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모양 집자리는 철기시대 한반도 중부지역에서 주로 나타나는 평면형태가 한자의 여(呂)자처럼 생긴 집자리이다. 철(凸)자모양 집자리와 함께 강이나 하천유역의 충적지, 바닷가와 인접한 해안사구에 분포하는 주거건축이다. 기본적으로 출입구인 작은 방과 주생활공간인 큰 방으로 나누어진다. 내부구조는 취사·난방시설과 기둥, 벽체마감, 출입구, 지반다짐, 지붕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질무문토기와 타날문토기가 유행한 지역과 거의 겹쳐 있다. 한반도 중부지역의 마한과 예계 집단의 정체성, 활동 영역, 물질문화의 양상 등을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고고자료이다.
철기시대(초기철기시대~ 원삼국시대) 이후 우리나라 중부지역에서는 주거지 한편에 출입구 시설이 달린 이른바 '여자모양집자리〔呂字形住居址〕'라 불리는 독특한 수혈주거 형태가 발달하였다. 여자모양집자리는 1980년대 초반 충북 중원 하천리유적과 강원 양양 가평리유적 등에서 발굴되어 처음으로 알려졌으며, 1990년대에 이르러 강원 강릉 안인리유적이 조사되면서 고고학계에서 공식적인 집자리 유구 명칭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현재 경기 서해안지역을 제외하고 임진강유역, 한탄강유역, 한강유역, 북한강유역, 남한강유역, 강원 동해안지역 등 한반도 중부지역 곳곳에서 철자모양집자리〔凸字形住居址〕와 함께 여자모양집자리가 광범위하게 확인되고 있어 당시 크게 유행한 주거건축이라 할 수 있다.
여자모양집자리는 철자모양집자리와 더불어 문헌상에 보이는 한반도 중부지역의 마한(馬韓)과 예계(濊系) 집단의 정체성, 활동 영역, 물질문화의 양상 등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고고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여자모양집자리가 발견된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하남 미사리유적, 포천 자작리유적, 가평 대성리유적, 춘천 우두동유적, 횡성 둔내유적, 양양 가평리유적, 강릉 안인리유적 등이 알려져 있다.
여자모양집자리는 철자모양집자리와 함께 한반도 중부지역에 주로 나타나는 주거건축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집자리들은 강이나 하천유역의 충적지 그리고 바닷가와 인접한 해안사구에 주로 분포하면서 크고 작은 마을을 이루고 있는데, 이른바 '중도유형문화(中島類形文化)'의 표지로 강하게 인식되고 있는 경질무문토기(硬質無文土器) · 타날문토기(打捺文土器)가 유행한 지역과 거의 겹쳐져 있다.
여자모양 또는 철자모양과 같이 출입구 시설이 돌출된 이러한 집자리〔주거지〕의 계보를 현재 두만강, 연해주 지역의 초기철기시대 문화인 단결-끄로우노프카문화(kroutovka culture)와 연결되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발생과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다.
여자모양집자리는 1990년대 초 강릉 안인리유적이 발굴되면서 층위적 선후관계에 따라 철자모양집자리와는 별개의 주거형식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잡았으나, 최근 몇몇 발굴사례를 통해 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면서 원래 여자모양의 평면구조를 갖춘 집자리가 폐기된 이후 인공적, 자연적 삭평에 의해 파괴되는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바닥면이 높은 출입부가 더 삭평되면서 철자모양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을 개연성이 있다고 보기도한다.
여자모양집자리의 주공간(주실: 큰방) 평면형태는 철자모양집자리와 같이 철기시대 전기에는 (장)방형이 대세였지만, 점차적으로 그 형태가 변화하여 철기시대 후기에는 서울 · 경기 지역과 강원 영서 일부 지역에서 육각형의 집자리가 출현하고 있다.
여자모양집자리의 주공간(주실: 큰방) 평면형태는 크게 방형, 장방형 이외에 오각형과 육각형으로 구분되고 있다. 기본적으로 출입구인 작은 방과 주생활공간인 큰 방으로 나누어지며, 이 두 방을 연결하는 통로 유무와 큰 방의 형태에 따라 평면형이 구분된다. 일반적으로 큰 방이 말각방형을 이루면서 통로가 없는 평면형을 철(凸)자형, 작은 방과 통로 그리고 큰 방으로 이루어진 평면형을 여(呂)자형, 큰 방의 단벽이 두드러지게 둔각 처리한 주거지를 한성백제기의 육각형주거지(육각모양집자리)라 부르고 있다.
