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는 가연성 고체인 밀랍이나 기름을 원통형으로 성형하여 그 중심에 심지를 박아 불을 밝히게 만든 등화용 연소물이다. 통일신라기의 촛대와 초가위가 출토되어 신라에서 초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시대에는 홍대초와 용초가 궁중에서 사용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각종 초가 개발되고 후기에는 서민층까지 초의 사용층이 확대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는 초에는 홍대초·포초·용초·밀초 등이 있다. 그중 밀초는 밀랍을 녹여 대통 속에 넣어 굳히는 주촉법을 이용하였다. 현재 초는 어둠을 밝히는 용도가 아니라 특별한 예식 등에 사용되고 있다.
재료는 밀랍 · 수지(獸脂) · 목랍(木蠟) · 충백랍(蟲白蠟) · 경랍(鯨蠟) · 파라핀납 · 식물성기름을 이용하였다. 납은 고대로부터 사용되어온 초의 대표적인 원료로서 황색과 백색이 있으며, 봉밀이나 백랍충 · 고래기름에서 얻는다. 양봉법이 보급되기 이전에는 천연적으로 산중에 방치된 봉밀이나 백랍충에서만 채취하였으므로 매우 귀하였다.
초의 기원에 대하여 아직까지 정확한 것은 알려지지 않았다. 테베에 있는 고대이집트의 분묘에서 접시형 초꽂이에 옥수수형 초가 꽂혀 있는 부조가 발견된 바 있다. 서기전 300년경 초기 미노아문명이 일어난 크레타섬에서는 현대의 것과 비슷한 접시형 촛대가 발견되었다. 또, 로마인들이 1세기경에 사용하였던 지초와 밀초의 조각이 프랑스의 아비뇽 근처인 베죵(Vaison)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웃 중국의 기록에는 서기전 1760년경 탕왕(成湯王)이 밀초를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또 한(漢)나라의 회남왕(淮南王)이 방술하는 선비 팔공(八公)을 불러 『홍보방(鴻寶方)』이라는 책을 편찬하였는데 그 속에 초를 만드는 법이 있었으나 민간에는 필요한 일이 아니므로 전하여지지 않았다는 설도 있다. 중국에서 납초가 알려지기 전에는 잘 타는 초목을 다발로 묶은 홰〔炬火〕를 초라 하였다.
『주례(周禮)』에 나라의 큰일에 사환씨(司烜氏)가 분촉(墳燭)을 바쳤으며 제사에는 반드시 촛불을 밝힌다 하였다. 이 분촉은 싸리로 심을 하고 베로 얽어맨 다음 엿과 꿀로 싸바른 것이라고 하므로 분촉의 엿과 꿀 대신 밀랍을 발라 개량한 것이 자초이며, 이 자초가 밀초의 시원으로 보인다. 또, 한나라의 유적지에서는 청동촛대가 출토된 예도 있었음을 미루어 중국에서 시원적인 초가 사용된 시기는 서기전 3세기경으로 추정된다.
서양 중세기에서의 조명은 골풀지초가 잘 알려진 것으로 기다란 갈대심을 기름에 꽂은 빈약한 것이었다. 밀랍초도 잘 알려져 있었으나 가격이 비싸 부유한 사람들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그 뒤 1820년경 프랑스 화학자 슈브리엘(Chevreul,M.E.)이 지방으로부터 스테아린산(stearic acid)을 분리하여 우수한 성능의 스테아린양초를 발명하였다. 이러한 발전에 힘입어 가열압착법에 의하여 지방으로부터 스테아린성분을 분리하는 방법이 고안되었다.
19세기 중엽에는 고래로부터 경랍을 분리하여 보다 밝은 초를 만들게 되었다. 경랍의 깨지기 쉬운 단점은 밀랍의 추가 배합으로 보완하였다. 이 경랍초는 1860년에 설립된 영국의 광도측정의 기준에 따른 정확한 시방서에 의하여 제조되었다. 이 시기에 지랍(광물)을 이용한 초도 개발되었다. 1850년에는 원유에서 파라핀왁스를 성공적으로 추출함으로써 초의 획기적인 발전이 이루어졌다. 1855년까지는 영국에서 파라핀왁스가 생산되었던 것 같다.
