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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과 같은 공기관이 이해대립하는 소송 당사자의 관여하에 공권적 판단에 의한 구체적인 법률상태의 확정 및 사실상태의 강제적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법률적 절차.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소송은 법원과 같은 공기관이 이해대립하는 소송 당사자의 관여 하에 공권적 판단에 의한 구체적인 법률상태의 확정 및 사실상태의 강제적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법률적 절차이다. 민사소송·형사소송·행정소송 등 국내법상의 소송이 있으며 국제사법재판과 같은 국제법상의 소송도 포함된다. 소송은 하나의 절차로 보며 절차의 안정을 보장하기 위해 각기 소송법이 있다. 한국 소송의 역사는 고대부족국가 시대에까지 소급할 수 있으나 삼국시대까지는 그 내용이나 절차에 관해 명확히 알 수 없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서 비로소 오늘날의 소송제도의 기틀이 잡히기 시작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식민지 지배적 성격이 강했다.

목차
정의
법원과 같은 공기관이 이해대립하는 소송 당사자의 관여하에 공권적 판단에 의한 구체적인 법률상태의 확정 및 사실상태의 강제적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법률적 절차.
내용

민사소송 · 형사소송 · 행정소송 등 국내법상의 소송이 있으며 넓게는 국제사법재판과 같은 국제법상의 것도 포함된다. 소송은 하나의 절차로 보며 절차의 안정을 보장하기 위해 각기 소송법이 있다.

원래 국가는 사인(私人)간의 경제적 및 친족적 생활관계를 규제하기 위하여 사법(私法)인 민법 · 상법 등의 법규를 재정하나 이들 법규는 추상적이어서 그것이 현실적으로 존재적 기능을 다하기 위해서는 그 적용의 결과로서의 권리의무관계가 분쟁당사자간에 명확하여야 하고 의무의 준수가 확보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사인으로 하여금 자기 권익을 실력으로 주장, 방어하는 상태(자력구제)를 방치한다면 사법의 실효성은 매우 박약하게 되고 오히려 사회혼란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국가는 민사소송제도를 설치, 운용하고 있다.

민사소송에서는 사인이 필요에 따라 법원에 대하여 자기의 법률적 주장의 당부에 관해서 판결을 요구한 경우에 재판권이 발동되며, 법원은 사법법규를 적용해서 사법상의 권리의무에 관한 공권적 판단을 하고 사법상의 의무의 강제적 실현을 도모한다. 그러므로 민사소송절차는 원고가 소송을 제기하면 법원이 원고와 피고를 출석시켜서 그들의 변론에 기해서 재판하게 된다.

형사소송은 형사재판의 절차이며 형사사건에 관해서 형벌청구권의 유무 · 범위를 확정함을 목적으로 하며, 탄핵주의(彈劾主義)와 규문주의(糾問主義)를 개인적 이익 및 국가적 이익과 조화시킨 절차에 의하며 국가기관인 검사의 공소에 의하여 소송이 개시된다.

행정소송은 행정법규의 정당한 적용을 확보하기 위한 절차이다. 위와 같은 소송형태는 근대의 산물이며 전근대시대에는 공법과 사법, 형사와 민사의 구별이 명확하지 않은 만큼 형사소송과 민사소송도 확연히 구별되지 않았으며, 즉 민사소송절차에 형사적 절차가 가미되어 있었다.

우리나라 소송의 역사는 문헌상으로 고대부족국가시대에까지 소급할 수 있으며, 삼국시대까지의 소송의 내용이나 절차에 관한 것은 명확히 알 수 없다. 다만 형사소송은 공권력의 형성과 함께 발달했고, 특히 중국의 율령제도(律令制度)의 영향을 받아 제도화되었다. 민사적인 것은 사유재산제도의 형성 · 발달과 함께 공권적 분쟁처리절차로서 형성, 발달했을 것이나 고려 중엽까지의 소송은 이미 발달해 있던 형사소송의 테두리 속에서 행해졌다.

