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서울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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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록은 1760년부터 1910년까지 국왕의 동정과 국정에 관한 제반 사항을 수록한 정무 일지이다. 필사본 총 2,329책으로 1973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정조 자신이 반성하는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작성하기 시작했다. 1783년(정조 7)부터 국왕의 개인 일기에서 공식적인 국정 일기로 전환되었다. 이 책에는 신하들의 소차, 임금의 윤음, 일반 정사 등의 내용이 들어 있다. 정부 편찬 서적, 죄수 심리, 진휼 등에 대한 내용도 있다. 이 책은 임금이 국정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으며 실록 편찬에도 이용되었다.
일성록 (日省錄)
일성록은 1760년부터 1910년까지 국왕의 동정과 국정에 관한 제반 사항을 수록한 정무 일지이다. 필사본 총 2,329책으로 1973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정조 자신이 반성하는 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작성하기 시작했다. 1783년(정조 7)부터 국왕의 개인 일기에서 공식적인 국정 일기로 전환되었다. 이 책에는 신하들의 소차, 임금의 윤음, 일반 정사 등의 내용이 들어 있다. 정부 편찬 서적, 죄수 심리, 진휼 등에 대한 내용도 있다. 이 책은 임금이 국정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으며 실록 편찬에도 이용되었다.
대학로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5가 사거리에서 혜화동 로터리에 이르는 문화예술의 거리이다. 1926년에 경성제국대학의 법문학부와 의학부가 건립되면서 조성되었다.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로 개편되면서 중심 캠퍼스이자 대학생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975년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이후에 문화예술 관련 기관과 단체 및 공연장이 밀집해 있다. 실내외 공연시설에서 연극·영화·음악·뮤지컬 등의 다양한 공연 활동이 이루어지는 종합적 문화예술의 거리가 되었다. 1995년 이후 ‘리틀 마닐라’라고 불리는 필리핀인들의 시장이 열리는 등 초국가적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대학로 (大學路)
대학로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5가 사거리에서 혜화동 로터리에 이르는 문화예술의 거리이다. 1926년에 경성제국대학의 법문학부와 의학부가 건립되면서 조성되었다.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로 개편되면서 중심 캠퍼스이자 대학생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1975년 서울대학교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이후에 문화예술 관련 기관과 단체 및 공연장이 밀집해 있다. 실내외 공연시설에서 연극·영화·음악·뮤지컬 등의 다양한 공연 활동이 이루어지는 종합적 문화예술의 거리가 되었다. 1995년 이후 ‘리틀 마닐라’라고 불리는 필리핀인들의 시장이 열리는 등 초국가적 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김철준은 해방 이후 「한국고대사회 연구」, 「한국문화사론」, 「한국문화전통론」 등을 저술한 역사학자이다. 1923년에 태어나 1989년에 사망했다. 1948년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1952년 역사학회 창립에 동참하였다. 일본이 주장한 식민사학의 잔재를 청산하고, 문헌 고증학의 방법론적 한계를 극복해 자주적이고 과학적인 새로운 학풍을 수립하고자 노력하였다. 한국학 발전과 문화재(현, 국가유산) 보호에도 노력을 기울여 한국사연구회와 국사편찬위원회, 문화재위원회(현, 문화유산위원회)의 위원을 역임하였다. 저서와 논문을 엮어서 『일계전집(一溪全集)』(4책)으로 간행하였다.
김철준 (金哲埈)
김철준은 해방 이후 「한국고대사회 연구」, 「한국문화사론」, 「한국문화전통론」 등을 저술한 역사학자이다. 1923년에 태어나 1989년에 사망했다. 1948년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1952년 역사학회 창립에 동참하였다. 일본이 주장한 식민사학의 잔재를 청산하고, 문헌 고증학의 방법론적 한계를 극복해 자주적이고 과학적인 새로운 학풍을 수립하고자 노력하였다. 한국학 발전과 문화재(현, 국가유산) 보호에도 노력을 기울여 한국사연구회와 국사편찬위원회, 문화재위원회(현, 문화유산위원회)의 위원을 역임하였다. 저서와 논문을 엮어서 『일계전집(一溪全集)』(4책)으로 간행하였다.
