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거재판주의는 재판에서 사실의 인정은 반드시 증거에 의한다는 원칙이다. 형사소송에서 증거재판주의는 증거능력의 문제만이 아니라 증명력에 관한 자유심증주의를 핵심 내용으로 한다. 전근대적인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법정증거주의와 대척 관계에 있는 증거법의 원칙으로 자유심증주의가 자리 잡게 됨으로써 증거재판주의의 실질적 내용적 측면에 크나큰 변화가 생겼다. 형식적으로 아무리 증거능력이 있는 증거라도 법관의 내적 확신, 즉 심증을 형성하지 못하면, 그 증거를 근거로 하여 사실인정 및 유죄 인정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증명은 법관에게 사실의 인정 여부에 관한 심증을 얻게 하는 작용 또는 법관이 일정한 사실이 인정된다는 내적 확신을 가지게 된 상태를 말한다. 증명은 증명사실의 중요성 또는 심증 형성의 정도를 달리하는 ‘소명’과 구별된다. 증명은 범죄 사실에 대한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의 심증 형성을 요하는 반면, 소명은 기피 신청 사유 또는 증언거부 사유 등과 같은 범죄 사실 이외의 사실에 대한 일응의 추측, 즉 사실의 존부에 대하여 긍정적 가능성이 크고 부정적 가능성은 무시하여도 잘못이 없다는 정도의 심증 형성을 말한다.
증명은 그 방법과 절차에 따라 엄격한 증명과 자유로운 증명으로 크게 나뉜다. 엄격한 증명은 증거능력이 있는 증거이면서도 ‘적법한 형식과 절차에 따른 증거조사를 거친 증거’에 의한 증명을 말하고, 자유로운 증명은 증거능력이 없는 증거나 적법한 증거조사를 거치지 아니하는 증거에 의한 증명 방식을 말한다. 증명 대상의 관점에서 이 두 가지 증명 방식의 구별에 관해 지배적인 학설은 양형 참작 사실이나 소송법적 사실을 제외하고 적어도 범죄 사실의 존부 및 형벌권의 양적 범위를 결정하기 위한 필요 사실에 대해서는 모두 엄격한 증명을 요한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 공판절차에서 양자의 경계선이 흔들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예컨대 판례는 심신장애의 여부는 기록에 나타난 제반 자료와 피고인의 공판정에서의 진술 및 태도 등을 종합하여 판단하여도 무방하므로 자유로운 증명으로 족하다고 한다[대법원 1983.6.28. 83도1254]. 몰수나 추징 대상이 되는지의 여부나 추징액의 인정 등도 형벌권의 양적 범위를 결정하기 위한 필요 사실이지만, 판례는 범죄구성요건 사실에 관한 것이 아니어서 엄격한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한다[대법원 2006.4.7. 2005도9858].
범의[고의]는 범죄 사실의 존부에 관한 주관적 사실이지만, 판례는 오랫동안 엄격한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취해 오고 있다[대법원 1969.3.25. 69도99]. 임의성 있는 자백인지의 여부도 범죄 사실의 증명과 직결되는 문제이지만, 대법원은 자유로운 심증으로 판단하면 족하다고 한다[대법원 2003. 5.30. 2003도705]. 양자의 증명 방법은 증거능력의 유무와 증거조사 방법상의 차이만 있을 뿐, 법관의 심증 형성의 정도에는 차이가 없다. 양자 모두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의 증명을 요한다.
엄격한 증명을 위해 요구되는 요건인 증거의 ‘증거능력’이란 어떤 증거가 유죄 인정의 자료로 사용될 수 있는 법률상의 자격을 말한다. 증거능력은 요증사실을 증명하는 증거의 힘, 즉 증거의 실질적 가치인 증명력과 구별된다. 증거능력이 인정되는 자격은 법률에 형식적으로 규정되어 있고, 어떤 증거가 증명력이 인정되는지는 법률상의 제한 없이 법관의 자유로운 판단에 맡겨져 있다. 이를 자유심증주의라고 한다. 형사소송법학에서 일부 견해는 증거재판주의를 증거능력의 문제로만 국한하고, 증명력의 문제에 관한 자유심증주의는 증거재판주의와 무관한 것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그러나 형사소송 제도의 발전 역사는 근대 이후 증거재판주의의 핵심 내용을 구성하는 것이 자유심증주의임을 말해준다.
