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은 일제강점기 오케이회사 사장, 조선악극단 사장 등을 역임한 경영인으로 연예사업가·대중공연기획자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933년 현송자의 도움으로 일본 데이지꾸레코드사와 기술제휴를 맺고 오케이(OK)축음기상회 경성임시영업소 소장(지점장)을 차렸다. 명칭을 바로 오케이레코드사로 바꾸었다. 음반기획과 발매를 도맡아 조선인 작곡가와 작사가를 발굴하고 고복수, 이난영을 스카우트하는 등 사업수완을 보였다. 1941년 전후해서 조선악극단, 오케이회사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43년 신생극단 등을 조직해 영향력 있는 연예사업가가 되었다.
본명은 이억길(李億吉)이며, 1938년 이철(李哲)로 개명하였다. 창씨개명한 이름은 청산철(아오야마 데쓰, 靑山哲)이다.
1903년 6월 9일 충청남도 공주에서 태어났다. 공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극장 악사(樂士)로 일하였다고 전해진다. 1927년부터 음악서적 출판사인 백장미사(白薔薇社)를 운영하면서 1928년 4월 배귀자(裵龜子)음악무용회, 10월 전조선현상가무(全朝鮮顯賞歌舞)대회를 주최하였다. 같은 해 연희전문학교 상과에 입학해서 1929년 연희전문학교 밴드부 설립을 주도하였는데 밴드부 지도는 현제명이 맡았고 섹소폰을 배웠다. 1927년 무렵부터 서울 안동(단둥)교회를 다녔는데 1928년 선교모임에서 만난 현송자(玄松子)와 가까워지면서 1930년 파문이 일자 교회와 학교를 그만두고 부부로 살았다.
1933년 현송자의 도움으로 일본 데이지꾸(帝蓄)레코드사와 기술제휴를 맺고 오케이(OK)축음기상회 경성임시영업소 소장(지점장)을 차렸다. 명칭을 곧바로 오케이레코드사로 바꾸었다. 음반은 일본에 가서 취입해야 하였지만, 음반기획과 발매를 도맡아 조선인 작곡가와 작사가를 발굴하고 고복수(高福壽)와 이난영(李蘭影)을 스카우트하는 등 사업수완을 보였다. 조선악극단 전속가수로 고복수 · 이난영 · 장세정(張世貞) · 남인수(南仁樹) · 김정구(金貞九) · 송달협(宋達協) · 이인권(李寅權) · 최병호(崔炳浩) · 손석봉(孫夕峰) · 백년설(白年雪) 등이 있고, 가요작곡가 손목인(孫牧人) · 김해송(金海松) · 박시춘(朴是春) · 이봉룡(李鳳龍) , 작사가 조영출(趙靈出) 등이 활동하였다. 이렇게 나온 노래가 「타향살이」, 「사막의 한」, 「짝사랑」, 「목포의 눈물」, 「봄맞이」, 「애수의 소야곡」 등이다.
이와 함께 오케이연주단을 조직해 공연기획을 하기 시작하였고, 1935년 한학수(韓學洙)가 출자해 건립한 한청빌딩 운영도 맡았다. 1936년 조선어교육 레코드를 발매하고, 오케이연주단의 일본 공연을 성사시켰으며, 서울에 녹음스튜디오를 설치하는 등 오케이레코드사를 성공적으로 경영하였다. 그러나 레코드 사업의 성공에도 불구하고 오케이연주단 때문에 적자가 누적되며 본사 역할을 하던 데이지꾸(帝蓄)레코드사와 관계에 변화가 생겨 1937년 오케이레코드사의 명칭을 제국축음기주식회사 경성영업소로 바꾸고, 자신은 오케이레코드사 운영자 자리에서 물러났다.
사임 후 오케이레코드사 운영에 어느 정도 관여하다가 1938년 1월 조선연예주식회사를 설립한 후 공연기획에 주력하였다. 오케이연주단을 확대하여 오케이그랜드쇼를 조직하였고 1939년 3월 일본 공연부터 조선악극단이라고 개명하였다. 당시 오사카(大阪) 공연에서 승무를 공연할 때 태극문양을 사용한 것이 드러나 책임자로 경찰조사를 받았다.