1859년 미대륙에서 원유가 발견되어 파라핀의 경제적인 생산을 하게 되었다. 파라핀의 저온도용해라는 결점은 스테아린을 첨가함으로써 해소할 수 있었다. 초의 심지는 주로 면을 이용하였다. 1825년 캄바세레(Cambaceres,W.)가 면심지를 붕사용액 · 질산칼륨 · 염화암모늄의 광물성 암염용액에 담그는 방법을 소개하였다. 이로써 심지의 연소속도와 양초의 소비속도가 균형을 이루어, 심지가 산화될 때 심지의 보충이나 절단 없이도 까맣게 탄 심지가 유리화되면서 재를 만들게 되었다. 기계에 의한 초의 생산은 1834년 모건(Morgan,J.)의 기계에서 발전되어 요즈음 사용하는 양초의 대량생산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삼국시대에는 초가 사용되었다는 기록이나 유물이 발견된 바 없어 초를 알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통일신라기의 촛대와 안압지에서 출토된 초가위가 있어 신라에서는 초가 사용되었음을 입증하고 있다. 고려시대에도 초는 귀하여 대부분 횃불을 사용하였으며, 홍대초와 용초가 궁중에서 사용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1057년(문종 11)에 거란 사신 왕종량(王宗亮)의 귀로에 많은 횃불로 전송하였다고 한다. 왕종량은 반송사(伴送使) 최상(崔尙)에게, 고려의 예악은 중국과 같다고 하였는데 연회에 등불을 켜는 것에 대하여 의아해했다. 자국에서는 오직 혼석(昏夕)에만 화촉을 쓰도록 허용하고 인신(人臣)의 접객에는 비록 늦은밤이라도 초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에 최상이 돌아와, 등촉은 백성들의 고혈이므로 날이 밝을 때 빈객을 접대하자는 건의를 하였고, 문종이 이를 따랐다고 한다.
최충(崔冲)은 구재(九齋)를 열어 후진을 가르치며 때때로 각촉(刻燭 : 초에 금을 그어 시각을 정하여 시를 짓는 것)하여 시의 등차를 정하였다. 이 후부터 각촉의 풍습은 고려의 왕부를 중심으로 한 문신들 사이에 행하여졌다. 조선시대에는 과시(科試)를 각촉으로 한정하기도 하였다. 고려 후기에 이르면서 사치풍조가 만연하여 궐내에서만 사용하는 홍대초가 일반 사가의 상제(喪祭)나 혼례에도 사용되어, 1278년(충렬왕 4)에 일반인의 홍대초 사용을 금하였다.
그러나 1279년에 희종의 아들인 경원공(慶源公) 조(祚)의 장례에 홍대초를 사용하도록 허락함으로써 일반인들도 다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충선왕 때에도 일반인의 홍대초 사용을 금하였으나 제대로 시행되지 않아, 공민왕 즉위년에는 홍대초를 사용하는 자는 감찰사가 탄핵하도록 강력한 조처를 취하였다. 이와 같이 일반인의 사용은 억제하였으나, 왕실의 불사에는 막대한 양의 화려한 홍대초를 사용하였다. 용초는 궁중의 일상생활에 쓰였으며, 왕이 정치를 잘 하기 위하여 어진 신하에게 하사하는 중요한 품목 중의 하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면 내치와 외교의 성공으로 국력이 신장되고 산업 경제가 발달되어 중기 이후에는 각종 초가 개발되고, 후기에 이르면 초의 사용계층은 서민층에까지 확대된다. 조선 초부터 왕실에서는 검약한 생활을 장려하였으며, 또 밀랍도 귀하여 태종 때에는 궁궐과 민간의 길흉행사에 고려 이래로 사용하였던 홍대초 대신 송거(松炬)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세종은 수륙재(水陸齋)에 밀초 대신 유등(油燈)을 쓰도록 하였다. 태종 이래로 홍대초 대신 사용하여온 송거는 화재의 위험이 크므로 포촉(布燭)을 만들어 대전과 동궁전에 매일 한개씩 바치도록 하였다. 성종 때에는 문소전제(文昭殿祭)에 자촉(刺燭)을 쓰므로 연기와 그을음이 심하여 밀초로 바꾸었다고 한다. 특히, 효종연간에 밀랍의 생산지는 영서의 몇 읍과 호남의 무주, 호서의 청주지방에 불과하였고 영남지방은 밀봉이 절종되어 생산이 없었다.
