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신사_참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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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서 분립하여 평양의 닭골[鷄洞]산정현에 세워진 장로교회.
산정현교회 (山亭峴敎會)
1906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章臺峴敎會)에서 분립하여 평양의 닭골[鷄洞]산정현에 세워진 장로교회.
일제강점기 광주 북문내교회 초대목사, 전라 장로회총회 총회장 등을 역임한 목사. 순교자.
이기풍 (李基豊)
일제강점기 광주 북문내교회 초대목사, 전라 장로회총회 총회장 등을 역임한 목사. 순교자.
외국인 선교사 추방사건은 전시체제기인 1940년 11월~1942년 6월에 일제의 탄압으로 기독교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강제 송환된 사건이다. 1930년대 일제는 신사참배 저항의 배후에 선교사들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외국인의 입국, 체재급퇴거에 관한 건(법령)」(1939) 등을 통해 선교사에 대한 탄압과 회유를 병행하였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제는 한국에 잔류했던 40명의 선교사를 적성국가 국민으로 분류하여 억류하였다. 이들은 1942년 6월 연합국이 억류한 일본인과 상호교환을 위해 일본으로 이송되었다가 8월 미국 뉴욕에 도착하였다.
외국인 선교사 추방사건 (外國人 宣敎師 追放事件)
외국인 선교사 추방사건은 전시체제기인 1940년 11월~1942년 6월에 일제의 탄압으로 기독교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강제 송환된 사건이다. 1930년대 일제는 신사참배 저항의 배후에 선교사들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외국인의 입국, 체재급퇴거에 관한 건(법령)」(1939) 등을 통해 선교사에 대한 탄압과 회유를 병행하였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제는 한국에 잔류했던 40명의 선교사를 적성국가 국민으로 분류하여 억류하였다. 이들은 1942년 6월 연합국이 억류한 일본인과 상호교환을 위해 일본으로 이송되었다가 8월 미국 뉴욕에 도착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안동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으며,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옥고를 치렀고, 해방 이후, 대한예수교 장로회 교단대표를 역임한 목사·독립운동가.
이원영 (李源永)
일제강점기 때, 안동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으며,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옥고를 치렀고, 해방 이후, 대한예수교 장로회 교단대표를 역임한 목사·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일제에 의한 신사참배 및 전승기원예배 등을 거부한 감리교 목사·독립운동가.
신석구 (申錫九)
일제강점기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일제에 의한 신사참배 및 전승기원예배 등을 거부한 감리교 목사·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때, 한족동맹회와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조직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이일범 (李一凡)
일제강점기 때, 한족동맹회와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조직하여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해방 이후 대한성결교회 총회의장, 서울신학대학 이사 등을 역임한 목사.
천세광 (千世光)
해방 이후 대한성결교회 총회의장, 서울신학대학 이사 등을 역임한 목사.
일제강점기 때, 평안북도 광평장터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으며, 해방 이후, 충청북도지사 등을 역임한 종교인·관료·독립운동가.
윤하영 (尹河英)
일제강점기 때, 평안북도 광평장터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으며, 해방 이후, 충청북도지사 등을 역임한 종교인·관료·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신사참배거부운동을 전개한 개신교인.
박관준 (朴寬俊)
일제강점기 신사참배거부운동을 전개한 개신교인.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거부운동과 관련된 개신교인. 전도사.
박의흠 (朴義欽)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거부운동과 관련된 개신교인. 전도사.
일제강점기 때, 청년독립회를 결성하여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벌였으며, 창원 지역에 벽보를 붙이며 창원만세사건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김명수 (金明守)
일제강점기 때, 청년독립회를 결성하여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벌였으며, 창원 지역에 벽보를 붙이며 창원만세사건을 주도한 독립운동가.