근대 이전 형사소송을 지배했던 증거법의 원칙은 법정증거주의였다. 당시 법정증거주의는 사실인정에서 법관의 자의를 배제하려는 취지에서 유죄의 증거로 삼을 수 있는 증거가 형식적 법 규정에 명시적으로 열거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법정증거주의하에서는 또한 증거의 가치 평가를 추상적인 법규에 일임하여 법관의 심증 형성이야 어떻든 간에 일정한 법정 증거의 존부에 따라 유무죄를 결정되었다. 예컨대 1532년 카롤리나 법전에 의하면 유죄 선고를 위해서는 범인의 자백 또는 적어도 2인 이상의 신용할 수 있는 증인의 증언을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자백을 유죄의 증거로 삼을 수 있는 증거목록 속에 포함하고 있었던 법정증거주의는 자백을 ‘증거의 여왕’으로 불릴 만큼 자백 존중의 실무 관행을 만들어냈다.
중세의 이단심문 또는 마녀재판이 잔학한 고문으로 점철되었던 것도 자백을 얻어내기 위한 고문이 법적으로 허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백 편중의 실무 관행을 만든 고문은 17세기 계몽주의 사상가들의 비판 대상이 되었다. 동시에 계몽운동은 프랑스혁명에 사상적 기반을 제공하여 구제도[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를 붕괴시켰다. 이에 따라 근대 시민국가는 규문주의적 형사절차를 버리고 탄핵적 형사절차를 채용하면서 구두변론주의, 직접주의, 공개주의, 판결이유 명시 제도 및 상소 제도, 배심제도 등과 함께 자유심증주의를 탄생시켰다.
법정증거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해 그와 대척 관계에 있는 증거법의 원칙으로 자유심증주의가 자리 잡게 됨으로써 증거재판주의의 실질적 내용적 측면에 크나큰 변화가 생겼다. 형식적으로 아무리 증거능력이 있는 증거라도 법관의 내적 확신, 즉 심증을 형성하지 못하면, 그 증거에 기하여 사실인정 및 유죄 인정을 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헌법재판소도 법정증거주의를 극복한 발전된 형태의 증거법의 핵심 내용은 오히려 자유심증주의에 있음을 다음과 같이 압축적으로 판시하고 있다. “자유심증주의를 통하여 합리적인 사실인정을 담보할 수 있도록 증거능력의 제한, 증거조사 과정의 합리화를 위한 당사자의 참여, 유죄판결의 증거 설시 등 여러 가지 제도적 보완 장치가 마련되어 있다. 따라서 자유심증주의는 법정증거주의의 불합리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수립된 형사 증거법의 기본 원리로서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기에 적합한 제도라고 할 것"이다[헌법재판소 2009.11.26. 2008헌바25].
증거의 증거능력 요건은 ‘법정’되어 있어 자유 심증의 대상이 될 수 없지만, 그 적법 요건을 갖추었는지에 대한 판단은 법관의 자유 심증에 의한다는 점도 결국 증거재판주의의 중핵이 자유심증주의임을 말해준다.
증거재판주의를 천명한 「형사소송법」 제307조 제1항에 뒤이어 제2항에서 범죄 사실의 인정을 위해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라는 높은 수준의 증명을 요구하고 있는 제2항의 존재 의의도 증거재판주의와 자유심증주의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음을 말해준다. 이와 같은 고도의 증명 정도는 “증거의 증명력은 법관의 자유 판단에 의한다”라는 자유심증주의에 관한 규정 속의 ‘법관의 자유 판단’ 내지 심증 형성에 내재적 한계로 작동하는 의미 차원을 동시에 가지기 때문이다.
증거법의 역사적 발전 및 「형사소송법」 규정 체계에 따르면 증거재판주의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차원의 증거법 원칙을 축으로 삼아 작동되는 상위의 원칙이다. 하나의 축은 ‘증거능력’에 관한 법칙들로 이루어져 있고, 다른 하나의 축은 증거의 ‘증명력’에 관한 법칙들로 이루어져 있다.
증거능력에 관한 법칙은 증거능력을 제한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법칙이다. 이러한 증거법의 법칙에는 주1, 주2, 주3 등이 있다. 이러한 법칙에 따라 증거능력이 부정되는 증거는 증명력이 있어도 유죄의 증거로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이 가운데 위법수집배제법칙과 자백배제법칙은 증거능력을 절대적으로 제한하는 법칙이고, 전문법칙은 당사자의 동의가 있으면 전문증거라도 증거로 사용할 수 있으므로 증거능력을 상대적으로만 제한하는 법칙으로 분류될 수 있다.
