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조선총독부"
검색결과 총 30건
토지조사사업은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근대적 토지 소유 개념을 확립하고 조세의 원천을 확보하기 위하여 실시한 토지에 대한 조사 사업이다. 1910년부터 1918년까지 대규모로 실시되었다. 이 사업으로 근대적 토지 소유권 제도가 시행되어, 지세를 확보하고 재정을 확충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 농민의 관습적 경작권이 부정된 사례가 있었으며, 토지조사사업 이후 식민지 지주제가 확립되었다.
토지조사사업 (土地調査事業)
토지조사사업은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근대적 토지 소유 개념을 확립하고 조세의 원천을 확보하기 위하여 실시한 토지에 대한 조사 사업이다. 1910년부터 1918년까지 대규모로 실시되었다. 이 사업으로 근대적 토지 소유권 제도가 시행되어, 지세를 확보하고 재정을 확충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 농민의 관습적 경작권이 부정된 사례가 있었으며, 토지조사사업 이후 식민지 지주제가 확립되었다.
조선미술전람회는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미술 작품 공모전이다. 약칭으로 ‘선전’ 또는 ‘조선미전’이라 부른다. 1922년부터 1944년까지 총 23회 열렸다. 조선총독부의 문치 정책의 하나로 창설된 관 주도의 미술 작품 공모전이다. 개최 당시 공모 부문은 제1부 동양화, 제2부 서양화 및 조각, 제3부 서예의 3개의 부였다. 한국 근대 미술의 일본화에 촉진적 구실을 함으로써 화단을 일본화의 영향으로 물들게 하였다.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하여 성장한 작가들은 광복 이후 우리나라 미술계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조선미술전람회 (朝鮮美術展覽會)
조선미술전람회는 일제 강점기에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미술 작품 공모전이다. 약칭으로 ‘선전’ 또는 ‘조선미전’이라 부른다. 1922년부터 1944년까지 총 23회 열렸다. 조선총독부의 문치 정책의 하나로 창설된 관 주도의 미술 작품 공모전이다. 개최 당시 공모 부문은 제1부 동양화, 제2부 서양화 및 조각, 제3부 서예의 3개의 부였다. 한국 근대 미술의 일본화에 촉진적 구실을 함으로써 화단을 일본화의 영향으로 물들게 하였다. 조선미술전람회를 통하여 성장한 작가들은 광복 이후 우리나라 미술계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통감부는 1906년 일본 제국주의가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서울에 설치한 통치기구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제2차 한일협약을 강제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이 외교사무를 대행하게 하였다. 초대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는 시정 개선을 명분으로 한국의 통치 조직을 해체시켰다. 1907년 헤이그특사사건을 계기로 한일신협약을 체결하여 통감이 한국의 통치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일제 식민통치의 기본 골격을 형성한, 총독부의 무단통치를 위한 시험적 단계에 있던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통감부 (統監府)
통감부는 1906년 일본 제국주의가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평화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서울에 설치한 통치기구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제2차 한일협약을 강제 체결하여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이 외교사무를 대행하게 하였다. 초대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는 시정 개선을 명분으로 한국의 통치 조직을 해체시켰다. 1907년 헤이그특사사건을 계기로 한일신협약을 체결하여 통감이 한국의 통치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일제 식민통치의 기본 골격을 형성한, 총독부의 무단통치를 위한 시험적 단계에 있던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일제가 한국에서 식민지경제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임야에 실시한 대규모의 조사사업.
임야조사사업 (林野調査事業)
일제가 한국에서 식민지경제체제를 구축하기 위해 임야에 실시한 대규모의 조사사업.
만주는 오늘날 중국의 동북지방으로, 요령성 · 길림성 · 흑룡강성 및 내몽고 자치구의 동부지역을 포괄한 지역이다. 고대부터 여러 종족의 삶의 터전이었고 중국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변경지역이었다. 1870년대~1900년대까지 조선인들이 이주하여 한인사회를 이루며 항일민족운동을 벌인 곳이다. 농민으로 구성된 한인사회는 민족운동의 기반이었다. 20세기에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았다. 1932년 만주국을 건국하였고 일제는 전쟁과 개발에 동원하기 위하여 조선인에 대한 정책이민을 추진하였다. 조선인은 '불령선인'에서 '개척자'로 불렸다.