고려 중엽 이후부터는 토지를 비롯한 노비의 사유화가 촉진됨에 따라 그에 관한 소송도 빈번하여 점차 고유한 민사소송으로서 발달하였고, 그러한 판례와 관행에 바탕을 둔 민사적 소송의 법규가 쌓이고 체계화되어 조선시대에는 형사적 소송과 민사적 소송이 확연히 구별되었으며 소박하기는 하나 근대적 민사소송과 같은 본질을 지니게 되었다.

즉, 고려 중엽 이후 소송은 형사적인 것을 옥송(獄訟) 또는 상언(詳讞), 민사적인 것을 사송(詞訟) 또는 소송(訴訟)으로 구별하였다. 사송은 문서로 고소하고 말로써 다투는 것을 뜻하며, 소송물에 따라 전토송(田土訟) · 전택송(田宅訟) · 노비송(奴婢訟) · 채송(債訟) · 산송(山訟) · 잡송(雜訟)이라 하였다.

(1) 사 송

① 관장기관:형사소송이나 민사소송은 별도로 법원이 설치된 것이 아니라 일반행정기관에서 관장하였다. 고려시대에는 중앙의 형조(刑曹, 처음에 의형대(義刑臺)라 했다가 형관(刑官) · 형부(刑部) · 전법사(典法司) · 형조 · 언부(讞部) · 이부(理部) 등으로 명칭이 바뀜)가 관장했고, 후기에는 특별소송기관으로서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 · 인물추고도감(人物推考都監) · 찰리변위도감(拶理辨違都監) · 화자거집전민추고도감(火者據執田民推考都監) 등이 임시로 설치된 일이 있고, 지방에서는 수령안렴사(按廉使) 등이 1심과 2심기관이었다.

조선시대에도 중앙에서는 형조, 지방에서는 수령과 관찰사, 서울의 한성부가 소송기관이었으며 노비송을 위하여 중앙에 장례원(掌隷院)이 있었고 사헌부도 예외적으로 상소심의 구실을 하였다.

② 당사자:원고는 원고인(原告人) · 원고(元告)라 하고 피고는 피론(被論) · 원척(元隻) · 척(隻)이라 하였다. 계급적 신분사회이면서도 차별없이 법률상 소송능력이 인정되었으며 상민이 사대부를 피고로 하여 소송할 수 있었다. 왕족이나 양반 · 토호는 자신이 직접 송정(訟廷)에 나아가는 것을 싫어하여 자서제질(子婿弟姪)이나 노로 하여금 소송하게 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타인을 고용하여 소송할 수 있었는데 이를 대송(代訟)이라 하였으며 양반부녀자는 법률상 자 · 서 · 제 · 질 · 노가 대송할 수 있었다. 또한 누구나 자유롭게 서로 소송할 수 있으나, 특히 4촌 이내의 근친간의 소송은 친목을 망각하고 미풍을 해치므로 근친존비간에 이유없이 소송을 제기하여 그 간사함이 드러난 경우에는 엄벌에 처하였다.

③ 소송의 개시:소송의 제기는 구술 또는 서면으로 하는데 소장(訴狀)을 소지(所志) 또는 소지단자(所志單子)라 하고 소지를 제출하는 사연을 발괄〔白活〕이라 하며 양반이 직접 자기 이름으로 제출하는 소장을 단순히 단자(單子)라고 하였다. 소지에는 주소 · 성명 · 청구취지 · 연월일을 기입하는 일정한 서식에 따랐다.

소송의 제기는 일정기한 내에 해야 하는데 이를 송한(訟限)이라 하며 일반적으로는 분쟁발생시부터 5년 내에 제기해야 하며 이 기한을 경과한 경우에는 누구도 다툴 수 없으며 송한 내에 소송을 제기하였더라도 다시 5년 내에 소송을 진행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외로 토지 · 가옥 · 노비의 경우에 도매(盜賣) 당한 경우, 소송이 계속중이며 확정판결이 없는 경우, 유산을 독점하고 있는 경우, 소작인이 농지를 지주에게 돌려주지 않고 점유한 경우, 가옥의 임차인이 집을 비우지 않고 계속 눌러사는 경우는 이를 일반사건과는 다른 중대사건으로 보아 송한의 제한없이 언제든지 소송을 제기할 수 있었다.

