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조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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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물산장려운동(朝鮮物産奬勵運動)은 1920년대 초부터 1930년대 말까지 실력양성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경제자립운동이다. 이 운동은 3 · 1운동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경제적인 영역에서 민족 역량 개발을 목적으로 하였다. 1920~1930년대 민족주의 계열이 주도해서 조선물산의 애용을 장려하면서 조선인 기업의 활동을 촉진한 경제자립운동이었다.
조선물산장려운동 (朝鮮物産奬勵運動)
조선물산장려운동(朝鮮物産奬勵運動)은 1920년대 초부터 1930년대 말까지 실력양성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경제자립운동이다. 이 운동은 3 · 1운동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경제적인 영역에서 민족 역량 개발을 목적으로 하였다. 1920~1930년대 민족주의 계열이 주도해서 조선물산의 애용을 장려하면서 조선인 기업의 활동을 촉진한 경제자립운동이었다.
경신참변은 1920년 일본군이 간도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대량으로 학살한 사건이다. 3·1운동 이후 활발해진 만주지역 독립군의 국내 위협으로 인한 일제의 재만 독립군 초토화 작전 실패가 발단이 되었다.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무차별 한인 학살 작전을 감행하였다. 마을을 포위 습격해 총이나 창으로 학살했고 부녀자들은 보이는 대로 겁탈하고 살해하였다. 간도 일대에서 학살된 한국인은 1920년 10월 9일부터 11월 5일까지 3,469명으로, 3, 4개월 동안 일본군의 학살로 희생자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경신참변 (庚申慘變)
경신참변은 1920년 일본군이 간도에 거주하는 한국인을 대량으로 학살한 사건이다. 3·1운동 이후 활발해진 만주지역 독립군의 국내 위협으로 인한 일제의 재만 독립군 초토화 작전 실패가 발단이 되었다. 일본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무차별 한인 학살 작전을 감행하였다. 마을을 포위 습격해 총이나 창으로 학살했고 부녀자들은 보이는 대로 겁탈하고 살해하였다. 간도 일대에서 학살된 한국인은 1920년 10월 9일부터 11월 5일까지 3,469명으로, 3, 4개월 동안 일본군의 학살로 희생자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안재홍은 해방 이후 민정장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사학자이다. 1891년(고종 28)에 태어나 1965년에 사망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중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옥고를 치렀다. 귀국 후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신간회사건, 조선어학회사건, 임시정부 활동 등으로 여러 차례 옥고를 겪었다.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으나 결별하고 국민당을 결성하여 당수가 되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참가하여 이승만을 회장으로 추대했고 과도입법의원, 미군정청 민정장관을 역임했다. 1950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납북되었다.
안재홍 (安在鴻)
안재홍은 해방 이후 민정장관,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자 사학자이다. 1891년(고종 28)에 태어나 1965년에 사망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 유학중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가담하여 활동하다 옥고를 치렀다. 귀국 후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신간회사건, 조선어학회사건, 임시정부 활동 등으로 여러 차례 옥고를 겪었다. 광복 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으나 결별하고 국민당을 결성하여 당수가 되었다.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참가하여 이승만을 회장으로 추대했고 과도입법의원, 미군정청 민정장관을 역임했다. 1950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납북되었다.
창씨개명 거부운동은 일제 강점기 일제에 의해 강요된 일본식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민족적 전통을 확립하고자 투쟁한 민족운동이다. 조선인에 대한 동화정책을 추진하던 일제는 황민화정책을 더욱 가속화하였다. 그 일환으로 1940년에 모든 조선인이 일본식 씨명(氏名)으로 창씨하여 호적계에 신고하도록 강요하였다. 일제는 조선인의 혈통에 대한 관념을 희석하여 민족의식을 말소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하며 자결하거나 본관으로 창씨하거나 조롱과 풍자의 내용을 넣어 창씨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하였다.
