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서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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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강서당은 조선 후기 동강 이희정이 경상도 의성군 사곡면에 건립한 서당이다. 이황의 삼종손이자 직접 교육받았던 이희정이 건립했다고 전해지는 서당으로, 18세기 후반에 중수를 거쳤고, 개항기 이후 사설 학원으로 운영했으나, 일제강점기에 보통학교 교육의 시작과 함께 중단되었다. 1994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동강서당 (桐岡書堂)
동강서당은 조선 후기 동강 이희정이 경상도 의성군 사곡면에 건립한 서당이다. 이황의 삼종손이자 직접 교육받았던 이희정이 건립했다고 전해지는 서당으로, 18세기 후반에 중수를 거쳤고, 개항기 이후 사설 학원으로 운영했으나, 일제강점기에 보통학교 교육의 시작과 함께 중단되었다. 1994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통일신라시대의 군대.
적금서당 (赤衿誓幢)
통일신라시대의 군대.
「서당규칙」은 1918년 조선총독부에서 제정한 서당 교육을 통제하기 위한 법령이다. 서당을 공립학교 교육의 보충 수단으로 여겼던 일제강점자들은 서당의 지도 감독이라는 미명 아래 집요하게 서당 교육에 대한 통제와 탄압을 획책하였다. 1929년 6월 17일에는 조선총독부령으로 「서당규칙」을 개정하여 서당에 의한 민족 교육을 근본적으로 억압, 차단하였다.
서당규칙 (書堂規則)
「서당규칙」은 1918년 조선총독부에서 제정한 서당 교육을 통제하기 위한 법령이다. 서당을 공립학교 교육의 보충 수단으로 여겼던 일제강점자들은 서당의 지도 감독이라는 미명 아래 집요하게 서당 교육에 대한 통제와 탄압을 획책하였다. 1929년 6월 17일에는 조선총독부령으로 「서당규칙」을 개정하여 서당에 의한 민족 교육을 근본적으로 억압, 차단하였다.
1909년 한성에 설립되었던 초등과정의 학교.
가명학교 (加明學校)
1909년 한성에 설립되었던 초등과정의 학교.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황금서당 보기감을 역임한 장수.
김영윤 (金令胤)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황금서당 보기감을 역임한 장수.
대한제국기 때,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오적 처단을 상소하였고,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전달한 죄로 옥고를 치른 학자·독립운동가.
곽종석 (郭鍾錫)
대한제국기 때,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오적 처단을 상소하였고,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전달한 죄로 옥고를 치른 학자·독립운동가.
1896년 부산에 설립되었던 사립학교.
개성학교 (開成學校)
1896년 부산에 설립되었던 사립학교.
도생서원은 1843년 배삼익을 추모하기 위해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주진리에 건립한 서원이다. 1823년 배삼익을 제향하는 것에 대한 논의가 처음 있었고, 1830년에 도생서당을 중건하기로 했다. 이후 중건을 관리할 임원을 선정하고 단계적으로 서당 터와 건립에 필요한 재목 등을 구매하였다. 1832년부터 7년만에 주사를 건립하고, 1840년부터 3년 동안 당을 건립하였다. 그 뒤 재와 문루 등을 세웠으나 1868년에 훼철되었다.
도생서원 (道生書院)
도생서원은 1843년 배삼익을 추모하기 위해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주진리에 건립한 서원이다. 1823년 배삼익을 제향하는 것에 대한 논의가 처음 있었고, 1830년에 도생서당을 중건하기로 했다. 이후 중건을 관리할 임원을 선정하고 단계적으로 서당 터와 건립에 필요한 재목 등을 구매하였다. 1832년부터 7년만에 주사를 건립하고, 1840년부터 3년 동안 당을 건립하였다. 그 뒤 재와 문루 등을 세웠으나 1868년에 훼철되었다.
안동 병산서원은 1605년 유성룡을 추모하기 위해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에 설립한 서원이다. 병산서원의 전신은 풍악서당이었으며, 유성룡의 건의로 병산으로 옮겨 지으며 병산서당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었다가 1605년 병산서당을 중건하고 1614년 유성룡의 위패를 봉안하면서 서원으로의 위상을 갖추었다. 1863년 사액되었고, 서원훼철령에도 존속하였다.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안동 병산서원 (安東 屛山書院)
안동 병산서원은 1605년 유성룡을 추모하기 위해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에 설립한 서원이다. 병산서원의 전신은 풍악서당이었으며, 유성룡의 건의로 병산으로 옮겨 지으며 병산서당이라 하였다. 임진왜란 당시 소실되었다가 1605년 병산서당을 중건하고 1614년 유성룡의 위패를 봉안하면서 서원으로의 위상을 갖추었다. 1863년 사액되었고, 서원훼철령에도 존속하였다.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김홍도 필 『풍속도 화첩』은 조선 후기 화가 김홍도가 그린 풍속화 25점으로 구성된 화첩이다. 이 화첩 안에는 사농공상의 각 계층이 생업에 종사하는 장면을 중심으로, 놀이, 서당, 우물터, 혼례 등 일상의 다양한 모습이 담겨 있다. 조선인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으며, 풍자적이고 해학적인 정취를 더해 풍속화의 예술성을 한 단계 높인 것으로 평가된다.
