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춘(陳春)은 진순(眞純 혹은 陳純)이라고도 한다. 관등은 이찬(伊湌)으로 진골 출신이다.
진춘은 진덕왕(眞德王, 재위: 647~654) 3년(649) 8월 도살성(道薩城)에서 치러진 백제와의 전투에 김유신(金庾信), 죽지(竹旨), 천존(天存) 등과 함께 나아가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백제의 장군 은상(殷相)이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석토성(石吐城) 등 7성을 공격해 함락하였고, 진춘 등이 3군을 이끌고 출병하였으나 승부를 내지 못하였는데, 김유신이 도살성 아래 주둔하면서 계책을 세워 백제군을 격파하였다. 백제의 장사(將士) 100명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군졸 8,980명의 목을 베었으며, 전마(戰馬) 1만 필과 함께 획득한 병장기와 같은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대승이었다. 신라는 648년과 649년에 걸쳐 대(對) 백제전에서 거듭 승리를 거두며, 642년 대야성 전투에서의 패배를 설욕하였고, 김유신은 정치적 위상을 회복하였다.
이후 진춘은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 원년(661) 7월에 문훈(文訓)과 함께 하서주(河西州) 총관(摠管)이 되어 같은 해 8월, 문무왕 및 대장군 김유신과 함께 시이곡정(始飴谷停)으로 나아갔다. 같은 해 9월에는 옹산성(甕山城)을 포위, 공격하여 저항하던 수천 명의 백제 유민을 죽이고 항복을 받았다. 이 공으로 검(劍)을 하사받았다.
한편, 진춘은 문무왕 8년(668) 6월에 죽지와 함께 경정(京停) 총관(摠管)으로 임명되었다. 경정(京停)이 다른 사료에 보이지 않으므로 당시 고구려 정벌을 위하여 임시로 편성한 군단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당나라 군대와 함께 평양성(平壤城)을 포위, 공격하였고 9월에 이르러 평양성이 함락되었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공을 포상하기 위해 문무왕은 같은 해 10월에 이찬과 장군 등을 모두 각간(角干)으로 삼았는데, 진춘 역시 이때 각간이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문무왕 16년(676) 11월에 이르러 관직에서 물러나고자 하였으나 왕은 받아들이지 않고 궤장(几杖)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