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주의진(洪州義陣)은 1895년 및 1906년 충청남도 홍주군 일대에서 결성된 반일 의병부대이다. 두 차례에 걸쳐 결성된 의병부대로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기에 전국적인 항일 의병운동을 선도해 간 대규모 무장투쟁이다. 의병장 김복한(金福漢)과 민종식(閔宗植)은 의진(義陣)을 결성함과 동시에 각국 공사(公使)에게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여 대내외에 주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독립전쟁의 성격을 공표하였다. 홍주의진의 활동은 1910년 국권 상실 이후 독립전쟁으로 계승되어 1910년대 국내외의 독립전쟁과 3 · 1운동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다.
제1차 홍주의진을 결성하려는 움직임은 1895년(고종 32) 4월부터 시작되었다. 안창식(安昌植) 등은 개화파들에 의한 갑오개혁을 반역 행위로 인식하고, 보부상들을 동원하여 의병 봉기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8월 20일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군사를 모집하고 무기를 수집하는 등 의병을 일으키기 위한 준비작업에 들어갔다.
이런 활동은 11월 15일 단발령이 공포된 뒤, 더욱 구체화되었다. 안창식 등은 11월 18일 충청남도 청양군 화성(化城)에서 향회(鄕會)를 실시, 180여 명의 민병을 모집하였다. 지방 유생들이 민병을 이끌고 홍주관아(洪州官衙)에 집결하였고, 1895년 12월 3일 김복한을 창의대장(倡義大將)에 추대하여 홍주의진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홍주의진의 진용을 갖춘 지 하루만인 12월 4일 관찰사 이승우(李勝宇)의 배신으로 김복한 · 이설(李偰)을 비롯해 지도급 인사 23명이 구금되어, 제1차 홍주의진은 와해되었다. 23명 중 김복한, 이설, 홍건(洪楗), 안병찬(安炳瓚), 송병직(宋秉稷), 이상린(李相麟) 등 6명[일명 ‘홍주6의사(洪州六義士)’]은 서울로 압송되어 1896년(고종 33) 2월 23일 실형을 선고받았다.
1905년(고종 42)에 제2차 한일협약[일명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홍주에서는 제2차 홍주의진이 결성되었다. 우선 제1차 홍주의진의 의병장이었던 김복한 및 이설은 소(疏)를 올려 나라의 제도와 문물을 바로잡고 일제 침략세력과 개화파 관리들을 물리칠 것을 주청하였다.
아울러 ‘5적의 목을 베어 사방의 의혹을 풀어 주고 만고(萬古)의 강상(綱常)을 붙잡아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들은 곧 체포되어 12월 31일 석방되었는데, 고향에 돌아오자마자 안병찬 등에 의병을 일으킬 것을 권유하고, 전(前) 참판 민종식에게도 의병에 동참할 것을 권유하였다.
제1차 홍주의진에 참여했던 안병찬 · 채광묵(蔡光默) · 박창로(朴昌魯) · 이세영(李世永) 등은 제2차 한일협약의 강제 체결 소식을 접하고, 의병운동을 통해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정산(定山: 지금의 충청남도 청양 지역)에 거주하는 민종식을 총수(總帥)로 추대하였는데, 민종식은 이를 기꺼이 수락한 뒤 논밭을 팔아 군자금으로 제공하였다.
이들은 정산군 천장리(天庄里)를 근거지로 삼고 의진을 편제하였다. 주요 인물은 안병찬, 채광묵, 박창로, 이용규(李容珪), 홍순대(洪淳大), 박윤식(朴潤植), 정재호(鄭在鎬), 이만직(李晩稙), 성재한(成載翰) 등이었다.
1906년(고종 43) 3월 14일 광수(光水: 지금의 충청남도 예산군 광시면)에서 대장단(大將壇)을 세워 천제(天祭)를 올리고 제2차 홍주의진의 결성을 공식 선언하였다. 이들은 홍주성을 점령하는 등 제1차 홍주의진과는 달리 각지에서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고, 5월 31일 새벽 4시경 홍주성이 일본군의 총공격에 의해 점령될 때까지 활약하였다.
5월 31일 홍주성 전투에서 일본군은 10여 명이 사살된 반면 홍주의진은 참모장 채광묵 부자를 비롯해 성재한, 전태진(田泰鎭), 서기환(徐基煥), 전경호(田慶鎬), 정재충(鄭在忠) 등 300여 명 이상이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 양민들도 다수가 희생당하였다. 또한, 145명이 붙잡혔으며, 그중 김상덕(金商德) 등 79명이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들은 일본군 사령부에서 심문을 받았는데, 윤석봉(尹錫鳳) 등 70명은 7월에 석방되었다.
유준근(柳濬根), 최상집(崔相集), 이상구(李相龜), 안항식(安恒植), 남규진(南奎鎭), 신보균(申輔均), 이칙(李侙), 문석환(文奭煥), 신현두(申鉉斗) 등 9명[일명 '홍주9의사(洪州九義士)']은 태인의진(泰仁義陣)의 의병장으로 체포된 최익현(崔益鉉)과 함께 대마도(對馬島)로 유배되었다.
이세영은 6월에 붙잡혀 종신유배형을 선고받고 황해도 황주(黃州)의 철도(鐵島)에 유배되었다. 홍주성 전투에서 패퇴한 민종식은 성을 빠져나와 이남규(李南珪) 등과 재기를 시도하다, 11월 붙잡혀 1907년(순종 원년) 7월 교수형을 선고받았다가 12월 특사로 석방되었다.
제1차 홍주의진은 안창식, 안병찬, 박창로, 이세영, 이봉학(李鳳學) 등 소론(少論) 계열의 지방 유생들과 김복한, 이설 등 노론(老論) 계열의 전직 고관들이 힘을 합쳐 조직한 의병부대였다.