허웅은 해방 이후 『국어음운론』, 『우리 옛말본』, 『20세기 우리말의 형태론』 등을 저술한 학자이다. 1918년에 태어나 2004년에 사망하였으며 호는 눈뫼이다. 최현배 선생의 『우리말본』을 읽고 국어를 연구하기로 결심하였다. 해방 후에 부산대학교, 성균관대학교, 연세대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국어음운론』(1958)에서 국어의 음운론을 공시적·통시적 기술을 시도하였다. 『우리 옛말본』(1975)에서 15세기 국어의 형태론을 공시적으로 기술하였다. 『20세기 우리말의 형태론』(1995)에서 우리말 연구의 정통성을 이었다.
허웅 (許雄)
허웅은 해방 이후 『국어음운론』, 『우리 옛말본』, 『20세기 우리말의 형태론』 등을 저술한 학자이다. 1918년에 태어나 2004년에 사망하였으며 호는 눈뫼이다. 최현배 선생의 『우리말본』을 읽고 국어를 연구하기로 결심하였다. 해방 후에 부산대학교, 성균관대학교, 연세대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였다. 『국어음운론』(1958)에서 국어의 음운론을 공시적·통시적 기술을 시도하였다. 『우리 옛말본』(1975)에서 15세기 국어의 형태론을 공시적으로 기술하였다. 『20세기 우리말의 형태론』(1995)에서 우리말 연구의 정통성을 이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일제강점기 에 완공된 학교건물. 근대건물.
구 서울대학교 본관 (舊 서울大學校 本館)
서울특별시 종로구에 있는 일제강점기 에 완공된 학교건물. 근대건물.
해방 이후 『일반생물학』, 『한국의 자연 , 담수어편, 』 등을 저술한 학자. 생물학자.
최기철 (崔基哲)
해방 이후 『일반생물학』, 『한국의 자연 , 담수어편, 』 등을 저술한 학자. 생물학자.
1971년 11월 13일 서울대 제적생 4명과 사법연수원생 1명이 국가 전복을 위해 내란 음모를 모의했다고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사건.
서울대생 내란음모 사건 (서울大生 內亂陰謀 事件)
1971년 11월 13일 서울대 제적생 4명과 사법연수원생 1명이 국가 전복을 위해 내란 음모를 모의했다고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사건.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 한국음악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피아노연주자.
백낙호 (白樂皓)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교수, 한국음악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한 교육자. 피아노연주자.
향토개척단운동은 1961부터 1985년까지 ‘서울대학교 향토개척단’이 전개한 전국적 농촌활동이다. 1961년 7월 19일 공식 출범한 서울대학교 향토개척단은 주로 방학을 이용해 전국 각지로 내려가 다양한 농촌 조사, 계몽, 봉사, 지도 활동을 전개했다. 정부의 재건국민운동과 연결되어 1960년대 전반기에는 학생 운동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으나, 1960년대 중반 이후 정부의 견제를 받다가 1970년대 정부의 탄압과 통제 속에서 점차 힘을 잃었다.
향토개척단운동 (鄕土開拓團運動)
향토개척단운동은 1961부터 1985년까지 ‘서울대학교 향토개척단’이 전개한 전국적 농촌활동이다. 1961년 7월 19일 공식 출범한 서울대학교 향토개척단은 주로 방학을 이용해 전국 각지로 내려가 다양한 농촌 조사, 계몽, 봉사, 지도 활동을 전개했다. 정부의 재건국민운동과 연결되어 1960년대 전반기에는 학생 운동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으나, 1960년대 중반 이후 정부의 견제를 받다가 1970년대 정부의 탄압과 통제 속에서 점차 힘을 잃었다.