만주 (滿洲)
만주는 오늘날 중국의 동북지방으로, 요령성 · 길림성 · 흑룡강성 및 내몽고 자치구의 동부지역을 포괄한 지역이다. 고대부터 여러 종족의 삶의 터전이었고 중국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변경지역이었다. 1870년대~1900년대까지 조선인들이 이주하여 한인사회를 이루며 항일민족운동을 벌인 곳이다. 농민으로 구성된 한인사회는 민족운동의 기반이었다. 20세기에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았다. 1932년 만주국을 건국하였고 일제는 전쟁과 개발에 동원하기 위하여 조선인에 대한 정책이민을 추진하였다. 조선인은 '불령선인'에서 '개척자'로 불렸다.
1925년 일제가 식민지배를 합리화하려는 목적으로 일본인 어용 역사가들과 이완용, 권중현 등 친일 부역자들을 동원해 왜곡된 조선 역사를 편술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부설로 설치한 조선사 연구기관.
조선사편수회 (朝鮮史編修會)
1925년 일제가 식민지배를 합리화하려는 목적으로 일본인 어용 역사가들과 이완용, 권중현 등 친일 부역자들을 동원해 왜곡된 조선 역사를 편술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부설로 설치한 조선사 연구기관.
조선군사령부는 1918년 한반도 주둔 일본 육군 부대를 총지휘하는 천황 직할의 지역사령부이다. 일본이 조선의 치안을 유지하고 러시아군에 대한 작전을 안정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편성한 상주부대이다. 함경북도 나남에 사령부가 있는 제19사단을 먼저 편성하고, 용산에 사령부가 있는 제20사단을 편성하였다. 일본에서 병력까지 지원받아 3·1운동을 진압하였으며 만주의 독립군의 무장활동을 진압하기 위해 간도를 침략하였다. 1945년에 일본 본토를 방어하기 위해 육군을 개편할 때 조선군관사령부로 개편되어 미군을 상대하는 작전을 담당하게 되었다.
조선군사령부 (朝鮮軍司令部)
조선군사령부는 1918년 한반도 주둔 일본 육군 부대를 총지휘하는 천황 직할의 지역사령부이다. 일본이 조선의 치안을 유지하고 러시아군에 대한 작전을 안정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편성한 상주부대이다. 함경북도 나남에 사령부가 있는 제19사단을 먼저 편성하고, 용산에 사령부가 있는 제20사단을 편성하였다. 일본에서 병력까지 지원받아 3·1운동을 진압하였으며 만주의 독립군의 무장활동을 진압하기 위해 간도를 침략하였다. 1945년에 일본 본토를 방어하기 위해 육군을 개편할 때 조선군관사령부로 개편되어 미군을 상대하는 작전을 담당하게 되었다.
1915년 조선총독부가 경복궁에 건물을 세우고 설립한 박물관.
조선총독부박물관 (朝鮮總督府博物館)
1915년 조선총독부가 경복궁에 건물을 세우고 설립한 박물관.
일제강점기에 보통학교의 교과서를 편찬하기 위하여 조선총독부가 제정하고 공표한 한글맞춤법.
보통학교용 언문철자법 (普通學校用 諺文綴字法)
일제강점기에 보통학교의 교과서를 편찬하기 위하여 조선총독부가 제정하고 공표한 한글맞춤법.
일본에 재학 중인 한국인·조선인 학생에게 장학사업을 지원하는 공익재단법인.
조선장학회 (朝鮮奬學會)
일본에 재학 중인 한국인·조선인 학생에게 장학사업을 지원하는 공익재단법인.
1939년 강원도 춘천에 설립되었던 초등교원 양성학교.
춘천사범학교 (春川師範學校)
1939년 강원도 춘천에 설립되었던 초등교원 양성학교.
해방 이후 대구지방법원장, 서울고등법원장, 대법관 등을 역임한 법조인.
허진 (許瑨)
해방 이후 대구지방법원장, 서울고등법원장, 대법관 등을 역임한 법조인.
갑자구락부는 1924년 8월 경성에서 재조(在朝) 일본인과 조선인 유력 세력이 함께 조직한 친일 정치 단체이다. 이 단체는 각종 정치 현안에 관해 조사하고 이를 청원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자치론’에 관해서는 독립의 전제가 된다는 이유로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중점을 둔 참정권 청원 운동은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정치적 위상을 강화하는 데 있었다.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일제의 침략 전쟁을 지지하는 시국 대회와 시국 간담회 등을 개최하였다.
갑자구락부 (甲子俱樂部)
갑자구락부는 1924년 8월 경성에서 재조(在朝) 일본인과 조선인 유력 세력이 함께 조직한 친일 정치 단체이다. 이 단체는 각종 정치 현안에 관해 조사하고 이를 청원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자치론’에 관해서는 독립의 전제가 된다는 이유로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중점을 둔 참정권 청원 운동은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정치적 위상을 강화하는 데 있었다.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일제의 침략 전쟁을 지지하는 시국 대회와 시국 간담회 등을 개최하였다.