이와 같이 밀랍이 귀하여 이수광(李睟光) 같은 사람은 평생 동안 초를 켜지 않았으며 벼슬아치들도 한 자루의 초를 선물로 받으면 무척 좋아하였다. 부자들은 제사용 납초를 시장에서 구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친구에게서 빌리거나 등으로 대치하였다. 밀랍이 귀하므로 재료를 적게 쓰기 위하여 초는 속이 비고 얇게 만들어 형체만 유지하였을 뿐 오래 타지 못하고 곧 꺼졌다고 한다.
영조 때에도 관혼상제에 관청의 밀초를 사용하도록 하고 일체의 사적 매매를 금하였으나 이의 시행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재상의 집 머슴방에서도 밀초를 켜며 천히 여겼다. 가난한 사람은 제사에도 초 대신 등을 켜 타인의 비웃음을 사기도 하였다. 밀초가 귀하므로 누런 콩가루로 만든 가짜도 생겨 태워봄으로써 진부를 가릴 수 있었다. 비록 밀랍초는 귀하였으나 지초를 비롯한 각종 초가 양산되어, 전기와 양초가 보급되기 시작한 1900년대 초까지 사용되었다.
조선 초의 왕들은 궁중의례용 홍대초의 사용을 억제하였으나, 중기 이후로는 궁중내에도 사치풍조가 만연, 수입염료로 물들인 화룡초를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영조는 옹주의 혼인에도 수입염료인 주홍(朱紅) 대신 국산 자초(紫草)로 물들이도록 하였다. 1759년의 궁중전 가례 때에는 화룡초 대신 홍초를 쓰도록 하여 검약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국운이 쇠하여가는 순조 · 고종 때의 연회에는 대낮에도 두석대 촛대 한 쌍에 화룡초를 꽂아 왕의 위엄을 과시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사용되는 초에는 자초 · 홍대초 · 포초〔布燭〕 · 용초 · 밀초 · 화초〔畫燭〕 · 내점초〔耐點燭〕 · 풍전초 · 만리초 · 성초 · 잡초 · 양초가 있다. 자초는 갈대를 베로 묶어 표면에 납을 바른 시원적인 초로서, 연기와 그을음이 심하였다. 홍대초는 오승포(五升布)에 붉은 물을 들인 납을 발라 길이 1척여로 잘라 만든 초로서, 고려 때부터 조선초까지 길흉행사에 사용되었다. 황밀초는 담황색 반투명한 색채를 띠며, 봉밀을 물에 끓여 불순물을 제거한 밀랍을 판 위에 놓고 굴대로 굴려 원통형으로 만든 다음 굴대를 빼고 심지를 끼워 만든 것이다.
밀초는 대부분 이와 같은 굴림법에 의하여 만들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밀랍을 녹여 대통 속에 넣어 굳히는 주촉법도 이용하였다. 백랍은 황밀을 고아 장지에 걸러 짜내는 정제과정을 거쳐서 만들거나, 동청수(冬靑樹 : 사철나무)나 여정목(女貞木 : 광나무)에 서식하는 백랍충(白蠟蟲)의 분비물을 가열하여 얻는다. 용초는 백랍을 주홍안료로 물들여 용을 양각한 것으로 궁중의 실내용 초였다. 화초는 백랍을 물들여 모란을 장식하였고 심지는 종이를 붉게 물들여 만든 궁중의 의식용 초였다. 내점초는 황밀 · 송지 · 괴화(槐花 : 느티꽃) 각 한 근과 부석(浮石) 4냥을 함께 녹여 등심포로 심지를 만든 것으로, 하루 밤낮을 켜도 한 치 정도만 닳아 내점초라는 명칭이 붙었다.