한국의 형사재판은 오랫동안 ‘조서 재판’으로 불릴 정도로 증거재판주의의 최적 실현을 위한 전제 조건인 직접주의 및 공판중심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2000년 초반부터 진행된 공판중심주의의 현실화 및 자백 편중 수사 관행 타파를 위한 사법개혁의 일환으로 마련된 2007년 개정 「형사소송법」에서도 수사 단계에서 검사에 의해 작성된 피의자신문조서의 내용을 피고인이 법정에서 그 진정성립을 부정하는 경우 검사가 객관적 방법으로 그 진정성립을 증명할 수 있는 여지가 여전히 인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2020년에는 이러한 대체 증명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규정[구법 제312조 제2항]마저도 삭제함으로써 수사 단계에서 작성된 조서가 가지는 증거능력을 인정하기 어렵게 만들어 증거재판주의를 실질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입법적 개선을 이루어냈다. 실무에서 증거재판주의는 법원이 피고인이나 변호인이 무죄에 관한 자료로 제출한 증거에 유죄임을 뒷받침하는 내용이 있는 경우에도 상대방의 동의가 없는 한 그것을 함부로 유죄의 증거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있다. 즉 판례는 법원이 그러한 증거라도 적합한 증거능력 요건을 조사함과 아울러, 피고인이나 변호인에게 의견과 변명의 기회를 준 이후에만 유죄의 증거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대법원 1989.10.10. 87도9660].
「형사소송법」은 증거의 증명력에 관해서도 법관의 자유 판단[자유심증주의]에 한계를 설정함으로써 증거재판주의의 내실을 다지고 있는 다른 중요한 법칙을 규정하고 있다. 공판조서의 증명력에 관한 주4과 자백의 주5이 그것이다. 특히 자백의 보강법칙은 근대 이전의 법정증거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차원에서 헌법적 요청이기도 하다. 다른 한편 형사소송에서와는 달리 민사소송에서는 자백 사실을 보강할 다른 증거를 요하지 않는다. 당사자의 자백에 대해 다툼이 없을 때는 증거를 요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민사소송법」 제261조].
이뿐만 아니라 ‘증명의 정도’에 관한 「형사소송법」 규정[제307조 제2항]도 법관에게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내적 확신을 줄 정도이어야 증명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증명력에 대한 내재적 한계로 작동될 수 있음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다. 물론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가 어느 정도인지도 그 정도가 객관적으로나 양적으로 확정되어 있지는 않다. 반대 증거보다 우월한 정도의 증명력으로 충분하다고 하는 민사소송에서와는 달리 형사소송에서는 ’우월한 증거 원칙‘에 따르지 않는 것만은 분명하다[대법원 1982.5.10. 82도2279 등]. 학계와 실무에서는 논리법칙과 경험법칙이 법관의 주관적 심증 형성에 제한을 가할 수 있는 객관적 통제장치라고는 하지만, 실제 형사재판에서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음이라는 정도는 구체적 사례의 중함에 따라 가변적이고, 특히 간접증거[정황증거]가 어느 정도로 증명의 기초에 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확립된 원칙도 없다.
「형사소송법」은 공판절차를 관통하는 대원칙인 증거재판주의를 완화하는 특수한 절차도 인정하고 있고, 공판절차에서조차도 증거재판주의의 실현을 어렵게 하는 장애물도 없지 않다.
증거재판주의는 피고인이 공판정에서 공소사실을 자백한 경우 일정한 요건을 전제로 증거능력 제한을 완화하고 증거조사 절차를 간소화하여 심리를 신속하게 진행할 수 있도록 하는 간이공판절차[제286조의 2]에서 현저하게 약화한다. 간이공판절차에서는 전문증거라도 피고인의 동의가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 전문법칙이 적용되지 않고, 증거조사도 ‘상당하다고 인정되는 방법으로’ 가능하여 일정한 조사 방식[낭독, 요지 고지, 제시]을 거치지 않아도 무방하며, 증인신문 방법인 상호[교호] 신문 방식에 따르지 않아도 되며, 피고인의 퇴정에 관한 규정들도 적용되지 아니한다. 이밖에 서면심리만으로 피고인에게 재산형[벌금, 과료, 몰수]을 부과하는 약식절차[「형사소송법」 제448조 제1항]에서도 공판절차를 전제로 하는 전문법칙은 일절 적용되지 않는다.