원고가 소지를 제출한 다음 피고가 출정하여 응소하는 소지를 제출함으로써 정식으로 소송이 개시되었는데 이를 시송(始訟)이라 하고 피고가 제출하는 답변서로서의 소지를 시송다짐〔始訟侤音〕이라고 하였다. 소송의 제기는 원고의 자유이지만 피고의 소환은 의무이며 피고가 3, 4차에 걸쳐 응소하지 않을 경우에 한하여 관령(官令)으로 강제로 소환하였다.

④ 변론과 증거:소송은 기본적으로 당사자진행주의였다. 피고가 시송다짐을 제출한 다음 원고와 피고는 각자 자기주장의 정당성을 다투기 위하여 제한없이 변론할 수 있다. 그리고 시송 후 원피고가 최초의 청구주장을 하는 문서를 제출하는데 이를 원정(原情)이라 하고, 당사자는 이후 원정에서 주장한 사실의 입증을 위하여 서증(書證)과 증인(證人)을 제한없이 자유롭게 제출, 채택할 것을 주장할 수 있으며, 송관(訟官)은 필요에 따라 소송을 지휘할 뿐이며 당사자의 변론권을 막을 수 없었다.

소송에서는 각종 권리문서가 증거로서 가장 중요시되었고 송관은 주로 문서에 따라서 재판하여야 한다는 뜻에서 종문권시행(從文券施行)이라는 법언(法諺)이 지침으로써 지켜졌다. 문서의 진정성은 송관의 검증에 따라 확인되어 채택되는데 소송의 세부규칙으로서 통용되었던 청송식(聽訟式)에는 16가지에 걸친 검증절차가 규정되어 있었다.

증언의 경우에는 증인으로 하여금 진실을 증언하며 위반한 경우에는 처벌을 감수하겠다는 다짐문서를 제출하게 하였다. 소송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형세가 불리한 자는 소송을 중단시키기 위해 출정하지 않으며 소송이 지연되어 끝날 날이 없으므로 이를 방지하기 위한 친착결절법(親着決折法)이 있었다.

즉, 소송이 개시된 뒤 50일의 기간을 기준으로 해서 을이 이유없이 30일이 지나도록 출정하지 않은 반면 갑이 계속해서 21일 출정하여 출정의 징표로서 성명과 수결(手決)을 한 경우에는 계속 출정한 갑에게 승소판결을 내리는 법이다. 또한 을이 변론에서 패하여 퇴장한 경우에 갑의 출정일수가 21일에 가까우면 설령 을이 하루 이틀 출정하였더라도 그 일수를 갑의 출정일수에서 제외하지 않았다.

소송의 진행중에 농사철을 당하면 소송을 정지하는 정송제도(停訟制度)가 있었다. 춘분부터 추분까지를 무정(務停)이라 하고 추분부터 춘분까지를 무개(務開)라고 하여 무정에는 잡송(雜訟)의 심리를 중지하여 당사자로 하여금 농사일에 전념하게 하고 농한기인 무개에 소송을 속개하였으며 무정기간에는 잡송의 소송제기도 금하였다.

또 판결이 임박하였는데 형세가 불리하므로 정송을 신청한 경우에는 들어주지 않았다. 특히 오늘날의 변호사 제도와 같은 직업적인 대송인(代訟人)인 외지부(外知部)의 관행이 공인되어 있었는데 이들이 소송을 지연시키므로 1478년(성종 9) 8월부터는 엄금하게 되어 그 뒤로는 은밀히 숨어서 영업하였으며 제도로서 발전하지 못하고 말았다.

⑤ 소송의 종료:소송의 종료는 송관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원피고가 남김없이 변론을 하여 소송을 종결시켜도 좋다고 생각하면 서로 합의하여 연명문서(連名文書)로 판결해줄 것을 청구하면 비로소 판결을 하였다. 판결서를 입안(立案) · 결송입안(決訟立案) · 결절입안(決折立案) · 단결입안(斷決立案)이라고 했는데 입안을 받기 위해서는 승소자가 소송물가격에 따라 법정(法定)된 수수료인 작지(作紙)를 납부해야 했다. 작지는 백지(白紙) 또는 포목(布木)이었으며 소송물가격이 아무리 많더라도 백지 20권을 넘을 수 없었다.

