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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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거란 유민들이 고려에 와서 함께 모여 살았던 생활구역.
거란장 (契丹場)
고려시대 거란 유민들이 고려에 와서 함께 모여 살았던 생활구역.
고려후기 이장대의 난과 관련된 무신. 반란자.
김례 (金禮)
고려후기 이장대의 난과 관련된 무신. 반란자.
강조는 고려 전기에 서북면도순검사, 중대사, 이부상서·참지정사, 행영도통사 등을 역임한 권신이다. 목종 때 서북면도순검사가 되었는데 당시 목종의 명을 받아 우여곡절 끝에 개경으로 진격하여 김치양 세력을 제거하고 현종을 왕위에 옹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이후 목종을 시해하여 권력을 장악했는데, 거란이 이를 구실로 1010년(현종 1) 침략하자 서북면 행영도통사가 되어 통주 삼수채에서 거란군과 싸워 몇 차례 승리했으나 이내 방심하다가 거란군에게 사로잡혔다. 그러나 거란에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절의를 지키다가 살해당하였다.
강조 (康兆)
강조는 고려 전기에 서북면도순검사, 중대사, 이부상서·참지정사, 행영도통사 등을 역임한 권신이다. 목종 때 서북면도순검사가 되었는데 당시 목종의 명을 받아 우여곡절 끝에 개경으로 진격하여 김치양 세력을 제거하고 현종을 왕위에 옹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이후 목종을 시해하여 권력을 장악했는데, 거란이 이를 구실로 1010년(현종 1) 침략하자 서북면 행영도통사가 되어 통주 삼수채에서 거란군과 싸워 몇 차례 승리했으나 이내 방심하다가 거란군에게 사로잡혔다. 그러나 거란에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절의를 지키다가 살해당하였다.
1217년(고종 4) 명주(溟州 : 지금의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에서 고려군과 거란 유민 사이에 벌어졌던 전투.
명주전투 (溟州戰鬪)
1217년(고종 4) 명주(溟州 : 지금의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에서 고려군과 거란 유민 사이에 벌어졌던 전투.
각장(榷場)은 고려시대 고려와 거란·여진족 등 북방 민족 사이의 교역을 위해 설치된 무역장이다. 각장은 호시의 일종이다. 고려와 거란 사이의 각장은 1005년(목종 8) 거란에 의해 보주(保州)에 설치된 것이 그 최초의 일로, 각장 개설은 비록 경제적 무역이 그 근본 목적이었다고 하더라도, 고려와 여진에 대한 정치·외교적 압력을 지속적으로 가하기 위한 목적도 지니고 있었다. 고려와 여진 사이의 각장은 서북면으로는 예종 때 의주·정주(靜州)에, 동북면으로는 고려의 정주(定州)와 여진의 청주(靑州)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각장 (榷場)
각장(榷場)은 고려시대 고려와 거란·여진족 등 북방 민족 사이의 교역을 위해 설치된 무역장이다. 각장은 호시의 일종이다. 고려와 거란 사이의 각장은 1005년(목종 8) 거란에 의해 보주(保州)에 설치된 것이 그 최초의 일로, 각장 개설은 비록 경제적 무역이 그 근본 목적이었다고 하더라도, 고려와 여진에 대한 정치·외교적 압력을 지속적으로 가하기 위한 목적도 지니고 있었다. 고려와 여진 사이의 각장은 서북면으로는 예종 때 의주·정주(靜州)에, 동북면으로는 고려의 정주(定州)와 여진의 청주(靑州)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개평전투는 1216년(고종 3)에 고려군이 거란군과 개평역(開平驛: 현 평안북도 영변)에서 벌인 전투이다. 이때의 거란군은 1216년(고종 3)에 몽골군과 한 싸움에서 패해 새로운 생활 근거지를 찾기 위해 고려로 침입을 감행한 거란 유종(契丹遺種)의 군대였다. 개평역은 북계(北界) 연주(延州: 현 평안북도 영변) 소속의 역이었다. 이 전투에서 크게 활약한 인물이 김취려(金就礪)였고, 이 전투에서 고려군이 승리하면서 거란군의 기세를 크게 꺾었다.
