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주(李根周)는 1860년 2월 3일 충청남도 홍성에서 출생하여 1910년 9월 23일 자결 · 순국하였다.
충청남도 홍주에서는 1895년 4월부터 정부의 개화정책에 반대하여 의진(義陣)을 결성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어 8월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시행되자 이에 분개하여 홍주의 유생 100여 명이 11월 의병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안병찬 · 채광묵의 인솔로 홍주성에 입성하였으며, 박창로와 이창서 등도 각각 수백 명을 인솔하고 홍주부에 집결하였다. 이때 의진은 안병찬 등 소론 계열의 지방 유생과 김복한 등 노론 계열의 전직 고관들로 구성되었으며, 이때 이근주도 임승주 · 임한주 등 유생들의 연명을 받아 관찰사에게 서신을 보내어 단발에 반대하였다.
같은 해 12월 의병들은 경무청을 습격하고 관찰사 이승우를 압박하여 거의(擧義)에 동참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이승우는 창의소를 설치하고 홍주목사 겸 창의대장의 명의로 절제사에게 명령을 내려 군사를 모집하는 한편, 이설(李偰)에게 장계(狀啓) 및 격문(檄文)을 작성하게 하였다. 그리고 창의대장에 추대된 김복한은 홍주의진(洪州義陣)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이승우는 곧 배반하고 안병찬 · 임승주 등 23명을 구금하였으며, 의진에 합류하려던 각지의 관군들도 모두 회군(回軍)하였다. 이들이 서울로 압송되는 도중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일어나고 김홍집이 처형되는 등 시국이 급변하자 이들은 다시 홍주감옥에 수감되었고, 김복한 등 6명은 1986년 1월 서울에서 재판을 받고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국왕의 특지에 따라 모두 석방되었다.
한편, 이근주는 이들의 구금 소식을 듣고 자신도 구금되기를 자청하였으나, 노모를 걱정하는 형제들의 제지로 무산되었다. 이에 그는 서산 · 태안 방면에서 의병을 모집하다가 동료들의 석방 소식을 듣고 중지하였다. 이후 청양의 조의현을 찾아 거의하려고 계획하였으나 그마저 체포되자 부득이 중단하였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에 반대하여 1906년 3월 다시 홍주에서 의진이 결성되었으나 이때 이근주는 참여하지 않았다. 1910년 8월 한국이 일본에 강제로 병합되자, 그는 백형 이근하의 회갑연을 마치고 난 며칠 후인 9월 23일 선산 묘소에서 "존화양이(尊華攘夷) 척사부정(斥邪扶正)"이라는 글을 남기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 · 순국하였다.
1963년 대통령 표창,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