 들어온 이 두 수도회는 조선교구장의 초청으로 왔기 때문에 주로 교구사업을 돕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1910년 국권상실 이후 일제통치하에 들어가게 되자 교회 발전에 커다란 장애가 따랐다. 그러나 많은 수도회들이 한국에 진출 혹은 국내에서 형성되어 한국교회의 내적인 충실을 이루게 하였다.
1924년 평양교구에 진출한 메리놀 수녀회와 이 수녀회를 기반으로 창설된 영원한 도움 성모회(1932), 남자 성 베네딕토회를 돕고 협력하기 위하여 1925년 진출한 포교 성 베네딕토회, 경상도지역에서 한국인 처녀들이 공동체로 형성한 예수 성심 시녀회(1935), 1937년 캐나다에서 한국에 진출했으나 당시 국제간의 알력으로 감옥에서 고생한 성 프란시스코회, 1939년 진출한 가르멜 수녀회 등이 그것이다. 특히 미국의 동방선교를 위하여 창설된 메리놀 수도회는 평양교구를 맡아 본당사업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 뒤 1941년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나 활동이 중단되었으나 8·15광복 후 재개하여 의료활동을 중심으로 많은 일을 행하고 있다. 예수 성심 시녀회는 영천군에서 처녀 6명이 ‘삼덕당’이란 이름의 공동체를 이루어 본당일을 도우며 가난한 가정의 자녀를 지도하면서 시작되었다.
1952년 9월에는 교황청의 윤허로 정식 수녀회로 인준받았으며, 1963년 1월 수녀회 회칙을 허락받아 그 해 첫 번째 종신서원자를 냈다.
8·15광복 후 혼란의 와중에서도 교황 바오로11세의 교회지역화 회칙에 따라 한국인 성향에 맞는 수도회의 창설에 힘을 기울여 1946년 4월 21일 한국 순교복자 수녀회가 세워졌다. 신부 방유룡을 중심으로 창설된 이 수도회는 한국의 초대신부 김대건(金大建)의 순교 100주년이 되는 해에, 우리나라 순교 선열을 주보로 삼고 순교정신을 바탕으로 생활하면서 한국에서의 구원사업과 한국 고유문화를 보존하고 계승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으며, 1951년 12월 교황청의 정식인가를 받았다.
또한 방유룡 중심으로 1953년 한국 순교복자 성직 수도회가 순교자 현양과 출판·교육·의료사업의 목적으로 창설, 1956년 교황청의 인가를 받고 1957년 최초의 허원자 12명을 배출하였다. 그 밖에 신부 윤을수에 의하여 1958년 6월에 세워진 성체회, 1960년 선종환 신부에 의하여 창설된 성모 영보 수녀회, 1964년에 세워진 거룩한 말씀의 회, 성모 성심 수도 수녀회 등이 있다.
8·15광복과 더불어 남한에서는 수도회가 많은 발전을 거듭하였으나 북한에서는 공산주의화가 진행되면서 수도회들이 혹심한 박해를 받았다. 특히 덕원·연길지역에서 활동하였던 성 베네딕토회와 평양지역에서 활약하였던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성 바오로회는 수도원 건물, 사업기관·토지 등을 몰수 당하였고 순교까지 치러야 하였다.
6·25전쟁 이후 한국사회를 부흥시키고 가톨릭 신앙을 다시 굳건히 하기 위하여 많은 수도회가 등장했다. 살레시오 수도회·예수회·예수 고난회·성 바오로 수도회·예수의 작은 형제회 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도회가 이 시기에 나타났다.
1988년 현재 한국에는 30여 개의 남자 수도회와 60여 개의 수녀회가 있다. 그러나 외국에서 들어온 수도회는 물론 방인 수도회라 하더라도 대체로 서구적 수도생활의 모방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수도회의 한국적 토착화의 문제는 여전히 중요한 하나의 과제로 남아 있다.
여자에 비하여 남자의 수도생활은 부진한 편으로 1997년 현재 수녀는 7,574명인 데 비하여 수사는 1,095명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대다수의 수녀들이 일선의 모든 사목활동을 맡고 있다는 점이 한국 수도회의 특성 중 하나이다.
수도회를 성격상 분류하면 봉쇄 수도회라고도 불려지는 관상 수도회, 사회적 복음전파를 목적으로 하는 활동 수도회, 전통적 수도생활 방식과는 달리 이 세상 속에서 활동하는 재속회로 나눈다. 우리나라의 대부분 남·녀수도회는 활동 수도회에 속한다.
역사상 수도회는 변화하는 시대상황 속에서 부닥치는 교회의 여러 문제를 복음적으로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는데, 역사적으로 굴곡이 많았던 한국사회 속에서의 수도회도 결국 마찬가지의 양상을 보여왔다고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