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거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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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는 698~926년, 한반도 북부에서 중국 동북 랴오닝성 ‧ 지린성 ‧ 헤이룽장성과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걸쳐 존속하며 통일신라와 함께 남북국을 이루었던 고대국가이다. 대조영이 698년에 건국하였고, 초기 국명은 진국이다. 건국 초에는 신라와 교류하며 대아찬 직을 받았고, 이후 신라도를 설치하였다. 713년에 당나라에서 발해군왕을 받은 뒤 국명을 발해로 변경하였다. 제3대 문왕 대에 황제국 체제를 갖추었고, 9세기에는 해동성국으로 불렸다. 925년 12월에 거란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고 926년 초에 멸망하였다.
발해 (渤海)
발해는 698~926년, 한반도 북부에서 중국 동북 랴오닝성 ‧ 지린성 ‧ 헤이룽장성과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 걸쳐 존속하며 통일신라와 함께 남북국을 이루었던 고대국가이다. 대조영이 698년에 건국하였고, 초기 국명은 진국이다. 건국 초에는 신라와 교류하며 대아찬 직을 받았고, 이후 신라도를 설치하였다. 713년에 당나라에서 발해군왕을 받은 뒤 국명을 발해로 변경하였다. 제3대 문왕 대에 황제국 체제를 갖추었고, 9세기에는 해동성국으로 불렸다. 925년 12월에 거란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고 926년 초에 멸망하였다.
고려 태조 때 거란에서 보내온 낙타 50필을 만부교 아래에 매어놓아 굶어 죽게 한 사건.
만부교사건 (萬夫橋事件)
고려 태조 때 거란에서 보내온 낙타 50필을 만부교 아래에 매어놓아 굶어 죽게 한 사건.
강감찬은 서북면행영도통사, 상원수대장군, 문하시중 등을 역임한 고려시대 전기의 문신이다. 948년(정종 3)에 태어나 1031년(현종 22)에 사망했다. 1010년(현종 1) 요(遼)나라가 서경을 침공하자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했고, 1018년(현종 9) 요나라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자 상원수대장군으로서 귀주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귀주대첩이라 불리는 이 큰 승리 이후 요나라와 평화적인 외교관계가 형성된다. 고려의 국방을 튼튼히 하고 외교 관계에서 큰 공을 세운 인물로 평가된다.
강감찬 (姜邯贊)
강감찬은 서북면행영도통사, 상원수대장군, 문하시중 등을 역임한 고려시대 전기의 문신이다. 948년(정종 3)에 태어나 1031년(현종 22)에 사망했다. 1010년(현종 1) 요(遼)나라가 서경을 침공하자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했고, 1018년(현종 9) 요나라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자 상원수대장군으로서 귀주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귀주대첩이라 불리는 이 큰 승리 이후 요나라와 평화적인 외교관계가 형성된다. 고려의 국방을 튼튼히 하고 외교 관계에서 큰 공을 세운 인물로 평가된다.
고려시대 농민으로 편성된 예비군사조직.
광군 (光軍)
고려시대 농민으로 편성된 예비군사조직.
고려 전기 거란침입 때 흥화진(興化鎭, 평안북도 의주)에서 벌어진 전투.
흥화진전투 (興化鎭戰鬪)
고려 전기 거란침입 때 흥화진(興化鎭, 평안북도 의주)에서 벌어진 전투.
고려전기 형부낭중, 도순검사 등을 역임한 무신.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
양규 (楊規)
고려전기 형부낭중, 도순검사 등을 역임한 무신.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
『칠대실록(七代實錄)』은 고려 전기 태조에서 목종에 이르는 7대에 걸친 역사 기록이다. 원래 실록이 있었으나 현종 대 거란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져 다시 편찬하였는데, 이를 『칠대사적(七代事跡)』이라 하였다. 편찬에 참여한 자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나면서 황주량(黃周亮)에 의해 주도되어 황주량의 저서처럼 되어 있다.
칠대실록 (七代實錄)
『칠대실록(七代實錄)』은 고려 전기 태조에서 목종에 이르는 7대에 걸친 역사 기록이다. 원래 실록이 있었으나 현종 대 거란의 침입으로 불타 없어져 다시 편찬하였는데, 이를 『칠대사적(七代事跡)』이라 하였다. 편찬에 참여한 자들이 대부분 세상을 떠나면서 황주량(黃周亮)에 의해 주도되어 황주량의 저서처럼 되어 있다.
고려후기 거란유종의 침입과 관련된 기녀.
자운선 (紫雲仙)
고려후기 거란유종의 침입과 관련된 기녀.
