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천사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판(興天寺 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板)은 1882년(고종 19)에 『원각경』을 감로사에서 판각한 목판이다. 경판을 판각한 감로사는 서울 동대문 밖 동묘 부근에 있었던 사찰로, 당시 정토신앙 결사 단체가 머물렀던 공간으로 추정된다. 비록 2장이 결판되어 있으나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하여 국가유산의 가치가 높다. 조선 전기 고승인 함허당 득통이 주석한 판본을 저본으로 새롭게 재편해서 판각하였으며, 현전하는 경판으로는 유일하다는 가치가 인정되어 2016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이 경판은 조선시대 함허당(涵虛堂) 득통(得通, 1376∼1433) 화상이 『 원각경(圓覺經)』에 주해를 달아서 1464년(세조 10)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간행한 8행본을 저본으로, 1882년(고종 19)에 감로사(甘露寺)에서 판식을 10행본으로 새로 재편해서 판각한 것이다.
『원각경』은 사람들이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선한 바탕을 닦을 것을 권하고 자기 마음의 본래 성품을 깨달아 그 원만한 깨달음을 실행하기를 강조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은 당나라 때 불타다라(佛陀多羅)가 한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본래 산스크리트어 원본이 전하지 않은 까닭에 중국에서 만든 위경(僞經)이란 주장이 지배적이다.
『원각경』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이후 고려시대 지눌(智訥)이 깊이 신봉하였으나, 현전하는 고려본은 송나라 효종의 주석본이 유일하다. 조선 세조 때 간경도감과 원각사에서 종밀(宗密)의 소초본을 저본으로 신미(信眉) 등이 국역한 언해본이 보급된 이후,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종밀의 소초본이 널리 유통되자 강원의 교재로 채택되어 학습하였다.
동시에 간경도감에서는 함허당 득통이 설의(說誼)한 3권본을 간행하였으나, 원간본은 남아 있지 않고 이를 후대에 복각하거나 재편한 판본들이 현전하고 있다. 주해자 득통은 당호가 함허당, 법명이 기화(己和)이다. 무학 자초(1327∼1405)를 이은 선종 승려로 『원각경』 외에 『금강경오가해(金剛經五家解)』와 『 선종영가집(禪宗永嘉集)』 등에 설의(說誼)라는 형식으로 해설한 것이 유명하다.
경판을 판각한 감로사는 동대문 밖 동묘 부근에 있었던 사찰로 당시 정토신앙 결사 단체가 머물렀던 공간으로 추정된다. 이곳 감로사에서는 『원각경』 외에도 1878년(고종 15)에 감로법주 보월거사 정관(正觀)이 설법한 『 제중감로(濟衆甘露)』가 간행된 것을 비롯하여 『연방시선(蓮邦詩選)』(1882)을 목판으로 개판하고, 『감로법회(甘露法會)』(1882), 『금강경정해(金剛經正解)』, 『 반야심경(般若心經)』과 『법해보벌(法海寶筏)』(1883), 『 술몽쇄언(述夢瑣言)』(1884) 등을 금속활자 전사자(全史字)를 대여해서 차례로 간인하였다.
또한, 1908년 동암거사 강재희(姜在喜, 1860∼1931)가 부모의 공덕을 빌기 위해 『육자대명왕신주경(六字大明王神呪經)』을 서빈정사에서 개판하고, 그 목판을 감로사에 보관한 사실이 보인다. 이러한 서적류의 간행 양상으로 보아 조선 후기에 중인과 하급 무인 계층을 중심으로 결성된 단체에서 불교와 도교가 습합하였던 결사 신앙의 행태를 살필 수 있다.
흥천사 도서인 『원각경』 목판은 바로 득통 기화의 주해가 들어 있는 판본 중 하나이다. 이 경판은 상 · 중 · 하 3권의 62판이 완판이나 현재 2판이 결판된 60판만 남아 있는 상태이다. 박상국이 1987년에 조사한 보고서에도 그 당시 이미 2판이 결손된 사실을 밝히고 있으며, 판각 이후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면서 인경(印經)하였기 때문에 어디에서 분실되었는지 알 수 없다.
원래 간행된 목판 전체 62판 중에서 권상 제34장의 1판과 권중 제12장의 1판 등 2판이 결판이다. 그리고 권상의 마지막 장인 제45판과 권중의 마지막 장인 제49판이 단면 판각인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양면에 판각되어 있다. 다만, 권상의 제37장과 제38장의 후면에는 각각 표지에 쓸 제첨과 간행 사실 등이 새겨져 있다.
목판의 전체 길이는 대략 세로 21.3㎝, 가로 47.9㎝(반곽은 21.3㎝×14.1㎝)이며, 두께는 2㎝ 내외이다. 경판의 중앙에는 상단에 ‘經(경)’이 그 아래로 ‘大方廣圓覺脩多羅了義經(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이란 판심제(版心題)와 권장차가 새겨져 있으나, 그 판심의 형식이 전통적인 조선 사찰본과는 다른 명판의 영향으로 보인다. 마구리의 좌우 측면의 윗부분에는 ‘圓經(원경)’이라는 축약 경명과 권수, 아래에는 장차를 음각으로 표시해 놓았다.
그중에서 권하 제2526장은 한쪽에만 표시되어 있고, 권상 제78장의 마구리에는 한쪽은 장수가 올바로 표시되어 있으나 다른 쪽에는 결판된 제3~4장의 마구리가 끼워져 있는 상태이다. 하권 말에 “광서8년임오8월일 감로사식(光緖八年壬午八月日 甘露社識)”이란 간행 기록을 통해서 조선 후기 1882년에 정씨 집안의 지원으로 감로사에서 판각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경판은 1882년(고종 19) 감로사에서 판각된 이후 여러 곳으로 옮겨 다니며 인경하다가 어느 시점에 지금의 흥천사로 옮겨 보관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처음 감로사에서 간행한 인경본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보관되어 있으나 현전본은 매우 드문 편이다. 이에 비해 이듬해인 1883년(고종 20)에 천마산 봉인사(奉印寺)로 옮겨서 간행된 인경본은 비교적 전래본이 많이 남아 있는 편이다.
다만, 봉인사 인경본에는 감로사판의 권수에 위태천상(韋駄天像)과 위패가 새겨진 변상도(變相圖)가 추가되어 있고, 권하 말에는 간행 기록을 새로 판각해서 교체하였다. 새로 판각한 기록에는 당시 봉인사 부도암 주지 환진(喚眞)의 발문이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 1883년 봄에 하정일(河靖一)이 화갑을 맞은 갑신생 상궁 누이의 장수를 빌기 위해 비용을 대어 100부를 간행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흥천사 도서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 경판은 조선 후기 1882년 8월에 신앙 결사 단체인 감로사에서 판각된 책판이다. 비록 2장이 결판되어 있으나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는 매우 양호하다. 우리나라 조선 전기 고승인 함허 득통이 주석한 판본을 저본으로 새롭게 재편해서 판각하였으며, 현전하는 경판으로는 유일하다는 가치가 인정되어 2016년 2월 18일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