해방 이후 KBS교향악단, 서울시립교향악단 수석연주자로 활동한 음악인. 트럼본, 비올라연주자.
이재옥 (李在玉)
해방 이후 KBS교향악단, 서울시립교향악단 수석연주자로 활동한 음악인. 트럼본, 비올라연주자.
해방 이후 『생화학』, 『유기화학』 등을 저술한 학자. 생화학자.
이기영 (李基寧)
해방 이후 『생화학』, 『유기화학』 등을 저술한 학자. 생화학자.
동아문화연구소는 1961년 언어와 문학, 역사와 철학, 종교, 문화 등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기 위하여 설립된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산하 연구소이다. 서울대학교 내 한국학과 동아시아학 전공 분야 교수진과 대학원생들을 중심으로 연구 집담회를 비롯하여 다양하고 풍부한 학술 연구 및 교육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정기 학술지로 『동아문화』를 연 1~2회 발간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동아문화연구소 (서울大學校 東亞文化硏究所)
동아문화연구소는 1961년 언어와 문학, 역사와 철학, 종교, 문화 등을 중심으로 동아시아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기 위하여 설립된 서울대학교 인문학연구원 산하 연구소이다. 서울대학교 내 한국학과 동아시아학 전공 분야 교수진과 대학원생들을 중심으로 연구 집담회를 비롯하여 다양하고 풍부한 학술 연구 및 교육 활동을 펼치고 있다. 정기 학술지로 『동아문화』를 연 1~2회 발간하고 있다.
『고창군읍지』는 1899년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의 연혁, 인문지리, 행정 등을 수록하여 편찬한 읍지이다. 1책의 필사본이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도서이다. 채색 지도를 첨부하였다. 1895년 지방제도 개편 때 현에서 군으로 승격된 사실을 기록하는 등 19세기 후반까지의 지역 정보를 첨삭한 점이 눈에 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도서가 되면서 새롭게 조정된 40개의 항목에 따라 19세기 후반의 지역 정보를 자세하게 수록하였다.
고창군읍지 (高敞郡邑誌)
『고창군읍지』는 1899년 전북특별자치도 고창군의 연혁, 인문지리, 행정 등을 수록하여 편찬한 읍지이다. 1책의 필사본이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도서이다. 채색 지도를 첨부하였다. 1895년 지방제도 개편 때 현에서 군으로 승격된 사실을 기록하는 등 19세기 후반까지의 지역 정보를 첨삭한 점이 눈에 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도서가 되면서 새롭게 조정된 40개의 항목에 따라 19세기 후반의 지역 정보를 자세하게 수록하였다.
경성공업전문학교는 1916년 경성부 동숭동에 설립되었던 관립 공업 전문학교이다. 1915년 3월 「전문학교규칙」의 제정·공포에 따른 후속 조치로 설립되었다. 이를 위해 1916년 4월 1일 칙령 제80호 및 부령 제28호로 이루어진 전 8조의 「경성공업전문학교규정」이 발포되었다. 1922년 3월 「조선총독부제학교관제」에 따라 경성공업전문학교는 경성고등공업학교가 되었다. 경성고등공업학교는 1944년에 경성공업전문학교로 교명을 바꾸었고, 1946년 8월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관한법령」에 따라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흡수되었다.
경성공업전문학교 (京城工業專門學校)
경성공업전문학교는 1916년 경성부 동숭동에 설립되었던 관립 공업 전문학교이다. 1915년 3월 「전문학교규칙」의 제정·공포에 따른 후속 조치로 설립되었다. 이를 위해 1916년 4월 1일 칙령 제80호 및 부령 제28호로 이루어진 전 8조의 「경성공업전문학교규정」이 발포되었다. 1922년 3월 「조선총독부제학교관제」에 따라 경성공업전문학교는 경성고등공업학교가 되었다. 경성고등공업학교는 1944년에 경성공업전문학교로 교명을 바꾸었고, 1946년 8월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관한법령」에 따라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흡수되었다.