또한 범증이 명백하고 죄질이 경미한 범죄 사건에 대하여 경찰서장의 청구에 의해 간단하고 신속한 절차에 의하여 20만 원 이하의 벌금, 구류, 과료의 형을 선고하는 즉결심판절차[「즉결심판에 관한 절차법」]에서도 증거재판주의는 엄격하게 요구되지 않는다. 즉결심판절차에서는 증거능력에 관한 전문법칙의 일부[제312조 제3항 및 제313조]가 적용되지 않고, 증거조사도 법정에 현존하는 증거에 한하여 이루어지며, 증거조사의 방법도 완화되어 ‘적당한’ 방법으로만 조사하는 것이 허용되고, 증명력에 관한 자백보강법칙도 배제되어 심지어 경찰 자백이 유일한 증거인 경우 경찰 자백만으로도 유죄를 인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형사 공판절차에서도 증거재판주의가 실현되는 데 현실적 장애물과 제도적 걸림돌이 존재한다. 「형사소송법」은 당사자의 증거신청권[「형사소송법」 제294조]을 인정하고 있으나, 그 증거신청의 인용과 기각 결정의 기준이 없다. 증거신청권은 방어권 보장을 통해 공정한 재판 실현을 위한 법적 장치이지만, 법원의 기각결정에 대해 불복 방법도 구제 수단도 없다. 증거조사 절차에서 발생하는 위법 부당을 다투는 방법은 그로 말미암아 사실을 오인하여 판결에 영향을 미쳤음을 이유로 판결 자체에 대한 상소 외에 다른 실질적인 구제 수단이 없고, 다만 증거조사에 관한 이의신청[「형사소송법」 제296조]을 제기할 수 있을 뿐이다. 「민사소송법」에도 당사자가 주장하는 사실에 대한 유일한 증거에 대한 신청이 아닌 한, 법원이 당사자가 신청한 증거가 필요하지 아니하다고 인정한 때에는 조사하지 아니할 수 있다는 규정뿐이다[「민사소송법」 제290조].
증거신청의 채택 여부가 법관의 재량 사항으로 되어 있는 제도하에서는 법관이 해당 사건이나 피고인에게 편견과 선입견을 가지고 있을 경우 증거신청이 다양한 이유에서 각하될 가능성이 높다면 증거재판주의의 충분한 실현이 어렵다. 이 때문에 증거신청의 인용과 각하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사유]을 명문화하여 객관화될 필요가 있다.
증거의 증명력을 법관의 자유 판단에 맡기고 있는 증거재판주의는 증거 채택에서 법관의 자의를 통제해야 할 과제가 있다. 자유심증주의는 유죄의 증거목록을 법정화해 두는 대신 임의의 증거 중에 법적으로 증거로 될 수 있는 자격[증거능력]이 인정되는 증거들을 대상으로 삼아 그 신빙성[증명력]을 법관의 자유로운 심증 형성에 맡겨두고 있기 때문에 어떤 증거를 유죄의 증거로 사용할 것인지는 사실상 법관의 자유재량에 맡겨져 있기 때문이다. 법관이 증거가치를 평가할 경우 경험법칙과 논리법칙에 따라야 할 것이 요구되므로 이 두 가지 법칙이 자유심증주의를 통제할 수 있다고 하지만 한계가 있다. 통상 형사재판에서 통계학적 확률 지식에 기초하여 도출된 경험법칙에 기반하지 않고 법관의 직관 판단에 의해 심증이 형성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뿐만 아니라 현재의 형사재판 실무에서는 유죄판결에 명시될 사항 중의 하나로서 ‘증거의 요지’는 어떤 증거자료에 의하여 법원이 범죄 사실을 인정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기재하면 족하다고 한다[대법원 1981.4.28. 81도459 등]. 그러나 증거재판주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증거의 요지가 언급되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증거와 범죄 사실 사이의 구체적인 증명 과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수준까지는 되어야 한다. 어떤 증거자료는 배척되고 어떤 증거자료를 채택하였는지에 대한 증거의 이유까지 명시될 것이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