여자모양집자리는 철자모양집자리 및 육각형주거지와 함께 출입구가 돌출된다는 점 뿐만 아니라 기둥배치가 벽주식이고 주거지 장축선 상에 노지가 설치되는 점, 출입구에서 바라봤을 때 우측에 'ㄱ'자형 쪽구들이 위치하는 점, 'l'자형 쪽구들은 우벽에 설치되는 점 등 축조원리 자체가 정형화되어 있어 여타 주거지 형태와는 구별되는 공통점을 지닌다. 따라서 출입구가 돌출된 주거지라는 범주 내에서 동일한 주거형태로 이해되기도 한다.
여자모양집자리는 4개의 기둥을 세워 지붕을 덮은 영남지방 삼한시기의 4주식 (장)방형주거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구조를 보이고 있는데, 그 내부구조는 크게 취사 · 난방시설과 기둥, 벽체마감, 출입구, 지반다짐, 지붕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취사 · 난방시설은 노지와 쪽구들, 그리고 부뚜막으로 구분된다. 노지는 대개 주거공간의 후면부에서 약 1/3지점에 위치하는데, 주로 점토띠식 노지가 설치되었다. 이러한 전통은 선사시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철기시대까지 사용되었으며, 일부 영서와 영동지역에서는 삼국시대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쪽구들(외줄구들)은 주거공간 내부에 벽을 따라 고래를 1~2줄만 설치한 부분난방의 형태이다. 대체로 벽면을 따라 좁고 길게 설치된 쪽구들은 한반도에서는 초기철기시대부터 남북국시대까지 나타난다. 외형적인 특징에 따라 'ㄱ'자형, 'l'자형, 'ㄷ'자형, 'T'형 등 다양한 형태로 구분된다. 강원 영동지역의 철기시대 주거지에서는 현재까지 쪽구들 문화가 나타나지 않고 있어 다른 지역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기둥시설은 무주공식, 벽기둥, 내부기둥, 외부기둥으로 나뉜다. 벽기둥은 대체로 철기시대 이른 시기 일수록 넓은 간격으로 설치되었으나, 백제 한성기 주거지에서는 주로 좁은 간격과 촘촘 간격이 다수 확인되고 있어 시기별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내부기둥은 벽기둥과 함께 주거지의 지붕구조, 그 중에서도 종도리와 중도리를 받치는 기둥으로 일렬, 이열, 삼열, 삼각형, 방형 등 다양한 구조로 설치되기도 하였다.
벽체는 수혈주거지 내에서 벽기둥간의 빈 공간을 막아서 외부 환경의 변화로부터 내부를 보호하고, 벽체를 더욱 견고히 하는 시설물로서 대다수 목재를 사용하였다. 목재 외에도 초본류나 점토를 단독 혹은 다른 재료와 결합해 사용하기도 하였다. 대부분에서는 횡판재를 두 단 내지 세 단을 세로로 결합해 벽체에 세웠으나, 종판재를 벽체 촘촘히 박기도 하였다.
출입구가 돌출된 주거지의 출입구는 단면형태로 계단식과 경사식으로 구분된다. 출입구 연결부위에는 출입구 시작지점에 횡목이나 단단한 점토, 돌을 놓는 경우가 확인되고 있기도 하다.
주거지 내부 바닥면은 점토를 깔아 평평하게 면을 만들거나, 공이 등으로 바닥에 깐 점토를 단단히 다지기도 하였다. 또한 수혈벽면 바로 바깥에 흙을 돌려 쌓아 주거의 보호와 관련하여 방수용이나 벽면 보호용으로 둑시설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흙지붕의 경우 우리나라에서 아직까지 정확히 확인 된 바가 없지만, 가평 대성리 화재 주거지 내부에 흙이 다량 유입된 흔적이 남아 있어 그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여자모양집자리 내부에서는 중도유형문화의 표지로 인식되는 경질무문토기와 타날문토기가 출토되며 일부 늦은 시기의 주거지에서는 백제토기, 신라토기가 출토되고 있다. 따라서 여자모양집자리는 철기시대~삼국시대 초기에 한반도 중부지역에서 성행한 주거양식의 하나로 이해되고 있다.
여자모양집자리는 철자모양집자리와 함께 철기시대~삼국시대의 한반도 중부지역에서 성행한 주거양식으로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어 당시 한반도 중부지역의 마한과 예계 집단의 정체성, 활동 영역, 물질문화의 양상 등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고고자료이다. 그러나 주거지 평면형태의 육각형으로의 변이, 쪽구들의 구조, 출토유물 등 세부적인 면에서 일부 지역적인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여자모양집자리의 독특한 출입구와 내부시설인 화덕, 벽체, 상부가구구조 등의 비약적인 발전은 삼국시대 주거건축 기술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