창씨개명 거부운동 (創氏改名 拒否運動)
창씨개명 거부운동은 일제 강점기 일제에 의해 강요된 일본식 창씨개명을 거부하고 민족적 전통을 확립하고자 투쟁한 민족운동이다. 조선인에 대한 동화정책을 추진하던 일제는 황민화정책을 더욱 가속화하였다. 그 일환으로 1940년에 모든 조선인이 일본식 씨명(氏名)으로 창씨하여 호적계에 신고하도록 강요하였다. 일제는 조선인의 혈통에 대한 관념을 희석하여 민족의식을 말소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하며 자결하거나 본관으로 창씨하거나 조롱과 풍자의 내용을 넣어 창씨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하였다.
신한촌은 일제강점기에 러시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한인 집단 거주지이다. 1870년(고종 8)대부터 한국인이 정착하였고, 1893년(고종 31)부터 러시아 당국에서 한국인 집단 거주지로 설정할 정도로 한인의 수가 늘어났다. 신한촌에는 자치단체, 독립운동단체 등이 생겨났고, 해외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이 몰려들어 국외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항일운동은 제정 러시아의 압박을 받았고, 러시아 혁명 후 일제의 시베리아 파병, 1920년 ‘4월참변’으로 민족운동의 중심지는 북간도로 옮겨졌다.
신한촌 (新韓村)
신한촌은 일제강점기에 러시아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던 한인 집단 거주지이다. 1870년(고종 8)대부터 한국인이 정착하였고, 1893년(고종 31)부터 러시아 당국에서 한국인 집단 거주지로 설정할 정도로 한인의 수가 늘어났다. 신한촌에는 자치단체, 독립운동단체 등이 생겨났고, 해외로 망명한 독립운동가들이 몰려들어 국외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로 항일운동은 제정 러시아의 압박을 받았고, 러시아 혁명 후 일제의 시베리아 파병, 1920년 ‘4월참변’으로 민족운동의 중심지는 북간도로 옮겨졌다.
만주는 오늘날 중국의 동북지방으로, 요령성 · 길림성 · 흑룡강성 및 내몽고 자치구의 동부지역을 포괄한 지역이다. 고대부터 여러 종족의 삶의 터전이었고 중국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변경지역이었다. 1870년대~1900년대까지 조선인들이 이주하여 한인사회를 이루며 항일민족운동을 벌인 곳이다. 농민으로 구성된 한인사회는 민족운동의 기반이었다. 20세기에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았다. 1932년 만주국을 건국하였고 일제는 전쟁과 개발에 동원하기 위하여 조선인에 대한 정책이민을 추진하였다. 조선인은 '불령선인'에서 '개척자'로 불렸다.
만주 (滿洲)
만주는 오늘날 중국의 동북지방으로, 요령성 · 길림성 · 흑룡강성 및 내몽고 자치구의 동부지역을 포괄한 지역이다. 고대부터 여러 종족의 삶의 터전이었고 중국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변경지역이었다. 1870년대~1900년대까지 조선인들이 이주하여 한인사회를 이루며 항일민족운동을 벌인 곳이다. 농민으로 구성된 한인사회는 민족운동의 기반이었다. 20세기에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았다. 1932년 만주국을 건국하였고 일제는 전쟁과 개발에 동원하기 위하여 조선인에 대한 정책이민을 추진하였다. 조선인은 '불령선인'에서 '개척자'로 불렸다.
일본 교토[京都]시 히가시야마구[東山區]에 있는 중·고등과정의 한국학교.
교토국제학교 (京都國際學校)
일본 교토[京都]시 히가시야마구[東山區]에 있는 중·고등과정의 한국학교.
1955년 5월 25일에 결성된 친북성향의 재일동포 단체.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在日本朝鮮人總聯合會)
1955년 5월 25일에 결성된 친북성향의 재일동포 단체.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재일동포로 1946년에 구성된 민족단체.
재일본대한민국민단 (在日本大韓民國民團)
대한민국을 지지하는 재일동포로 1946년에 구성된 민족단체.
