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 1운동의 분위기가 번져나가는 속에서 1919년 3월 무렵 서간도 관전현(寬甸縣) 소아하(小雅河) 서대파(西大坡) 부근에서 망명 유림들이 주축이 되어 조직되었다. 기록에 따라서 향약, 향약계(鄕約契), 향약단 등으로 불렸다.
지도자 격인 도헌(都憲)에 백삼규(白三圭), 부헌(副憲) 송상규(宋尙奎)를 비롯한 이소응(李昭應), 박양섭(朴陽燮), 박장호(朴長浩), 최능흡(崔能洽), 김성범(金聖範), 김유성(金有聲), 이사은(李思誾), 백응수(白應洙), 오석영(吳錫永), 조대능(趙大能), 최근창(崔根昌), 이거수(李巨燧), 김덕신(金悳新) 등 총 15명으로 지도부를 구성하였다. 이들 중 대다수는 화서학파 출신으로 유인석(柳麟錫)과 깊은 연관이 있었다.
조직 구성은 총지휘부인 도약소(都約所) 아래에 향약소(鄕約所), 방약소(坊約所), 리약소(里約所)를 두었다. 직제는 유인석이 참여한 제천향약(堤川鄕約), 관일약(貫一約) 등과 유사하였는데, 도약소에는 도헌 1명, 부헌 1명, 도유사(都有司) 1명, 찬약(贊約) 5명, 주무(主務) 5명 등을 두었다.
이 무렵, 서간도 유하현(柳河縣)에서는 부민단(扶民團)이 한족회(韓族會)로 전환되고, 통합된 독립군 단체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이 결성되었다. 같은 화서학파 출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던 대한독립단의 조맹선(趙孟善)은 향약단과의 통합을 추진하였고, 박장호 · 백삼규 등이 이에 응하면서 1919년 7월에 대한독립단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복벽주의를 지향하는 향약단과 공화주의(共和主義)를 지향하는 대한독립단 기존 세력 사이에 연호 사용 등을 둘러싼 갈등이 발생하였다. 이 과정에서 백삼규 등은 대한독립단의 영향력 아래에서 향약단을 재설치하였다. 그리고 관전현 지사(知事)에게 지원을 요청했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후 백삼규가 1920년 6월 4일, 중일합동수색대에 의해 전사하면서 구심점을 잃고 뚜렷한 활동을 이어가지 못하였다.
1922년 1월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한교거류민단(韓僑居留民團), 광한단(光韓團), 청년단(靑年團), 한교회(韓僑會), 기원독립단(紀元獨立團) 등 7개 단체와 서간도 지역의 군사단체 통일을 논의하는 회의에 참석하였다. 이들 단체는 이후 대한통군부(大韓統軍府)를 조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