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이긍한(李肯漢), 등생은 일본군 보병 중좌를 지낸 이병규(李秉規)이다.
1886년(고종 23) 무과에 급제하였고, 1894년 친군장위영좌대우참령관·친군장위영우대부령관으로 임명되어 보빙사(報聘使) 의화군(義和君) 이강(李堈)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간 뒤 일본 육군교도단에 입학하였다가 1895년에 졸업하였다.
1895년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여 1896년 졸업하였고, 귀국 후 육군보병 정위로 임관되어 육군무관학교 교관으로 발령 받았다. 1897년 육군보병참령, 1898년 무관학교 교두, 1899년 북청지방대 대대장 등을 지냈다. 1900년 북청진위대 대대장, 진위 제5연대 2대대 대대장이 되었다가 일본에 있던 망명자에게 국내 사정을 알려준 혐의로 해임되었다.
러일전쟁 직후인 1904년 6월 육군보병참령으로 복관된 뒤 육군무관학교 교관, 군제의정관, 육군보병 부령으로 진급해 육군무관학교장으로 부임하였고 육군유년학교장을 겸임하였다. 1905년 육군보병 정령·군부교육국장·육군참장으로 발령받았다. 1906년 보빙사 완순군(完順君) 이재완(李載完)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왔으며, 진위 각대 검열사로 임명되었다. 이 해 1월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훈3등 팔괘장, 3월 일본 정부로부터 훈2등 서보장을 받았다.
1907년 육군부장·군부대신·군법회의 판사장으로 임명되었고, 시종무관장 임시서리를 겸임하였다. 대한제국 군대 해산을 주도하였고, 이에 저항한 군인 및 의병을 진압하도록 명령하였다. 같은 해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훈2등 태극장(太極章)과 훈1등 태극장을 받았다.
1908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후원하는 친일 유교단체 대동학회에 참여하였고, 도쿄(東京)에 있는 황태자 이은(李垠)의 생일 문안차 일본에 파견되어 일본 육군 특별연습을 배관하였다.
1911년 1월 5만원의 은사공채를 받았으며,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15년 일제가 식민통치의 성과를 선전하는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에 기부금을 내고 특별회원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일본 천황 다이쇼 즉위대례식에 조선 귀족 총대로 처와 함께 참석하여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17년 불교옹호회 고문을 맡았고, 1922년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 평의원을 맡았다.
1926년 12월 6일 사망하자 양자 이홍묵(李鴻黙)이 작위를 물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