개신교는 로마가톨릭교회의 개혁을 목표로 성립한 기독교의 다양한 교파이다. 로마가톨릭교회 및 동방정교회와 함께 기독교의 3대 전통을 이루고 있는 개신교는 교회 전통보다 성서의 권위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두 교회 전통과 구별된다. 19세기 후반 시작된 한국 개신교는 초기부터 복음 전파만이 아니라 교육사업과 의료사업, 사회복지사업을 병행하면서 한국 사회의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그렇지만 한국의 전통문화나 이웃 종교와의 관계에서 갈등을 빚는가 하면 냉전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시민 사회와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개신교 (改新敎)
개신교는 로마가톨릭교회의 개혁을 목표로 성립한 기독교의 다양한 교파이다. 로마가톨릭교회 및 동방정교회와 함께 기독교의 3대 전통을 이루고 있는 개신교는 교회 전통보다 성서의 권위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두 교회 전통과 구별된다. 19세기 후반 시작된 한국 개신교는 초기부터 복음 전파만이 아니라 교육사업과 의료사업, 사회복지사업을 병행하면서 한국 사회의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그렇지만 한국의 전통문화나 이웃 종교와의 관계에서 갈등을 빚는가 하면 냉전 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시민 사회와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는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투옥된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세워진 한국 장로교의 한 교단이다. 1952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고려신학교를 인정하지 않자 한상동 등 고려신학교 설립자들이 중심이 되어 독자적인 교단을 세웠다.
대한예수교장로회 (大韓←Jesus敎長老會)
대한예수교장로회는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투옥된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세워진 한국 장로교의 한 교단이다. 1952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가 고려신학교를 인정하지 않자 한상동 등 고려신학교 설립자들이 중심이 되어 독자적인 교단을 세웠다.
대한예수교장로회는 독노회의 전통을 이어받아 1967년 출범한 한국 장로교의 한 교단이다. '혁신복구파'로도 알려져 있다. 이 교단은 일제강점기 조선장로교의 신사참배 가결과 일본기독교단으로의 편입을 한국 교회의 타락으로 규정하고 교회의 혁신과 복구의 방편으로 독자적인 교단을 조직하였다.
대한예수교장로회 (大韓←Jesus敎長老會)
대한예수교장로회는 독노회의 전통을 이어받아 1967년 출범한 한국 장로교의 한 교단이다. '혁신복구파'로도 알려져 있다. 이 교단은 일제강점기 조선장로교의 신사참배 가결과 일본기독교단으로의 편입을 한국 교회의 타락으로 규정하고 교회의 혁신과 복구의 방편으로 독자적인 교단을 조직하였다.
김길창은 일제강점기,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및 조선교단 경남 교구장으로서 적극적으로 부일협력 활동을 한 장로교 목사이다. 해방 후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던 실업여학교의 재산을 인수하고, 대규모의 적산(敵産) 땅을 불하받아 학교법인 남성·훈성·대동·한성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았다. 한국기독교연합회 회장과 부산신학교 교장, 이사장도 역임했다.
김길창 (金吉昌)
김길창은 일제강점기,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 및 조선교단 경남 교구장으로서 적극적으로 부일협력 활동을 한 장로교 목사이다. 해방 후에는 일본인이 운영하던 실업여학교의 재산을 인수하고, 대규모의 적산(敵産) 땅을 불하받아 학교법인 남성·훈성·대동·한성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았다. 한국기독교연합회 회장과 부산신학교 교장, 이사장도 역임했다.
김선두는 일제강점기,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서 평양 장로교계 3·1운동을 주동했던 목사이다. 1938년 8월경에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신사 참배 결의를 저지하기 위해 일본에까지 건너가 활동했으나, 일제 경찰의 사전 검속으로 무산되었다.
김선두 (金善斗)
김선두는 일제강점기,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으로서 평양 장로교계 3·1운동을 주동했던 목사이다. 1938년 8월경에도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신사 참배 결의를 저지하기 위해 일본에까지 건너가 활동했으나, 일제 경찰의 사전 검속으로 무산되었다.
