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2월 28일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인 조소앙의 지도 아래 중국 상하이[上海]의 한인 소년 민영완(閔泳琬), 조시제(趙時濟), 조이제(趙利濟), 이재현(李在賢), 조인제(趙仁濟), 김동수(金東洙), 연충열(延忠烈), 이규서(李圭湍) 등 23명이 김덕근(金德根)을 책임자로 하여 국권회복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조직한 단체이다.
고대 화랑제도(花郞制度)에 따라 민족의식을 환기, 교양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아 강령, 규약을 제정하고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화랑보』라는 기관지를 30부씩 발간하여 상하이 한인들에게 배포하기도 하였다. 또한, 3 · 1운동 기념일, 국치(國恥) 기념일 등에는 상하이의 다른 한인단체들과 함께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평소에는 독립운동가들 사이에서 전령으로 활동하며, 통신 연락과 송영(送迎), 응접(應接) 등에 종사하였다. 1930년 8월에는 상하이의 한인단체인 애국부인회(愛國婦人會), 흥사단(興士團), 노병회(勞兵會), 한인친목회(韓人親睦會), 인성학교유지회(仁成學校維持會), 소년척후대 등과 함께 13개 대표 20명이 회합하여 수해구제회(水害救濟會)를 결성하였다. 또한, 애국부인회, 인성학교동창회(仁成學校同窓會), 소년척후대 등과 함께 모연대(募捐隊)를 조직하여 의연금을 모집하였다.
1930년 8월 1일 소년척후대와 통합하여 상해한인소년동맹을 조직하였다. 한인소년동맹의 집행위원장은 이만영(李晩榮)이었고, 지도자로는 옥인섭(玉仁燮), 조이제, 차영선(車永善), 김양수(金良洙), 이규홍(李圭鴻), 박성근(朴成根), 조시제 등이었다. 기관지로 『새싹』을 발간하였다.
비록 한인소년동맹으로 통합하였지만, 그 이후에도 계속하여 화랑사라는 명칭으로 활동을 하였다. 하지만 1932년 4월 30일 책임자인 김덕근이 일제경찰에 붙잡혀 국내로 압송된 이후 유명무실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