구주대첩(龜州大捷)은 1019년(현종 10) 고려에 침입한 거란군을 구주에서 크게 격파한 전투이다. 구주는 993년(성종 12) 10월 거란의 제1차 침입 후 체결된 강화조약에서 서희(徐熙)의 외교적인 수완으로 고려의 점유를 인정받은 청천강 이북에서 압록강 입구까지의 강동지방에 설치된 행정 구역인 강동육주의 하나였다. 1018년(현종 9) 12월 소배압(蕭排押)을 총지휘관으로 한 거란의 제3차 침입 때, 10만의 거란대군을 상원수 강감찬(姜邯贊) 등이 구주에서 크게 무찔러 거란군의 전의를 완전히 잃게 한 전쟁을 말한다.
구주대첩 (龜州大捷)
구주대첩(龜州大捷)은 1019년(현종 10) 고려에 침입한 거란군을 구주에서 크게 격파한 전투이다. 구주는 993년(성종 12) 10월 거란의 제1차 침입 후 체결된 강화조약에서 서희(徐熙)의 외교적인 수완으로 고려의 점유를 인정받은 청천강 이북에서 압록강 입구까지의 강동지방에 설치된 행정 구역인 강동육주의 하나였다. 1018년(현종 9) 12월 소배압(蕭排押)을 총지휘관으로 한 거란의 제3차 침입 때, 10만의 거란대군을 상원수 강감찬(姜邯贊) 등이 구주에서 크게 무찔러 거란군의 전의를 완전히 잃게 한 전쟁을 말한다.
강동성전투는 1218년(고종 5) 8월부터 1219년(고종 6) 정월에 걸쳐 강동성(江東城)에 웅거한 거란유종(契丹遺種)을 섬멸한 전투이다. 거란유종의 침입으로 고려는 북부 지역으로부터 중부 지역까지 피해가 매우 컸다. 하지만 고려의 적극적인 대처와 몽골의 참전으로 이들 잔여 세력들은 퇴각로가 차단된 가운데 강동성으로 집결하게 되었고, 여기서 마침내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강동성전투에서 고려와 몽골의 첫 접촉이 이루어졌고, ‘형제맹약(兄弟盟約)’이 맺어지기도 하였다.
강동성전투 (江東城戰鬪)
강동성전투는 1218년(고종 5) 8월부터 1219년(고종 6) 정월에 걸쳐 강동성(江東城)에 웅거한 거란유종(契丹遺種)을 섬멸한 전투이다. 거란유종의 침입으로 고려는 북부 지역으로부터 중부 지역까지 피해가 매우 컸다. 하지만 고려의 적극적인 대처와 몽골의 참전으로 이들 잔여 세력들은 퇴각로가 차단된 가운데 강동성으로 집결하게 되었고, 여기서 마침내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강동성전투에서 고려와 몽골의 첫 접촉이 이루어졌고, ‘형제맹약(兄弟盟約)’이 맺어지기도 하였다.
각장(榷場)은 고려시대 고려와 거란·여진족 등 북방 민족 사이의 교역을 위해 설치된 무역장이다. 각장은 호시의 일종이다. 고려와 거란 사이의 각장은 1005년(목종 8) 거란에 의해 보주(保州)에 설치된 것이 그 최초의 일로, 각장 개설은 비록 경제적 무역이 그 근본 목적이었다고 하더라도, 고려와 여진에 대한 정치·외교적 압력을 지속적으로 가하기 위한 목적도 지니고 있었다. 고려와 여진 사이의 각장은 서북면으로는 예종 때 의주·정주(靜州)에, 동북면으로는 고려의 정주(定州)와 여진의 청주(靑州)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각장 (榷場)
각장(榷場)은 고려시대 고려와 거란·여진족 등 북방 민족 사이의 교역을 위해 설치된 무역장이다. 각장은 호시의 일종이다. 고려와 거란 사이의 각장은 1005년(목종 8) 거란에 의해 보주(保州)에 설치된 것이 그 최초의 일로, 각장 개설은 비록 경제적 무역이 그 근본 목적이었다고 하더라도, 고려와 여진에 대한 정치·외교적 압력을 지속적으로 가하기 위한 목적도 지니고 있었다. 고려와 여진 사이의 각장은 서북면으로는 예종 때 의주·정주(靜州)에, 동북면으로는 고려의 정주(定州)와 여진의 청주(靑州)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고려 후기에, 정당문학, 수태위 동중서문하시랑평장사 수국사 등을 역임한 문신.
조충 (趙冲)
고려 후기에, 정당문학, 수태위 동중서문하시랑평장사 수국사 등을 역임한 문신.
최광수는 고려 후기 서경에서 고구려부흥운동을 일으켰던 군졸이다. 1217년(고종 4) 거란유종이 고려를 침공하였을 때, 서경에서 구고려부흥병마사·금오위섭상장군이라 자칭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최광수의 고구려부흥운동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무신정권에 반기를 든 지역 사회의 대표적인 저항으로 이해된다.
