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4년(단종 2) 사마시에 급제하고 돈녕부승(敦寧府丞), 정랑 등을 거쳐 1466년(세조 12) 1월 당상관에 승진하면서 병조참지에 발탁되었다. 같은 해 3월 알성시에서 장원으로 급제한 뒤 병조참판에 승진, 그 해에 다시 발영시(拔英試)에 3등으로 급제하고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을 겸임하였다.
1467년 이조참판 겸 예문관제학, 공조참판, 1468년 다시 병조참판이 되었다. 1468년(예종 즉위년) 남이(南怡)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에, 1471년(성종 2) 성종등위에 끼친 공으로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에 각각 녹훈되었다.
1472년 자헌대부(資憲大夫) 거창군(居昌君)이 되고, 1476년 4월∼8월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79년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1481년 행동지돈녕부사(行同知敦寧府事)를 거쳐 공조판서에 이르렀으며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를 겸임하였다.
1484년 세자빈객(世子賓客)을 겸대, 1486년 병조판서 겸 특진관(兵曹判書兼特進官)이 되었다. 1487년 딸이 세자인 연산군의 빈(嬪)으로 뽑히자 그를 계기로 좌참찬, 1488년 한성부판윤, 1489년 예조판서, 1491년 사소대장(四所大將)을 겸대, 이어 이조판서가 되었다가 1492년 병으로 사직하였다.
1494년 우의정, 1495(연산군 1) 좌의정 · 영의정, 1497년 3월 거창부원군(居昌府院君)에 봉해졌다. 1495년 4월∼1499년 2월에 걸쳐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로서 『성종실록』의 편찬을 주관하였다. 세종의 4남인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의 딸과의 사이에서 신수근(愼守勤) · 신수겸(愼守謙) · 신수영(愼守英)을 두었다.
시호는 장성(章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