『이조불교』는 일본학자 타카하시 토오루가 조선시대 불교통사를 중심으로 하여 1929년에 간행한 불교서이다. 조선 불교사 연구서로 조선시대 불교를 중심으로 고대부터 중세까지의 한국 불교사를 다룬다. 타카하시 토오루는 조선총독부의 관리로 조선 유교와 불교를 연구한 학자이다. 식민사관에 입각해 한국 불교가 중국에 종속되었다고 주장하는 한편, 내용과 구성 면에서는 한국 불교의 독자성을 인정했다. 조선시대의 불교교리는 발전이 없었다고 단언하였지만, 종교사의 측면에서는 독특한 지위를 점한다고 평가했다. 불교사 연구방법론에 일정한 시사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이조불교 (李朝佛敎)
『이조불교』는 일본학자 타카하시 토오루가 조선시대 불교통사를 중심으로 하여 1929년에 간행한 불교서이다. 조선 불교사 연구서로 조선시대 불교를 중심으로 고대부터 중세까지의 한국 불교사를 다룬다. 타카하시 토오루는 조선총독부의 관리로 조선 유교와 불교를 연구한 학자이다. 식민사관에 입각해 한국 불교가 중국에 종속되었다고 주장하는 한편, 내용과 구성 면에서는 한국 불교의 독자성을 인정했다. 조선시대의 불교교리는 발전이 없었다고 단언하였지만, 종교사의 측면에서는 독특한 지위를 점한다고 평가했다. 불교사 연구방법론에 일정한 시사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금강산집(金剛山集)』 1923년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참사관실(參事官室)에서 펴낸 강원도 금강산에 관한 자료집이다. 조선총독부에 소장하고 있던 조선시대의 고도서에서 금강산 및 부근 일대의 명승지에 대한 지리(地理)·고사(故事)·기행(紀行)·시문(詩文) 등의 자료를 뽑아 사실(史實)·지지(地誌)·기행문(紀行文)·기행시(紀行詩)·시집(詩集)·별집(別集)의 6편으로 나누어 편집하고 부도(附圖)를 덧붙였다.
금강산집 (金剛山集)
『금강산집(金剛山集)』 1923년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참사관실(參事官室)에서 펴낸 강원도 금강산에 관한 자료집이다. 조선총독부에 소장하고 있던 조선시대의 고도서에서 금강산 및 부근 일대의 명승지에 대한 지리(地理)·고사(故事)·기행(紀行)·시문(詩文) 등의 자료를 뽑아 사실(史實)·지지(地誌)·기행문(紀行文)·기행시(紀行詩)·시집(詩集)·별집(別集)의 6편으로 나누어 편집하고 부도(附圖)를 덧붙였다.
『은진읍지』는 1910년 이후 충청남도 은진군의 연혁, 인문지리, 행정 등을 수록하여 편찬한 읍지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중추원이 실시한 고적 조사 과정에서 베껴 쓴 것으로 추정된다. 1책 24장의 필사본이며, 국사편찬위원회 도서이다. 지도는 싣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호서읍지』에 수록된 읍지와 비슷한데, 책의 크기가 다르고 지도를 수록하지 않은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구관 조사의 대상으로 삼은 읍지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은진읍지 (恩津邑誌)
『은진읍지』는 1910년 이후 충청남도 은진군의 연혁, 인문지리, 행정 등을 수록하여 편찬한 읍지이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중추원이 실시한 고적 조사 과정에서 베껴 쓴 것으로 추정된다. 1책 24장의 필사본이며, 국사편찬위원회 도서이다. 지도는 싣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호서읍지』에 수록된 읍지와 비슷한데, 책의 크기가 다르고 지도를 수록하지 않은 점에서 차이가 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 중추원에서 구관 조사의 대상으로 삼은 읍지에 대해 알 수 있는 자료이다.
경성공업전문학교는 1916년 경성부 동숭동에 설립되었던 관립 공업 전문학교이다. 1915년 3월 「전문학교규칙」의 제정·공포에 따른 후속 조치로 설립되었다. 이를 위해 1916년 4월 1일 칙령 제80호 및 부령 제28호로 이루어진 전 8조의 「경성공업전문학교규정」이 발포되었다. 1922년 3월 「조선총독부제학교관제」에 따라 경성공업전문학교는 경성고등공업학교가 되었다. 경성고등공업학교는 1944년에 경성공업전문학교로 교명을 바꾸었고, 1946년 8월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관한법령」에 따라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흡수되었다.
