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구릉지대로 온산공업단지의 중앙부 서쪽에 해당하는 곳이다. 원래 고분은 석당마을의 뒤쪽에 있는 낮은 구릉을 중심으로 하여 마을 양주변까지 수백 기가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업단지 조성으로 마을 뒤쪽의 중심부 고분은 완전히 소멸되었고, 현재는 마을 서북쪽과 동쪽의 주변지역에만 약간의 고분이 남아 있다.
이 중 마을 동쪽 구릉 위에 있는 고분 일부를 부산대학교박물관에서 1982년 10∼12월 사이에 발굴하였다. 이미 오래 전부터 심하게 도굴되어 유구(遺構)는 크게 파괴되었고 유물도 아주 빈약하였다.
모두 49기의 유구를 조사하였다. 수혈식장방형석곽묘(竪穴式長方形石槨墓) 7기, 횡구식장방형석곽묘(橫口式長方形石槨墓) 11기, 횡구식방형석실묘(橫口式方形石室墓) 9기, 횡혈식방형석실묘(橫穴式方形石室墓) 2기, 목관묘(木棺墓, 土壙墓) 7기, 화장묘(火葬墓) 11기, 작은 석곽 2기 등으로 묘제가 다양하였다.
석곽 및 석실묘는 파손이 심해 전반적인 구조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모두 얕게 판 묘광(墓壙) 속에 석곽 및 석실을 축조하였으므로 측벽의 대부분이 지상에 노출된 지상식이다. 모든 유구의 최하단 측벽은 판석같은 것으로 세워서 쌓고 2단부터는 가로 또는 세로로 나란히 쌓았다.
수혈식장방형석곽묘는 길이 100㎝ 미만∼230㎝, 너비 35∼70㎝ 정도로 대체로 작은 석곽이 많은 편이다. 횡구식장방형석곽묘는 길이 120∼250㎝, 너비 60∼100㎝로 수혈식석곽묘에 비해 너비가 약간 넓은 편이다. 횡구식방형석실묘는 길이 270∼280㎝, 너비 140∼250㎝로 너비가 많이 넓어져 방형에 가깝다. 횡혈식석실묘는 길이와 너비가 거의 같은 방형이다.
횡구식석곽묘 및 석실묘는 한 쪽의 짧은 벽 전체나 그 일부를 입구로 사용하였고, 횡혈식석실묘는 남쪽 벽 한쪽에 치우쳐서 연도(羨道)가 마련되어 있다. 모든 석곽 및 석실의 바닥에는 돌 또는 흙을 깔아 시상(屍床)을 만들고 있다.
횡구식장방형석곽은 시상이 1, 2개, 횡구식방형석실 및 횡혈식방형석실은 2∼4개의 시상이 각각 있다. 횡구식석곽 및 석실과 횡혈식석실묘는 적어도 몇 번에 걸쳐 추장(追葬)이 실시된 가족묘였음을 알 수 있다.
토광묘는 네 모가 죽은 작은 장방형 묘광을 파고 그 안에 목관을 설치한 것이다. 규모는 190∼250㎝, 너비 50∼120㎝로 앞시대의 것에 비해 너비가 좁은 것들이므로 목곽 아닌 목관만을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바닥은 돌을 깐 것과 깔지 않은 것의 두 종류가 있다. 수혈식장방형석곽묘와 함께 단장묘로 추정된다.
화장묘는 작은 석곽이나 수혈 안에 연질 혹은 경질의 단경호(短頸壺) 하나를 바로 세워놓고, 토기 위에는 작은 돌을 뚜껑처럼 덮은 것이다.
출토유물은 작은 파편까지 포함해도 모두 100여 점뿐이었다. 토기류는 대부장경호(臺附長頸壺)·병형토기(甁形土器)·고배(高杯)·유개발(有蓋鉢)·완(盌)·연질옹(軟質甕)·단경호 등이다. 철기류는 철도자(鐵刀子)·철모(鐵鉾)·철겸(鐵鎌)·철촉(鐵鏃) 등이다.
토기류는 대개 늦은 형식의 것들이다. 특히, 이 중에는 병모양의 토기를 포함해 인화문(印花文)이 시문된 대족부장경호(臺足附長頸壺)·유개발 등이 다량 포함되어 있다.
이 고분군은 구조와 공반유물로 보아 크게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단계는 수혈식장방형석곽묘와 토광묘가, 2·3단계는 횡구식석곽 및 석실묘·횡혈식석실묘·화장묘가 각각 포함된다. 이 중 3단계는 인화문계 토기가 출토되는 유구로 볼 수 있었다.
이 고분의 연대는 대개 6세기 후반∼7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이 시기부터는 신라·가야지역의 묘제가 뚜렷하게 구별되지 않고 수혈계횡구식석실묘 및 횡혈식석실묘로 통일되어 크게 유행하게 되며, 유물도 신라·가야 토기의 구별 없이 통일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