풍전초는 황밀 · 검은콩가루 · 역청(瀝靑 : 송지의 별명) 각 2냥과 건칠(乾漆), 찧은 해금사(海金沙), 초석(硝石 : 질산칼륨), 유황 1냥으로 만든 초이다. 먼저, 황밀과 역청을 녹여서 나머지 재료와 함께 반죽하여 낡은 베로 심지를 하면 거센 바람에도 꺼지지 않으므로 풍전초라 하였다. 만리초는 밀 한근에 황화지정(黃花地丁 : 민들레) · 조각화(皁角花 : 주염꽃) · 송화(松花) · 괴화 각 2전을 함께 넣어 살짝 끓여 백급(白芨: 대왐풀) 2전을 넣어 붉은 기운이 돌 때 만든 것으로, 만리를 켜고 갈 수 있다고 하였다. 성초는 황밀, 송지, 다진 괴각자(槐角子 : 느티나무씨) 각 한 근과 속포석 8냥, 백교향(白膠香) 2냥을 함께 끓인다. 그후 마디가 작은 7, 8치의 대통에 부어 굳힌 것으로 심지는 박지 않고 초 끝에만 꽂아 불을 켜도록 하였으며, 이 초 한자루는 10∼20일간 사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지초는 소나 돼지의 지방을 회즙(灰汁) 속에 넣고 끓여 찌꺼기를 버리기를 3, 4회 반복하여 깨끗한 기름을 걸러낸 다음 반으로 쪼갠 대통에 넣어 끈으로 묶어 굳힌 것으로, 심지는 면포를 사용하였다. 지초는 잘 녹는 특성이 있으나, 공주지방에서 만든 우지초는 특히 품질이 좋았는데 그 묘방은 찌꺼기를 버리는 요령에 있다고 하였다. 지초에는 송진이나 밀랍을 섞어서 만든 보다 좋은 초도 있었다. 중국에서는 지초를 담금법으로 만들고 표면에는 기름과 백랍을 7 : 3의 비율로 혼합한 백랍을 발라 체결됨을 막았다고 한다. 이밖에 포황(蒲黃)과 관유(灌油 : 회초리나무 기름)를 섞어 만든 초와 황벽말(黃蘗末 : 황경피나무 가루)과 참기름찌꺼기를 섞어 만든 초 및 쌀뜨물과 기름찌꺼기로 만든 초를 잡초라 하였다.
원료를 용제추출법이나 가열압착법으로 정제하여 얻어낸 납이나 지방을 담금법 · 굴림법 · 주촉법(鑄燭法)에 의하여 만들었다. 담금법이란 용해된 원료에 심지를 담갔다 빼내어 식히는 동작을 반복하여 굵게 만든 것이다. 굴림법이란 심지 위에 용해된 원료를 붓고 반듯한 표면 위에서 굴려 만드는 방법이다. 주촉법은 용기나 대통에 원료를 부어 만드는 것으로 담금법이나 굴림법에서 발전된 것이다. 이러한 수공법은 기계에 의한 대량생산이 이루어진 요즈음도 특별한 목적을 위한 초의 제작에 이용되고 있다. 심지로는 대마 · 무명 · 종이 · 양모가 쓰였다.
현대사회에서 초는 예전처럼 어둠을 밝히는 목적으로 사용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동 · 서양의 종교의식이나 집회를 비롯한 각종 예식에는 아직도 초가 사용되고 있다. 이는 귀한 초로써 성스러운 날을 더욱 빛내고자 한 옛 풍습이 계승된 것이다. 요즈음은 각종 색에 따라 향기가 나는 다양한 형태의 초들이 제작되고 있다. 촛불이 지니는 아늑하고 부드러운 분위기는 인류 생활과 함께 영원히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