재일조선인 북송사업은 1959년 12월부터 1984년까지 9만 3천여 명의 재일동포들이 북한으로 영주 귀국한 사업이다. 1958년 일본 내 총련계 동포들이 전국적으로 ‘집단적 귀국실현운동’을 전개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1958년 인도 캘커타에서 가진 북한적십자회와 일본적십자사 간 합의에 의해 북송사업이 이루어졌다. 1961년까지 전체의 80%인 7만 4천 900여 명이 귀국했다. 1965년 한일수교 이후 한국정부의 반대로 1968년부터 3년간 중단되었다. 북송 이후 재일동포들 가운데 일본과 북한 사이에 이산가족이 발생하였다.
재일조선인 북송사업 (在日朝鮮人 北送事業)
재일조선인 북송사업은 1959년 12월부터 1984년까지 9만 3천여 명의 재일동포들이 북한으로 영주 귀국한 사업이다. 1958년 일본 내 총련계 동포들이 전국적으로 ‘집단적 귀국실현운동’을 전개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1958년 인도 캘커타에서 가진 북한적십자회와 일본적십자사 간 합의에 의해 북송사업이 이루어졌다. 1961년까지 전체의 80%인 7만 4천 900여 명이 귀국했다. 1965년 한일수교 이후 한국정부의 반대로 1968년부터 3년간 중단되었다. 북송 이후 재일동포들 가운데 일본과 북한 사이에 이산가족이 발생하였다.
일본 오사카에 있는 초·중·고등과정의 한국학교.
오사카금강학교 (大阪金剛學校)
일본 오사카에 있는 초·중·고등과정의 한국학교.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피로·피로조선인·부로·부인.
임진왜란 피로인 (壬辰倭亂 捕虜人)
임진왜란 당시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인. 피로·피로조선인·부로·부인.
한인사회당은 1918년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이동휘(李東輝) 등이 조직한 한인 최초의 사회주의정당이다. 코민테른의 지부로 승인받았으며, 이동휘가 국무총리로 취임하며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와 통합 노력이 실패하고, 고려공산당 상해파으로 재편되었다.
한인사회당 (韓人社會黨)
한인사회당은 1918년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이동휘(李東輝) 등이 조직한 한인 최초의 사회주의정당이다. 코민테른의 지부로 승인받았으며, 이동휘가 국무총리로 취임하며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와 통합 노력이 실패하고, 고려공산당 상해파으로 재편되었다.
도쿄 신오쿠보 한인촌은 도쿄도 신주쿠구에 위치한 한국식의 음식점, 주점, 패션 가게, 잡화점 등이 밀집되어 있는 지역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인들이 중국인들 사이에 섞여서 신주쿠의 오쿠보역과 신오쿠보역의 철교 아래 무허가 판자집을 짓고 살았다. 1950년 롯데제과 공장이 설립되면서 일본 각지에서 한인들이 모여 들기 시작하였다. 전철역이 가까워서 교통이 편리하고 임대비가 저렴하여 한국인 여행자를 대상의 업소가 증가하였고, 한류 붐으로 일본인 방문자도 급증하였다. 공식적인 명칭은 아니지만 오쿠보·햐쿠닌초 일대를 “코리아타운”이라고 부른다.
도쿄 신오쿠보 한인촌 (Tôkyô[東京] Shinokubo[新大久保] 韓人村)
도쿄 신오쿠보 한인촌은 도쿄도 신주쿠구에 위치한 한국식의 음식점, 주점, 패션 가게, 잡화점 등이 밀집되어 있는 지역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인들이 중국인들 사이에 섞여서 신주쿠의 오쿠보역과 신오쿠보역의 철교 아래 무허가 판자집을 짓고 살았다. 1950년 롯데제과 공장이 설립되면서 일본 각지에서 한인들이 모여 들기 시작하였다. 전철역이 가까워서 교통이 편리하고 임대비가 저렴하여 한국인 여행자를 대상의 업소가 증가하였고, 한류 붐으로 일본인 방문자도 급증하였다. 공식적인 명칭은 아니지만 오쿠보·햐쿠닌초 일대를 “코리아타운”이라고 부른다.