1940년 4월 매일신보사 북경(뻬이징) 지국 초청으로 “반도애국호(半島愛國號)” 자금모집 공연과 “북지황군(北支皇軍)” 위문공연차 조선악극단원을 데리고 베이징 · 제남(지난) · 서주(수저우) 등지를 순회하는 공연을 총기획하고 연출하였다. 이를 계기로 중국 공연을 하면서 조선악극단은 조선 · 일본 · 만주 · 중국을 넘나드는 대형 공연단체로 성장하였다. 1940년 9월 조선악극단과 별개로 대중예술 교육기관인 오케음악무용연구소를 설립하였다. 이 연구소는 3년제로 일본에서 활약하던 무용가 정지수(鄭志樹)를 초청하고, 김민자(金敏子) · 김형래(金炯來) 등 사범학교 교사들을 초빙하여 노래와 춤 · 연기 등 연예인을 양성하였는데 대표적으로 배출된 연예인으로 김백희(金白姬) · 백설희(白雪姬) · 주리(朱莉) 등이 있다.
1941년 전후해서 조선악극단, 오케이회사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1941년 1월 26일 조선총독부의 통제를 받는 조선연예협회 결성식에서 회장으로 추대되었고, 같은 달 29일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에서 홍난파 · 박경호 등과 함께 문화위원으로 위촉되었다. 2월 매일신보사 주최로 근로봉사문화인부대를 조직할 때 조선연예협회 대표자로 2월 8일부터 9일까지 부여신궁 조영공사(造營工事)에 참석하였고, 3월 경성 금천대(金千代)회관에서 열린 ‘8개 단체 간부는 말함-새로운 문화단체의 활동’ 좌담회에서 국어(일본어) 보급을 위해 국어극(일본극)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5월 12일부터 16일까지 경성부민관에서 상연한 ‘내선일체’를 주제로 하는 무용극 「부여회상곡」을 총기획하였다. 이 무용극은 국민총력조선연맹이 주최하고 조선총독부가 후원한 것으로 당시 조선총독이었던 미나미 지로(南次郎)가 직접 휘호를 쓰고, 2만 2800원이라는 큰 돈이 지출된 거대 공연으로 일제의 전폭적 지지를 받은 공연이었다. 공연 수익금 전액은 부여신궁 조성기금으로 쓰였다. 5월을 전후해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으로 예술부문 연락계를 맡았고, 6월 16일 조선악극단 황군위문을 회고하는 좌담회에 참석하였다.
1941년 9월 18일에는 만주사변 10주년 기념으로 ‘임전봉사대’ 복장을 하고 연예협회 회장으로 영화(대표 이서구), 연극(대표 안종화) 등 2개 협회장 및 회원 100여명과 조선신궁을 참배하고 본정(本町) · 종로 등지에서 ‘두채권(豆債券)’을 판매하였으며, 같은 달인 9월 조선임전보국단을 조직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10월 매일신보사가 주최하고 조선연예협회와 조선악극단이 후원해 조직한 재선부대연예위문단의 공연기획을 하고 전국에 있는 군부대와 육군병원을 방문해 위문공연하였다. 1942년 8월 조선연예협회가 조선연극문화협회로 통합되면서 이동극단 제2대 대표로 올라 농 · 산 · 어촌 및 광산지대를 순회하면서 일본군 사기진작과 전력증강에 기여하는 공연활동을 지휘하였다.
1943년 또 하나의 공연단체인 신생극단 등을 조직해 조선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연예사업가가 되었다. 가수 남인수 · 장세정, 그리고 코미디언 이방(李坊) 등을 주요 단원으로 만주 · 뻬이징 · 상해(상하이) 등지에서 성공적으로 공연하였다. 7월 경성부민관에서 열린 조선악극단의 공연에서 명랑극 「가미가제(神風)」를 총지휘하였고, 9월에는 경성 동양극장에서 군국시(軍國詩) 작품인 「장군병에 눈물있어」를 지휘하고 이외에도 「아편의 항구」 등의 다수의 공연을 총지휘하는 등 악극단 공연의 전성기를 구가하였다. 1944년 급작스럽게 패혈증이 발병하여 6월 25일 사망하였다. 1944년 3월 일제 조선군 보도부가 1943년도 ‘국어극’ 보급운동에 큰 공적을 세운 악극단에게 주는 보도부장상을 받았다. 같은 해 9월 2일부터 6일까지 동양극장에서 조선악극단이 ‘조선연예주식회사 사장 고(故) 청산철(아오야마) 씨 추도공연’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