경성광산전문학교는 1939년 경성부 동숭동에 설립되었던 관립 전문학교이다. 전쟁에 필요한 광물자원을 원활히 보급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경성고등공업학교 광산과를 분리, 독립하여 경성광산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 채광학과와 야금학과, 광산기계학과 등 3개 학과를 설치하였으며, 수업연한은 3년이었다. 졸업생들은 전원 국영 광산의 간부로 우선 채용되었기 때문에, 취직이 어려웠던 전시체제 아래에서 최고의 입시 경쟁률을 보였다. 1946년 8월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관한법령」이 공포됨에 따라 경성광산전문학교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흡수되었다.
경성광산전문학교 (京城鑛山專門學校)
경성광산전문학교는 1939년 경성부 동숭동에 설립되었던 관립 전문학교이다. 전쟁에 필요한 광물자원을 원활히 보급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경성고등공업학교 광산과를 분리, 독립하여 경성광산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 채광학과와 야금학과, 광산기계학과 등 3개 학과를 설치하였으며, 수업연한은 3년이었다. 졸업생들은 전원 국영 광산의 간부로 우선 채용되었기 때문에, 취직이 어려웠던 전시체제 아래에서 최고의 입시 경쟁률을 보였다. 1946년 8월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관한법령」이 공포됨에 따라 경성광산전문학교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흡수되었다.
경성여자사범학교는 1935년 경성부 용두동에 설립되었던 소학교 및 보통학교의 여자 교원양성학교이다. 경성사범학교의 여자강습과를 이관받아 1936년 4월 1일부터 여자 초등교원 양성 교육을 시작하였다. 1941년도까지 관비생과 사비생으로 나누어 운영하다가, 1942년도 입학생부터는 전원 관비생으로 모집하였다. 졸업 후에는 연습과, 강습과의 관비생과 사비생 모두 2년 동안 의무복무를 하였다. 8·15광복 후 경성여자사범학교는 경성여자사범대학으로 개편되었다가, 1946년 경성사범대학과 함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으로 통합, 개편되었다.
경성여자사범학교 (京城女子師範學校)
경성여자사범학교는 1935년 경성부 용두동에 설립되었던 소학교 및 보통학교의 여자 교원양성학교이다. 경성사범학교의 여자강습과를 이관받아 1936년 4월 1일부터 여자 초등교원 양성 교육을 시작하였다. 1941년도까지 관비생과 사비생으로 나누어 운영하다가, 1942년도 입학생부터는 전원 관비생으로 모집하였다. 졸업 후에는 연습과, 강습과의 관비생과 사비생 모두 2년 동안 의무복무를 하였다. 8·15광복 후 경성여자사범학교는 경성여자사범대학으로 개편되었다가, 1946년 경성사범대학과 함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으로 통합, 개편되었다.
경성의학전문학교는 1916년 경성부에 설립되었던 관립 의학전문학교이다. 1916년 4월 1일 칙령 제80호로 「조선총독부전문학교관제」가 발포되었고, 같은 해 조선총독부령 제27호로 「경성의학전문학교규칙」이 공포되어 설립되었다. 질병 진료에 관한 지식 기능을 구비한 의사 양성을 목표로 하였다. 8·15광복 후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관한법령」에 따라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와 합병되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 되었다. 안수경과 김해지, 김영흥 등이 1918년 졸업증서를 받아, 국내에서 의학교육을 받은 최초의 여의사들이 되었다.
경성의학전문학교 (京城醫學專門學校)
경성의학전문학교는 1916년 경성부에 설립되었던 관립 의학전문학교이다. 1916년 4월 1일 칙령 제80호로 「조선총독부전문학교관제」가 발포되었고, 같은 해 조선총독부령 제27호로 「경성의학전문학교규칙」이 공포되어 설립되었다. 질병 진료에 관한 지식 기능을 구비한 의사 양성을 목표로 하였다. 8·15광복 후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관한법령」에 따라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와 합병되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 되었다. 안수경과 김해지, 김영흥 등이 1918년 졸업증서를 받아, 국내에서 의학교육을 받은 최초의 여의사들이 되었다.