일본 히로시마현[廣島縣] 히로시마시[広島市]에 있는 에 건립된 위령비.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
한국인 원폭 희생자 위령비(히로시마) (韓國人 原爆 犧牲者 慰靈碑(Hiroshima[廣島]))
일본 히로시마현[廣島縣] 히로시마시[広島市]에 있는 에 건립된 위령비.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
니가타현 조선인 노동자 학살사건은 1920년대 일본 니가타현에 있는 신월전력주식회사 수력발전소 공사장에서 일어난 조선인노동자 학살사건이다. 신월전력주식회사는 니가타현에 조선인과 일본인 노동자를 동원해 발전소를 건설하고 있었다. 그런데 강제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하다가 적발된 조선인노동자를 죽인 다음 강물에 던져 버린 일이 발각되었다. 현지조사를 통해 1일 17시간 노동 등 조선인노동자의 참상이 알려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 지역에서 조선인은 조선인 스스로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어 조선인노동조합이 탄생하게 되었다.
니가타현 조선인 노동자 학살사건 (新潟縣 朝鮮人 勞動者 虐殺事件)
니가타현 조선인 노동자 학살사건은 1920년대 일본 니가타현에 있는 신월전력주식회사 수력발전소 공사장에서 일어난 조선인노동자 학살사건이다. 신월전력주식회사는 니가타현에 조선인과 일본인 노동자를 동원해 발전소를 건설하고 있었다. 그런데 강제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도망하다가 적발된 조선인노동자를 죽인 다음 강물에 던져 버린 일이 발각되었다. 현지조사를 통해 1일 17시간 노동 등 조선인노동자의 참상이 알려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일본 지역에서 조선인은 조선인 스스로 보호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산되어 조선인노동조합이 탄생하게 되었다.
재일조선인총연합회 산하의 예술단체.
금강산가극단 (金剛山歌劇團)
재일조선인총연합회 산하의 예술단체.
한신교육사건은 1948년 전후 오사카부와 효고현에서 전개된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운동이다. 해방 후 귀국하려는 조선인을 위한 국어강습소는 1946년 전국에 500여 개, 학생 수는 6만 명에 달했다. 1947년 GHQ(연합국 군최고사령관 총사령부)는 재일조선인도 일본의 교육법에 따르도록 지시했고, 이를 어기는 학교는 폐쇄하겠다고 공표했다. 야마구치현 지사가 1948년 3월 조선인 학교를 폐쇄한다고 통고를 하자 수많은 조선인이 현청 앞에서 투쟁했다. 이 사건을 기념하여 재일본조선인연맹은 4월 24일을 우리말, 우리글을 지킨 ‘교육투쟁 기념일’로 정했다.
한신교육사건 (阪神敎育事件)
한신교육사건은 1948년 전후 오사카부와 효고현에서 전개된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운동이다. 해방 후 귀국하려는 조선인을 위한 국어강습소는 1946년 전국에 500여 개, 학생 수는 6만 명에 달했다. 1947년 GHQ(연합국 군최고사령관 총사령부)는 재일조선인도 일본의 교육법에 따르도록 지시했고, 이를 어기는 학교는 폐쇄하겠다고 공표했다. 야마구치현 지사가 1948년 3월 조선인 학교를 폐쇄한다고 통고를 하자 수많은 조선인이 현청 앞에서 투쟁했다. 이 사건을 기념하여 재일본조선인연맹은 4월 24일을 우리말, 우리글을 지킨 ‘교육투쟁 기념일’로 정했다.
2006년 한국의 김명준 감독이 조총련계 재일조선인학교의 생활을 담은 기록영화.
우리 학교 (우리 學校)
2006년 한국의 김명준 감독이 조총련계 재일조선인학교의 생활을 담은 기록영화.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에서 재일조선인 노동자를 대상으로 1936년에 창간한 신문.
조선신문 (朝鮮新聞)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에서 재일조선인 노동자를 대상으로 1936년에 창간한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