개평전투 (開平戰鬪)
개평전투는 1216년(고종 3)에 고려군이 거란군과 개평역(開平驛: 현 평안북도 영변)에서 벌인 전투이다. 이때의 거란군은 1216년(고종 3)에 몽골군과 한 싸움에서 패해 새로운 생활 근거지를 찾기 위해 고려로 침입을 감행한 거란 유종(契丹遺種)의 군대였다. 개평역은 북계(北界) 연주(延州: 현 평안북도 영변) 소속의 역이었다. 이 전투에서 크게 활약한 인물이 김취려(金就礪)였고, 이 전투에서 고려군이 승리하면서 거란군의 기세를 크게 꺾었다.
고려전기 삼한후벽상공신에 책록된 공신.
박섬 (朴暹)
고려전기 삼한후벽상공신에 책록된 공신.
고려 전기에, 내사시랑평장사 상주국, 검교태위 문하시중 등을 역임한 문신.
박성걸 (朴成傑)
고려 전기에, 내사시랑평장사 상주국, 검교태위 문하시중 등을 역임한 문신.
고려 후기에, 지문하성사, 이부상서, 참지정사 등을 역임한 문신.
공천원 (貢天源)
고려 후기에, 지문하성사, 이부상서, 참지정사 등을 역임한 문신.
동주전투는 1218년(고종 5) 동주(洞州, 현 황해도 서흥)에서 고려군과 거란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이때의 거란군은 1216년(고종 3) 몽골군과의 싸움에서 패해 새로운 생활 근거지를 찾기 위해 고려로 침입을 감행한, 유종(遺種)의 군대였다. 동주는 고려의 수도인 개경과 가까운 거리였기에 군사 전략에서 중요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동주전투의 승리는 고려군과 거란군 전쟁의 중요한 분수령이라 할 수 있고, 그 결과 거란군은 최후의 보루인 강동성(江東城)까지 퇴각하게 되었다.
동주전투 (洞州戰鬪)
동주전투는 1218년(고종 5) 동주(洞州, 현 황해도 서흥)에서 고려군과 거란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이때의 거란군은 1216년(고종 3) 몽골군과의 싸움에서 패해 새로운 생활 근거지를 찾기 위해 고려로 침입을 감행한, 유종(遺種)의 군대였다. 동주는 고려의 수도인 개경과 가까운 거리였기에 군사 전략에서 중요한 지역이었다. 따라서 동주전투의 승리는 고려군과 거란군 전쟁의 중요한 분수령이라 할 수 있고, 그 결과 거란군은 최후의 보루인 강동성(江東城)까지 퇴각하게 되었다.
고려 전기에, 거란의 침입으로부터 대항하다 전사한 무신·공신.
김숙흥 (金叔興)
고려 전기에, 거란의 침입으로부터 대항하다 전사한 무신·공신.
고려전기 공관어사 지도성사, 시중, 태사개국광익공 등을 역임한 문신.
박양유 (朴良柔)
고려전기 공관어사 지도성사, 시중, 태사개국광익공 등을 역임한 문신.
고려 전기에, 급사중, 어사대부, 상서우복야 등을 역임한 문신.
김양지 (金良贄)
고려 전기에, 급사중, 어사대부, 상서우복야 등을 역임한 문신.
고려 전기에, 한림학사승지,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등을 역임한 문신.
박유인 (朴有仁)
고려 전기에, 한림학사승지, 상서좌복야 참지정사 등을 역임한 문신.
고려전기 김치양의 난과 관련된 무신.
김연경 (金延慶)
고려전기 김치양의 난과 관련된 무신.
강감찬은 서북면행영도통사, 상원수대장군, 문하시중 등을 역임한 고려시대 전기의 문신이다. 948년(정종 3)에 태어나 1031년(현종 22)에 사망했다. 1010년(현종 1) 요(遼)나라가 서경을 침공하자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했고, 1018년(현종 9) 요나라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자 상원수대장군으로서 귀주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귀주대첩이라 불리는 이 큰 승리 이후 요나라와 평화적인 외교관계가 형성된다. 고려의 국방을 튼튼히 하고 외교 관계에서 큰 공을 세운 인물로 평가된다.
