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1년 강원도 인제 원통리 출신으로 본관은 평창(平昌)이며, 부친 이인오와 모친 박씨 사이에서 3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속명은 창림(昌林). 법명은 춘성(春性)이다.
춘성(春城)은 13세 때 설악산 백담사(百潭寺)으로 가서 한용운(韓龍雲)의 제자가 되었다. 그 뒤 유점사(楡岾寺)의 김동선(金東宣) 율사에게 구족계를 받고 석왕사(釋王寺)로 가서 불교전문강원의 대교과를 수료하였다.
3·1운동 당시 은사 한용운이 민족 대표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자, 도봉산 망월사(望月寺)에 머물며 한용운의 옥바라지를 하였다. 이때 한용운이 작성한 「조선독립의 서」를 비밀리에 받아 내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전달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 뒤 설악산 신흥사와 석왕사의 주지를 지냈고, 수덕사 정혜선원에서 만공(滿空) 선사를 스승으로 삼아 전법수행(傳法修行)을 하였다. 1930년대 재단 법인 선리참구원의 평의원으로 선출되었고, 조선불교선종 수좌대회에 참가했으며, 선학원에서 안거 수행을 하는 등 선(禪)의 부흥에 전념하였다. 해방 이후에도 1954년 선학원에서 개최한 전국비구승대표자 대회에 참석하는 등 선승(禪僧)으로서 활동을 하였지만, 대처승과 갈등을 빚었던 불교정화운동의 일선에는 일절 나서지 않았다.
그는 이외에도 유점사, 흥국사, 심원사, 수덕사, 봉은사 등지에서 강사 활동 및 선 수행을 이어 나갔다. 그러나 결코 한 절에 오래 머무르려 하지 않았다. 도봉산 망월사, 강화도 보문사(普門寺) 등을 전전하면서 운수납자(雲水衲者)로서의 인생을 살았으며, 신도들과 그렇게 친하게 지내지도 않았다.
불가(佛家)에서는 그를 탈속한 무애도인(無碍道人)이라 평가하고 있으며, 거침없이 육두문자를 썼으므로 욕쟁이 스님이라고도 한다. 또한 길을 가다가 가난한 자를 만나면 가진 돈을 몽땅 주었고, 추위에 떠는 사람을 보면 그 자리에서 입고 있던 옷을 벗어 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는 한용운의 제자로, 백용성과 함께 화엄사상을 웅변하였던 화엄법사로, 수덕사의 만공 회상에서 수행했던 간화선 수행자로, 망월사를 비롯한 각지에서 수좌들을 지도했던 선승으로 다양하게 기억되고 있다. 한평생 철저한 무소유(無所有)의 삶을 살다가 경기도 성남에 있는 봉국사(奉國寺)에서 입적(入寂)하였다. 춘성의 비석과 부도탑이 봉국사에 건립되었다. 다비(茶毘)한 재를 몽땅 바다에 뿌리라고 유언하였으므로, 제자들은 그의 사리까지도 모두 서해에 던졌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