입안의 기재내용은 그 사건의 시초에서부터 변론종결시까지에 제출된 모든 소지, 서증, 증인의 증언내용, 중간결정문 등 모든 사실과 문서의 전문(全文) 등을 빠짐없이 소송진행의 일순(日順)에 따라 기입하고 마지막에 판결사항을 기입하였다. 따라서 큰 소송일수록 입안의 길이가 길었는데 한 예로 1661년(현종 2) 6월 19일의 한성부결송입안은 폭이 42㎝, 길이가 10.3m에 이른다.

판결은 먼저 구술로 언도했는데 구술결 후 입안작성 전에 송관이 경질되면 신임관(新任官)은 구관이 내린 판결초안 그대로 입안을 작성해야 하였다. 입안이 내리면 소송은 종료되며 패소자는 다시는 승소자의 권리를 침범하지 않으며 위반한 경우에는 엄벌을 달게 받겠다는 다짐을 문서로써 제출하였다.

⑥ 상소제도:수령의 판결에 불복한 경우에는 관찰사에게 항소할 수 있으며 이를 의송(議送)이라 했는데 관찰사는 사실심리를 하지 않고 자기 의견을 원심인 수령에게 지시하면 수령이 재심하였다.

의송의 결과에 불복하면 형조에 항소하고 그래도 불복하면 국왕에게 상언(上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소절차는 엄밀한 의미의 심급제(審級制)가 아니고 판결의 최종적 확정은 심급과는 관계없이 따로 득신법(得伸法)에 따랐다.

고려 말에는 다섯 번의 소송에서는 세 번 승소자를 확정하고〔五決從三〕, 세 번의 소송에서는 두 번 승소자를 확정했으며〔三決從二〕, 조선시대에는 처음에는 두 번의 소송에서 두 번 승소한 자를 확정시키는 이도득신법(二度得伸法)이었는데, 『경국대전』에 이르러 세 번의 소송에서 두 번 승소한 자를 확정시키는 삼도득신법(三度得伸法)으로 되었고, 숙종 37년부터는 간단한 소송인 단송(短訟)에서는 세 번 승소자를 확정하도록 하였다.

(2) 옥 송

옥송은 사송처럼 당사자주의가 아니라 규문주의(糾問主義) 절차였으며, 피의자는 처음부터 죄인으로 다루어져 오로지 자백을 얻기 위해서 진행되었으며, 법률상 고문인 고신제도(拷訊制度)가 행해지고 여러 가지 잔인한 고문이 행해졌다.

옥송의 지연을 방지하기 위해 결옥일한(決獄日限)을 사건의 경중에 따라 법으로 정했는데 사죄(死罪)는 30일, 도류죄(徒流罪)는 20일, 태 · 장죄(笞杖罪)는 10일이며, 고문용 신장(訊杖)의 규격을 정하여 한번에 30도를 치며, 3일 내에는 고문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살인이나 상해치사사건이 발생한 경우에는 반드시 시체검안과 함께 사건의 진상을 구명하기 위한 심문조사인 검험(檢驗)을 반드시 두 번 실시하고 의심나면 4검까지 하는 예가 있었으며, 사죄인(死罪人)의 심리는 반드시 관찰사의 책임하에 세 번 실시하고 삼복제(三覆制)에 따라 세 번에 걸쳐 국왕에게 계(啓)하여 판결하였다.

전통적인 소송제도는 갑오경장을 계기로 서구적인 제도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1894년에 재판소라는 명칭과 제도가 탄생했는데 사법권이 행정권으로부터 형식상 분리되는 첫발을 딛게 된 것이다. 이듬해 3월에는 법률 제1호로, 「재판소구성법」이 공포되어 새로운 재판소제도가 창설되고 판사 · 검사가 소송을 담당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재판소도 종래의 관아(官衙)에 간판을 내건 것이고 판사도 관찰사나 수령이 겸임하였으므로 실질적으로는 전통적 제도 그대로였다.