경성공업전문학교 (京城工業專門學校)
경성공업전문학교는 1916년 경성부 동숭동에 설립되었던 관립 공업 전문학교이다. 1915년 3월 「전문학교규칙」의 제정·공포에 따른 후속 조치로 설립되었다. 이를 위해 1916년 4월 1일 칙령 제80호 및 부령 제28호로 이루어진 전 8조의 「경성공업전문학교규정」이 발포되었다. 1922년 3월 「조선총독부제학교관제」에 따라 경성공업전문학교는 경성고등공업학교가 되었다. 경성고등공업학교는 1944년에 경성공업전문학교로 교명을 바꾸었고, 1946년 8월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관한법령」에 따라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흡수되었다.
경성광산전문학교는 1939년 경성부 동숭동에 설립되었던 관립 전문학교이다. 전쟁에 필요한 광물자원을 원활히 보급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경성고등공업학교 광산과를 분리, 독립하여 경성광산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 채광학과와 야금학과, 광산기계학과 등 3개 학과를 설치하였으며, 수업연한은 3년이었다. 졸업생들은 전원 국영 광산의 간부로 우선 채용되었기 때문에, 취직이 어려웠던 전시체제 아래에서 최고의 입시 경쟁률을 보였다. 1946년 8월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관한법령」이 공포됨에 따라 경성광산전문학교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흡수되었다.
경성광산전문학교 (京城鑛山專門學校)
경성광산전문학교는 1939년 경성부 동숭동에 설립되었던 관립 전문학교이다. 전쟁에 필요한 광물자원을 원활히 보급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경성고등공업학교 광산과를 분리, 독립하여 경성광산전문학교를 설립하였다. 채광학과와 야금학과, 광산기계학과 등 3개 학과를 설치하였으며, 수업연한은 3년이었다. 졸업생들은 전원 국영 광산의 간부로 우선 채용되었기 때문에, 취직이 어려웠던 전시체제 아래에서 최고의 입시 경쟁률을 보였다. 1946년 8월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관한법령」이 공포됨에 따라 경성광산전문학교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에 흡수되었다.
경성의학전문학교는 1916년 경성부에 설립되었던 관립 의학전문학교이다. 1916년 4월 1일 칙령 제80호로 「조선총독부전문학교관제」가 발포되었고, 같은 해 조선총독부령 제27호로 「경성의학전문학교규칙」이 공포되어 설립되었다. 질병 진료에 관한 지식 기능을 구비한 의사 양성을 목표로 하였다. 8·15광복 후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관한법령」에 따라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와 합병되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 되었다. 안수경과 김해지, 김영흥 등이 1918년 졸업증서를 받아, 국내에서 의학교육을 받은 최초의 여의사들이 되었다.
경성의학전문학교 (京城醫學專門學校)
경성의학전문학교는 1916년 경성부에 설립되었던 관립 의학전문학교이다. 1916년 4월 1일 칙령 제80호로 「조선총독부전문학교관제」가 발포되었고, 같은 해 조선총독부령 제27호로 「경성의학전문학교규칙」이 공포되어 설립되었다. 질병 진료에 관한 지식 기능을 구비한 의사 양성을 목표로 하였다. 8·15광복 후 「국립서울대학교설립에관한법령」에 따라 경성제국대학 의학부와 합병되어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이 되었다. 안수경과 김해지, 김영흥 등이 1918년 졸업증서를 받아, 국내에서 의학교육을 받은 최초의 여의사들이 되었다.
경성제국대학은 1926년 경성부에 설립되었던 관립 대학이다. 1924년 5월 1일 칙령 제103호로 「경성제국대학관제」가 공포되어 경성제국대학 직원과 총장의 역할 및 예과 설치가 확정되었다. 같은 날 발포된 칙령 제104호에는 경성제국대학 학부에 법문학부와 의학부를 설치할 것과, 그 시작을 1926년 4월 1일로 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았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자 경성제국대학은 경성대학을 거쳐 서울대학교가 되었다.
경성제국대학 (京城帝國大學)
경성제국대학은 1926년 경성부에 설립되었던 관립 대학이다. 1924년 5월 1일 칙령 제103호로 「경성제국대학관제」가 공포되어 경성제국대학 직원과 총장의 역할 및 예과 설치가 확정되었다. 같은 날 발포된 칙령 제104호에는 경성제국대학 학부에 법문학부와 의학부를 설치할 것과, 그 시작을 1926년 4월 1일로 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았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자 경성제국대학은 경성대학을 거쳐 서울대학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