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원유관을 사용한 것은 고려 말 공민왕 19년(1370) 5월 명나라 태조로부터 면복과 원유관을 사여받은 데서부터이다. 그 이후 원유관은 우리나라 왕, 왕세자, 왕세손 등이 국가의 행사에 꾸준히 착용해온 대표적 관모 중 하나이다.
조선의 왕은 9량의 원유관을 착용하였고, 대한제국 황제는 12량의 통천관을 썼다. 현재 고종황제와 순종황제가 착용했던 통천관이 사진과 어진의 형태로만 남아 있고, 의왕(義王)이 착용했던 본 유물이 전해지는 원유관 유물로는 유일하다.
의왕은 고종의 다섯째 아들로, 어머니는 귀인 장씨이다. 이름은 이강(李堈)이고, 호는 만오(晩悟)이다. 의친왕(義親王) 또는 의화군(義和君)이라고도 불린다.
의왕 원유관은 겉감은 추사(秋紗)를 사용하고 안감은 검은색 갑사를 사용하였으며 7봉에 8량으로 구성되어 있다. 8량에는 청, 백, 적의 세 가지 구슬로만 장식을 하였다. 크기는 높이 21.8㎝, 폭 25㎝, 밑지름 16.5㎝, 둘레 55㎝이다.
귀 위쪽으로 양쪽에 매화 문양의 화판이 두 개 장식되어 매듭으로 줄을 고정할 수 있도록 되어 있고, 매듭끈은 동다회 끈으로 금사로 만든 가락지 매듭이 끼워진 방망이 술이 달려 있다.
틀을 만들 때 사용한 종이는 양지(洋紙)인 것으로 보아 개화기 이후 서양에서 들어온 종이를 틀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기증 당시부터 형태가 틀어지고 다소 손상된 상태였는데, 이는 한국전쟁 당시 피난 나올 때 처마 밑에 숨겨 관리되지 못하여 형태가 틀어진 것이라고 한다.
원유관은 조선시대 왕과 왕세자가 조하(朝賀)를 받을 때 조복(朝服)인 강사포(絳紗袍)에 착용한 관모(冠帽)이고, 의화군 이강이 의왕으로 책봉될 때 실제로 사용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대한제국기 의왕으로 책봉될 때 실제 사용되었던 것이고, 착용자가 명백하며 왕의 원유관으로 현존하는 유일한 것이기 때문에 가치가 큰 유물이다. 의왕비 김씨가 한국순교복자수녀회에 기증하여 부산광역시 금정구에 있는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2013년 6월 14일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