소송절차에 관해서도 처음에는 종래의 규정을 적용하다가 1895년 4월에 「민형소송규정(民刑訴訟規定)」을 비롯하여 법부훈령(法部訓令)인 「재판소세칙(裁判所細則)」에 따라 근대적 소송구조하에서 근대적 기능을 다하지 못한 폐단을 바로잡는 노력을 하였다. 1900년대에 들어서도 「민사소송수수료규칙」 · 「민사소송비용규칙」 · 「신소사건처리규칙(申訴事件處理規則)」 · 「민사 · 형사의 소송에 관한 건」과 같은 절차법이 시행될 뿐이었다.

당시의 절차법은 민사소송절차와 형사소송절차가 합체된 포괄적인 절차법으로서 우선 재판소로서의 기능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도의 것이었고 일단 민사와 형사가 구별되고 있었으나 재판관을 비롯한 소송관계인 그리고 일반인들은 그 구별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지 못하였다.

소송의 근대화를 위한 중요한 계기는 법조인 양성제도의 도입이었다. 1895년 3월에 「법관양성소규정」에 따라 법관양성소를 설치하여 근대적 · 서구적 법률학을 강의하고 법조인을 양성하여 수료자를 판 · 검사로 임명하고, 변호사로의 진출의 길을 열어 1905년부터는 변호사라는 명칭이 소개되고 민사소송당사자나 형사피고인의 위임에 의하여 소송을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의 소송기관, 소송 등은 일본인의 주도하에 운영되었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새로운 소송제도를 경원하거나 소외당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서 비로소 오늘날의 소송제도의 기틀이 잡히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기본적으로는 식민지 지배적 성격의 것이었다. 다만, 민사소송만은 그런대로 서구적 제도와 비슷한 기능을 영위하였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소송제도는 민사소송이나 형사소송 또는 행정소송을 막론하고 각기 소송의 목적달성을 위해 많은 제도개선을 추진하고 있으며 한편 새로운 문제점들을 안고 있다.

민사소송은 올바르고 과오 없는 재판을 위해 적정성(適正性)을 구현하며 소송당사자에게 사실자료 · 증거자료 및 법률적 견해를 제출할 기회를 동등하게 부여하는 재판의 공정성을 구현하며 신속한 소송 추진을 기하며 소송수행에 있어서 법원이나 당사자가 과대한 비용과 노력이 소모되지 않도록 소송경제(訴訟經濟)를 구현하기 위한 장치를 두어 사인(私人)의 권리보호와 사법질서(私法秩序)의 유지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제도적 이상은 현실과 괴리되고 있고 때로는 소송에 대한 경원 · 기피 · 불신의 의식이 싹트기도 한다.

형사소송의 경우에도 실체진실주의(實體眞實主義), 적정 절차, 신속한 재판을 이상으로 하여 제도장치를 마련하고 있는데 이들 이상은 형사소송에 있어서의 인간의 존엄과 가치의 존중 및 인권의 보장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기 위하여 법원의 공평한 구성, 피고인의 방어권보장, 검사와 피고인간의 무기평등(武器平等)의 원칙, 피고인보호의 원칙을 비롯해 수사와 공소제기 및 공판절차의 신속을 위한 규정을 두고 있다.

국가형벌권의 실현과 개인의 자유 · 권리의 보호라는 이율배반적 소송의 본질의 역사성을 감안할 때 현대의 형사소송은 그 목적이 절대적인 실체진실의 발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적정한 절차에 의한 정의로운 실체진실의 발견에 있으며, 적정절차는 기본적인 인권의 보호라는 관점에서 실체진실주의를 제한하는 기능을 영위하는 것이어야 한다.

형사소송의 구조도 당사자주의와 직권주의의 조화를 본질로 해야 하는데 철저한 당사자주의화는 형사소송의 민사소송화를 초래하며, 마찬가지로 민사소송의 철저한 직권주의화는 민사소송의 형사소송화를 초래하므로 꾸준히 우리 현실에 맞는 제도로 개선하는 것이 과제이다.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송사는 패가망신(敗家亡身)’이라는 속담이 있는데 오늘날에도 어느 정도 타당하며, 민사 · 형사를 막론하고 역사적 경험도 살려 제도의 개선이 이루어짐으로써 소송이 믿음직한 것으로 되어야 한다.

참고문헌

『한국법제사고』(박병호, 법문사, 1974)
『민사소송법-전정판-』(이시윤, 박영사, 1986)
『형사소송법』(이재상, 박영사,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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