경성제국대학은 1926년 경성부에 설립되었던 관립 대학이다. 1924년 5월 1일 칙령 제103호로 「경성제국대학관제」가 공포되어 경성제국대학 직원과 총장의 역할 및 예과 설치가 확정되었다. 같은 날 발포된 칙령 제104호에는 경성제국대학 학부에 법문학부와 의학부를 설치할 것과, 그 시작을 1926년 4월 1일로 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았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자 경성제국대학은 경성대학을 거쳐 서울대학교가 되었다.
경성제국대학 (京城帝國大學)
경성제국대학은 1926년 경성부에 설립되었던 관립 대학이다. 1924년 5월 1일 칙령 제103호로 「경성제국대학관제」가 공포되어 경성제국대학 직원과 총장의 역할 및 예과 설치가 확정되었다. 같은 날 발포된 칙령 제104호에는 경성제국대학 학부에 법문학부와 의학부를 설치할 것과, 그 시작을 1926년 4월 1일로 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았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자 경성제국대학은 경성대학을 거쳐 서울대학교가 되었다.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는 1929년 경성부에 설립되었던 사립 치과의사 양성 전문학교이다. 1929년 2월 조선총독부고시 제25호로 4년제 전문학교로서 설치 인가를 받아, 그해 4월에 개교하였다. 설립자는 재단법인 경성치과의학교이다. 조선인 치과의사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다는 처음 계획과 달리, 1945년까지 일본인 대비 조선인 졸업생은 약 1/3에 그쳤다. 1946년 8월, 「국립서울대학교설치에관한법령」에 따라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흡수되었다.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京城齒科醫學專門學校)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는 1929년 경성부에 설립되었던 사립 치과의사 양성 전문학교이다. 1929년 2월 조선총독부고시 제25호로 4년제 전문학교로서 설치 인가를 받아, 그해 4월에 개교하였다. 설립자는 재단법인 경성치과의학교이다. 조선인 치과의사를 양성하기 위해 설립한다는 처음 계획과 달리, 1945년까지 일본인 대비 조선인 졸업생은 약 1/3에 그쳤다. 1946년 8월, 「국립서울대학교설치에관한법령」에 따라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흡수되었다.
사법대학원은 1962년 4월에 서울대학교에 설치한 사법 관련 인재 양성 기관이다. 이 기관은 고등고시 사법과 시험에 합격한 자에게 이론 및 실무를 지도함으로써 학식과 덕망을 갖춘 판사, 검사, 변호사를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판사·검사·변호사의 자질 향상을 위하여 보다 과학적이고 구체적인 연수 제도가 요구됨에 따라 1962년 4월에는 사법관 시보제를 폐지하고 서울대학교에 일반대학원과 같은 과정인 사법대학원을 설치하여 이를 마친 자에게 판사·검사의 임용 자격과 함께 석사 학위도 수여하였다. 1970년 8월에 폐지되었다.
사법대학원 (司法大學院)
사법대학원은 1962년 4월에 서울대학교에 설치한 사법 관련 인재 양성 기관이다. 이 기관은 고등고시 사법과 시험에 합격한 자에게 이론 및 실무를 지도함으로써 학식과 덕망을 갖춘 판사, 검사, 변호사를 양성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판사·검사·변호사의 자질 향상을 위하여 보다 과학적이고 구체적인 연수 제도가 요구됨에 따라 1962년 4월에는 사법관 시보제를 폐지하고 서울대학교에 일반대학원과 같은 과정인 사법대학원을 설치하여 이를 마친 자에게 판사·검사의 임용 자격과 함께 석사 학위도 수여하였다. 1970년 8월에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