강감찬 (姜邯贊)
강감찬은 서북면행영도통사, 상원수대장군, 문하시중 등을 역임한 고려시대 전기의 문신이다. 948년(정종 3)에 태어나 1031년(현종 22)에 사망했다. 1010년(현종 1) 요(遼)나라가 서경을 침공하자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했고, 1018년(현종 9) 요나라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자 상원수대장군으로서 귀주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귀주대첩이라 불리는 이 큰 승리 이후 요나라와 평화적인 외교관계가 형성된다. 고려의 국방을 튼튼히 하고 외교 관계에서 큰 공을 세운 인물로 평가된다.
강동성전투는 1218년(고종 5) 8월부터 1219년(고종 6) 정월에 걸쳐 강동성(江東城)에 웅거한 거란유종(契丹遺種)을 섬멸한 전투이다. 거란유종의 침입으로 고려는 북부 지역으로부터 중부 지역까지 피해가 매우 컸다. 하지만 고려의 적극적인 대처와 몽골의 참전으로 이들 잔여 세력들은 퇴각로가 차단된 가운데 강동성으로 집결하게 되었고, 여기서 마침내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강동성전투에서 고려와 몽골의 첫 접촉이 이루어졌고, ‘형제맹약(兄弟盟約)’이 맺어지기도 하였다.
강동성전투 (江東城戰鬪)
강동성전투는 1218년(고종 5) 8월부터 1219년(고종 6) 정월에 걸쳐 강동성(江東城)에 웅거한 거란유종(契丹遺種)을 섬멸한 전투이다. 거란유종의 침입으로 고려는 북부 지역으로부터 중부 지역까지 피해가 매우 컸다. 하지만 고려의 적극적인 대처와 몽골의 참전으로 이들 잔여 세력들은 퇴각로가 차단된 가운데 강동성으로 집결하게 되었고, 여기서 마침내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강동성전투에서 고려와 몽골의 첫 접촉이 이루어졌고, ‘형제맹약(兄弟盟約)’이 맺어지기도 하였다.
고려 후기에, 고애사, 좌간의대부 중군병마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김온주 (金薀珠)
고려 후기에, 고애사, 좌간의대부 중군병마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강동육주는 고려시대에 서북면 지역에 시행했던 제도이다. 흥화·용주·통주·철주·구주·곽주 등을 말한다. 고려가 건국될 당시 서북면의 압록강 유역에 여진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993년 고려에 침입한 거란은 고려왕의 입조(入朝)와 거란의 연호 사용을 조건으로 철수하였다. 고려는 압록강 동쪽의 여진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의 점유권을 인정받았다. 이후 고려는 여진 부락을 소탕하고 6개 고을을 설치하였다. 거란은 이곳의 반환을 요구하며 두 차례 침략하였으나 고려는 양규와 강감찬의 활약으로 북방 영토를 지켰다.
강동육주 (江東六州)
강동육주는 고려시대에 서북면 지역에 시행했던 제도이다. 흥화·용주·통주·철주·구주·곽주 등을 말한다. 고려가 건국될 당시 서북면의 압록강 유역에 여진족이 거주하고 있었다. 993년 고려에 침입한 거란은 고려왕의 입조(入朝)와 거란의 연호 사용을 조건으로 철수하였다. 고려는 압록강 동쪽의 여진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의 점유권을 인정받았다. 이후 고려는 여진 부락을 소탕하고 6개 고을을 설치하였다. 거란은 이곳의 반환을 요구하며 두 차례 침략하였으나 고려는 양규와 강감찬의 활약으로 북방 영토를 지켰다.
고려전기 시어사, 판관, 예빈경 좌간의대부 등을 역임한 관리.
박종검 (朴從儉)
고려전기 시어사, 판관, 예빈경 좌간의대부 등을 역임한 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