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종의 휘는 변(昪), 초명은 원범(元範), 자는 도승(道升)이고, 호는 대용재(大勇齋)이다. 정조의 이복동생이자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恩彦君)의 손자로, 전계부원군(全溪府院君)의 셋째 아들이다. 1844년(헌종10)에 형 회평군(懷平君) 명(明)의 옥사로 가족과 함께 강화로 유배되었다. 1849년(헌종15) 6월 6일, 헌종이 후사없이 돌아가시자 대왕대비인 순조비 순원왕후의 명에 의해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진 뒤 왕위에 올랐다. 철종은 왕위에 오른 지 14년 만에 세도정치의 거센 소용돌이에 휘말려 올바른 정치도 펴보지 못한 채 창덕궁 대조전에서 생을 마쳤다.
「철종어진」은 한국전쟁때 부산 피난 시 보관창고의 화재로 화폭의 1/3정도가 소실되었다. 오른 쪽에 철종의 친필로 쓴 표제(나의 31세 때의 초상, 철종희륜정극수덕순성문현무성헌인영효대왕(予三十一歲眞, 哲宗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大王)를 통해 철종 12년인 1861년에 그려진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이한철(李漢喆), 조중묵(趙重黙)이 주관 화사를 맡고 김하종(金夏鐘), 박기준(朴基駿), 이형록(李亨祿), 백영배(白英培), 백은배(白殷培), 유숙(劉淑) 등이 도와 한달 반 만에 완성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이 어진은 좌안8분면의 전신교의좌상으로, 전립에 군복을 갖추어 입고 있다. 검붉은 갈색 길에 홍색 소매를 덧댄 군복 위에 검은 색 전복을 입었다. 그 위에 수놓은 광대를 겨드랑이 밑으로 맨 다음, 남색 전대를 늘어뜨렸다. 관모는 영, 정조대에 유행하였던 죽전립(竹氈笠)을 썼으며, 전립의 정면은 투조된 옥판으로 장식했고, 모정 즉 정수리에는 옥로(玉露)를 달고 공작미(孔雀尾)를 길게 늘어뜨렸다. 이처럼 군복을 입은 어진은 이를 즐겨 입었던 사도세자를 추모하는 의미에서 정조대 이후에 그려지기 시작하여 익종, 헌종, 철종으로 이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면은 전체적으로 어두운 갈색으로 칠했으며, 외곽선 및 이목구비는 짙은 갈색 선으로 형용되어 있을 뿐, 오목한 부위에 음영이 적극적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눈은 특히 정성들여 묘사하였으며, 아직 장년이어서인지 수염은 아주 검게 느껴지는데, 털올은 짙은 갈색 선에 어두운 금색을 섞어 처리하였다. 다채로운 색감과 아울러 선염효과가 강하게 들어간 옷주름 처리는 왕의 초상화로서의 위엄을 한층 돋우어준다. 한편 짙은 눈썹, 갸름한 얼굴, 쌍커풀이 깊게 진 동그란 눈, 안쪽을 모인 눈동자 등 철종의 모습은 왕으로서의 존재감 보다는 순진한 강화도령으로서의 면영(面影)이 아직도 엿보인다.
조선시대의 어진이 기록상으로는 다양한 차림으로 그려졌다고 하지만, 현재 전해오는 어진들이 대부분 익선관본인데 반하여 이 「철종어진」은 유일한 군복본 이라는 점에서도 귀중한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