김복한은 12월 3일 홍주의진의 의병장으로 추대된 뒤, 관찰사 이승우의 참여를 권유하고, 송병직 · 채광묵 · 이창서(李彰緖) 등을 북면과 남면으로, 이세영 · 이봉학 · 이병승(李秉承)을 공주 지방 소모관(召募官)으로 파견하였다. 또한, 조의현(趙儀顯) · 박창로 · 정제기(鄭濟驥)에게는 임존산성(任存山城)을 고치도록 명령하였다.
한편, 청양군수 정인희(鄭寅羲)는 청양에 별도로 창의소(倡義所)를 설치하고 홍주의진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였다. 그러나 다음날인 12월 4일 이승우의 배신으로 김복한 등 지도급 인사 대부분이 체포되어 와해되었다. 그러나 홍주 지역의 유림은 오랫동안 준비했던 의병투쟁을 포기하지 않았다.
우선 이근주(李根周)는 서산 · 태안 방면에서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전(前) 수사(水使) 조의현(趙儀顯)을 찾아 청양으로 가서 다시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12월 6일 청양군수 정인희는 이세영 · 김정하(金正河) · 이병승 등과 정산읍에 진을 치고, 12월 7일 공주를 향하여 진격하여 정산의 철마정(鐵馬汀) 일대에서 공주부(公州府)의 구완희(具完喜) 부대와 전투를 벌였다.
이세영은 1896년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 후 남포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황재현(黃載顯), 이관(李寬), 김홍제(金弘濟) 등이 동참하였다. 이 거의(擧義) 역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으나, 홍주 지역 유림의 끈질긴 항쟁의 모습을 유감없이 보여준 일이었다.
제2차 홍주의진은 1906년 3월 15일 홍주의 동문 밖 하우령(夏牛嶺)[일명 하고개]에 진을 치고 홍주성 공격을 감행하였다. 관군의 저항에 군대를 돌렸다가 공주를 공격하고자 3월 16일 화성의 합천 일대로 진을 옮겼다. 그러나 다음날 새벽, 추격해 온 관군과 일본군의 기습으로 안병찬 · 박창로 등 20여 명의 의병들이 체포되었다. 의병장 민종식은 보령군 청라면으로 피해 재기를 도모하였다.
1906년 5월 9일 홍산(洪山: 지금의 충청남도 부여군)의 지티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는데, 이용규가 전주 · 무주 · 여산 · 서천 · 남포 등지에서 모집한 1,000여 명의 의병이 중심이 되었다. 이때 민종식은 의병장에 재추대되었다.
재결성된 홍주의진은 홍산 · 남포 · 광천 등지를 점령하고, 5월 19일 홍주로 진격하여 홍주성을 점령하였다. 신보균 · 이칙 · 김상덕 · 윤석봉 · 유호근(柳浩根) · 문석환 등 각지 인사들도 합류하였으며, 홍주의진은 천제를 지내고 진용을 재정비하였다.
홍주성에서 크게 패한 일본군은 공주 병력을 지원받아 다음날인 5월 20일부터 홍주성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홍주의진은 이를 다시 격퇴시켰다.
5월 30일 일본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 사령관 하세가와[長谷川]는 일본군의 증파를 지시하여 보병 제60연대의 대대장 다나카[田中] 소좌 밑의 보병 2개 중대와 기병 반개 소대, 그리고 전주수비대 보병 1개 소대 병력으로 홍주성을 포위하여 공격하였다.
홍주의진이 와해된 후, 1906년 10월 예산의 한곡(閒谷)에 있는 이남규의 집에서 이남규, 이용규, 곽한일(郭漢一), 박윤식, 김덕진(金德鎭), 이석락(李錫樂) 등이 모였다. 11월 20일 민종식을 다시 대장으로 추대하고 예산을 공격하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일진회원(一進會員)의 밀고로 습격을 당해 일동이 체포되었고, 곽한일 · 박윤식 · 정재호 · 황영수(黃英秀) · 박두표(朴斗杓) 등은 종신유배형을 받고 전라남도 지도(智島)로 귀양을 갔다.
한편, 우군관(右軍官) 홍순대는 1906년 11월 초 부여군 은산면에서 의병 80여 명을 규합, 재기를 시도하였다.
일제는 홍주의진이 재기를 반복하고 있는 상황에 주목하면서 이 지역의 주요 인물들에 대한 감시와 학대를 강화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이남규를 살해한 일이었다. 1907년 9월 일본 기마대 100여 명은 이남규 · 이충구(李忠求) 부자를 붙잡아 가던 중, 귀순할 것을 강요하다 이들이 거절하자 온양의 평촌(坪村)에서 이들을 살해하였다. 같은 해 11월에는 김복한이 의병을 일으킬 것을 모의했다 하여 구속하고 악형(惡刑)을 가하기도 하였다.
홍주의진은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기에 전국적인 항일 의병운동을 선도해 간 대규모 무장투쟁이었다. 아울러 의병장 김복한과 민종식은 의진을 결성함과 동시에 각국 공사에게도 독립청원서를 제출하여 대내외에 주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독립전쟁의 성격을 드러내었다.
특히 다른 의진에 비해 유림이 지도급 인사로 두드러진 활동을 펼쳤으며, 의진의 조직에서 향토성과 학통성이 특징적으로 드러난다. 홍주의진 투쟁은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독립전쟁으로 계승되어 1910년대 국내외의 독립전쟁과 3 · 1운동에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다.
예를 들어 홍주의진에 참여했던 김복한, 김덕진, 유준근 등은 1919년에 보수 유림이 파리평화회의에 제출한 독립청원서, 즉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서명하였고, 이용규는 1910년대에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