김홍도 필 풍속도 화첩 (金弘道 筆 風俗圖 畵帖)
김홍도 필 『풍속도 화첩』은 조선 후기 화가 김홍도가 그린 풍속화 25점으로 구성된 화첩이다. 이 화첩 안에는 사농공상의 각 계층이 생업에 종사하는 장면을 중심으로, 놀이, 서당, 우물터, 혼례 등 일상의 다양한 모습이 담겨 있다. 조선인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으며, 풍자적이고 해학적인 정취를 더해 풍속화의 예술성을 한 단계 높인 것으로 평가된다.
신라시대의 군관직.
대관대감 (大官大監)
신라시대의 군관직.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사립 초등학교.
계성초등학교 (啓星初等學校)
서울특별시 서초구 반포동에 있는 사립 초등학교.
고려 후기에, 직제학, 개성윤, 예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김수 (金銖)
고려 후기에, 직제학, 개성윤, 예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고령지』는 1910년 계몽운동가 이두훈이 경상북도 고령군의 옛 읍지를 보충하여 편찬한 읍지이다. 1책 96장의 필사본이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도서이다. 원본은 고령군 내산서당에 있다. 원본은 수정하거나 추가한 흔적이 있으나, 본 읍지는 없다. 『경상도읍지』 유형을 따라 작성하였으며, 특히 연혁과 인물 선정에 힘을 기울였다.
고령지 (高靈誌)
『고령지』는 1910년 계몽운동가 이두훈이 경상북도 고령군의 옛 읍지를 보충하여 편찬한 읍지이다. 1책 96장의 필사본이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도서이다. 원본은 고령군 내산서당에 있다. 원본은 수정하거나 추가한 흔적이 있으나, 본 읍지는 없다. 『경상도읍지』 유형을 따라 작성하였으며, 특히 연혁과 인물 선정에 힘을 기울였다.
전라남도 곡성군 입면에 있는 조선후기 홑처마 팔작 기와지붕의 주택.
곡성 제호정고택 (谷城 霽湖亭古宅)
전라남도 곡성군 입면에 있는 조선후기 홑처마 팔작 기와지붕의 주택.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에서 일본에 파견된 사신.
설중업 (薛仲業)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에서 일본에 파견된 사신.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에 있는 조선후기 여강이씨 문중 관련 서당. 유교유적.
경주 양동마을 강학당 (慶州 良洞마을 講學堂)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에 있는 조선후기 여강이씨 문중 관련 서당. 유교유적.
전라남도 영암군 학산면에 있는 조선후기 H자형 팔작지붕 형태의 서당. 유교유적.
영암 집영재 (靈岩 集英齋)
전라남도 영암군 학산면에 있는 조선후기 H자형 팔작지붕 형태의 서당. 유교유적.
전라남도 목포시 상동에 있는 사립고등학교.
영흥고등학교 (永興高等學校)
전라남도 목포시 상동에 있는 사립고등학교.
이병헌은 일제강점기 「역사교리착종담」, 「오족당봉유교론」 등을 저술한 유학자이다. 1870년(고종 7)에 출생하여 1940년에 사망하였다. 호는 진암, 백운산인으로, 유교개혁사상가, 공교운동지도자, 금문경학자로 활동하였다. 공교가 보편성, 현실성, 진보성의 현대적 가치가 있음을 강조하고, 향교식 유교가 아닌 교회식 유교의 건설을 주장하였다. 교당을 지어 공자를 섬기고 성경을 번역하여 천하에 배포해야 한다는 등 구체적 포교 방법까지 제시하였다. 이병헌의 공교 운동은 유림들의 강경한 항의에 부딪혀 실패하였다. 1926년 이후로는 공교 사상의 경학적 기초를 정비하는 데 힘썼다.
이병헌 (李炳憲)
이병헌은 일제강점기 「역사교리착종담」, 「오족당봉유교론」 등을 저술한 유학자이다. 1870년(고종 7)에 출생하여 1940년에 사망하였다. 호는 진암, 백운산인으로, 유교개혁사상가, 공교운동지도자, 금문경학자로 활동하였다. 공교가 보편성, 현실성, 진보성의 현대적 가치가 있음을 강조하고, 향교식 유교가 아닌 교회식 유교의 건설을 주장하였다. 교당을 지어 공자를 섬기고 성경을 번역하여 천하에 배포해야 한다는 등 구체적 포교 방법까지 제시하였다. 이병헌의 공교 운동은 유림들의 강경한 항의에 부딪혀 실패하였다. 1926년 이후로는 공교 사상의 경학적 기초를 정비하는 데 힘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