이기선은 일제강점기 경남 김해군 김해읍교회와 평안북도 의주군 북하동교회 등에서 목회한 목사이다. 1878년 평북 박천에서 태어나 1915년 평양신학교 졸업 후 경남 김해군 김해읍교회(1918~1930)와 평북 의주군 위원면 북하동교회(1931~1938)에서 목회하였다. 일제 말기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앞장섰고 해방 이후 혁신복구파의 교회정화운동을 주도하였다.
이기선 (李基宣)
이기선은 일제강점기 경남 김해군 김해읍교회와 평안북도 의주군 북하동교회 등에서 목회한 목사이다. 1878년 평북 박천에서 태어나 1915년 평양신학교 졸업 후 경남 김해군 김해읍교회(1918~1930)와 평북 의주군 위원면 북하동교회(1931~1938)에서 목회하였다. 일제 말기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앞장섰고 해방 이후 혁신복구파의 교회정화운동을 주도하였다.
손양원은 여순사건 당시 자신의 아들들을 죽인 좌익 청년을 용서하고 양자로 삼은 기독교 목회자이자 순교자이다. 부산의 나병원 교회인 상애원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였고 1938년부터는 여수의 나병원 교회인 애양원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940년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수감되어 해방 이후 출옥하였다. 여순사건 때 자신의 아들들을 죽이는 데 가담한 안재선의 구명 운동을 펼쳐 구해 내고 양자로 삼아 사후에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6·25전쟁 중 공산당원에게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손양원 (孫良源)
손양원은 여순사건 당시 자신의 아들들을 죽인 좌익 청년을 용서하고 양자로 삼은 기독교 목회자이자 순교자이다. 부산의 나병원 교회인 상애원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하였고 1938년부터는 여수의 나병원 교회인 애양원교회에서 시무하였다. 1940년 신사참배를 거부한다는 이유로 수감되어 해방 이후 출옥하였다. 여순사건 때 자신의 아들들을 죽이는 데 가담한 안재선의 구명 운동을 펼쳐 구해 내고 양자로 삼아 사후에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6·25전쟁 중 공산당원에게 체포되어 순교하였다.
재건교회는 1945년 이후, 한국 교회의 완전한 재건을 기치로 기성의 장로교에서 분립하여 새로 조직한 교단 교회이다. 해방 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항거하다 출옥한 지도자들 사이에서 교회 재건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자, 일부 전도사 중심의 지도자들이 재건교회를 창립하였다. 북한에서는 김린희, 박신근, 고흥봉이, 남한에서는 최덕지가 재건교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일부가 기성교회로 돌아갔고, 1989년 모든 재건교회가 통합되어 현재 대한예수교장로회 재건총회(예장 재건)라는 이름으로 단일화되었다.
재건교회 (再建敎會)
재건교회는 1945년 이후, 한국 교회의 완전한 재건을 기치로 기성의 장로교에서 분립하여 새로 조직한 교단 교회이다. 해방 후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항거하다 출옥한 지도자들 사이에서 교회 재건을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자, 일부 전도사 중심의 지도자들이 재건교회를 창립하였다. 북한에서는 김린희, 박신근, 고흥봉이, 남한에서는 최덕지가 재건교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일부가 기성교회로 돌아갔고, 1989년 모든 재건교회가 통합되어 현재 대한예수교장로회 재건총회(예장 재건)라는 이름으로 단일화되었다.
주기철은 일제강점기 마산 문창교회, 평양 산정현교회 등에서 목회한 장로교 목사이다. 1937년 이후 신사 참배 거부 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평양 감옥에서 미결수로 5년여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4월 21일 옥중에서 순교하였다.
주기철 (朱基徹)
주기철은 일제강점기 마산 문창교회, 평양 산정현교회 등에서 목회한 장로교 목사이다. 1937년 이후 신사 참배 거부 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평양 감옥에서 미결수로 5년여 옥고를 치르다가 1944년 4월 21일 옥중에서 순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