최광수 (崔光秀)
최광수는 고려 후기 서경에서 고구려부흥운동을 일으켰던 군졸이다. 1217년(고종 4) 거란유종이 고려를 침공하였을 때, 서경에서 구고려부흥병마사·금오위섭상장군이라 자칭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최광수의 고구려부흥운동은 비록 실패하였지만, 무신정권에 반기를 든 지역 사회의 대표적인 저항으로 이해된다.
내원성(來遠城)은 991년(성종 10)경 거란(契丹)이 압록강 가에 쌓은 성곽이다. 내원성은 압록강의 검동도(黔同島)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려와 거란이 만나는 최전방에 위치한 요충지이다. 이 성은 고려와 거란 양국의 갈등이 고조될 때는 고려를 침입하기 위한 전진 기지 역할을 담당했으며, 평화 시기에는 양국의 문서를 주고받는 통로 역할을 담당하였다.
내원성 (來遠城)
내원성(來遠城)은 991년(성종 10)경 거란(契丹)이 압록강 가에 쌓은 성곽이다. 내원성은 압록강의 검동도(黔同島)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고려와 거란이 만나는 최전방에 위치한 요충지이다. 이 성은 고려와 거란 양국의 갈등이 고조될 때는 고려를 침입하기 위한 전진 기지 역할을 담당했으며, 평화 시기에는 양국의 문서를 주고받는 통로 역할을 담당하였다.
733년 발해가 이민족과 더불어 당군(唐軍)을 마도산(馬都山)에서 격파한 전투.
마도산전투 (馬都山戰鬪)
733년 발해가 이민족과 더불어 당군(唐軍)을 마도산(馬都山)에서 격파한 전투.
고려시대 거란 유민들이 고려에 와서 함께 모여 살았던 생활구역.
거란장 (契丹場)
고려시대 거란 유민들이 고려에 와서 함께 모여 살았던 생활구역.
통주전투는 1010년(현종 1) 통주에서 벌어진 고려와 거란의 전투이다. 거란은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공격하였는데, 흥화진에서 공격이 실패하자 통주로 군사를 옮겨 왔다. 이 전투는 통주성 밖에서 이루어진 삼수채전투와 성안에서 이루어진 통주성전투로 구분되는데, 11월 25일부터 12월 초까지 전개되었다. 삼수채전투에서는 고려 강조가 초반 우세로 자만한 틈을 타 기습한 거란에 패배하였으나, 통주성에서 거란군을 막아내 고려가 승리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로 강조의 패배 이후 개경까지 공격한 거란군의 후방 통로가 차단되었다.
통주전투 (通州戰鬪)
통주전투는 1010년(현종 1) 통주에서 벌어진 고려와 거란의 전투이다. 거란은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공격하였는데, 흥화진에서 공격이 실패하자 통주로 군사를 옮겨 왔다. 이 전투는 통주성 밖에서 이루어진 삼수채전투와 성안에서 이루어진 통주성전투로 구분되는데, 11월 25일부터 12월 초까지 전개되었다. 삼수채전투에서는 고려 강조가 초반 우세로 자만한 틈을 타 기습한 거란에 패배하였으나, 통주성에서 거란군을 막아내 고려가 승리하였다. 이 전투의 승리로 강조의 패배 이후 개경까지 공격한 거란군의 후방 통로가 차단되었다.
고려전기 김훈, 최질의 난 당시의 장수.
김훈 (金訓)
고려전기 김훈, 최질의 난 당시의 장수.
안융진(安戎鎭)은 고려 전기 973년(광종 24)에 북계 지역에 설치한 진(鎭)이다. 이후 1033년(덕종 2)과 1137년(인종 15)에 다시 축성되었다. 안융진성은 평안남도 문덕군 신리에 위치한 토성(土城)이다. 안융진은 993년(성종 12) 거란의 제1차 침입 시기에 주요 전장이 되었다. 안융진 전투에서 승리한 고려는 거란의 남하를 저지할 수 있었다. 이후 서희(徐熙)는 소손녕(蕭遜寧)과 강화 회담을 진행하여 강동 6주를 확보하였다.
안융진 (安戎鎭)
안융진(安戎鎭)은 고려 전기 973년(광종 24)에 북계 지역에 설치한 진(鎭)이다. 이후 1033년(덕종 2)과 1137년(인종 15)에 다시 축성되었다. 안융진성은 평안남도 문덕군 신리에 위치한 토성(土城)이다. 안융진은 993년(성종 12) 거란의 제1차 침입 시기에 주요 전장이 되었다. 안융진 전투에서 승리한 고려는 거란의 남하를 저지할 수 있었다. 이후 서희(徐熙)는 소손녕(蕭遜寧)과 강화 회담을 진행하여 강동 6주를 확보하였다.
고려후기 장군으로 강동성전투에에 참전한 관리. 무신.
이돈수 (李敦守)
고려후기 장군으로 강동성전투에에 참전한 관리. 무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