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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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운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수운을 이용하여 조세로 거둬들인 곡물을 경창으로 운송하는 제도이다. 전근대시기에 각 지방에서는 조세 명목으로 납부하는 곡물을 조창에서 수납한 다음, 선박에 적재하여 수송운송로를 따라 중앙의 경창으로 운송했다. 산지가 많아 육로운송이 어려워 남서해안의 바닷길과 한강·예성강 등의 수계가 주로 조운에 활용되었다. 조선 후기에 조세를 면포나 동전 등으로 내는 지역이 확대되면서 세곡 운송의 필요성이 감소하고 화폐 유통 활성화에 따른 조세 금납화 현상이 확대되면서 조운제도의 비중은 점차 줄어들어 19세기 말에 소멸하였다.
조운 (漕運)
조운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수운을 이용하여 조세로 거둬들인 곡물을 경창으로 운송하는 제도이다. 전근대시기에 각 지방에서는 조세 명목으로 납부하는 곡물을 조창에서 수납한 다음, 선박에 적재하여 수송운송로를 따라 중앙의 경창으로 운송했다. 산지가 많아 육로운송이 어려워 남서해안의 바닷길과 한강·예성강 등의 수계가 주로 조운에 활용되었다. 조선 후기에 조세를 면포나 동전 등으로 내는 지역이 확대되면서 세곡 운송의 필요성이 감소하고 화폐 유통 활성화에 따른 조세 금납화 현상이 확대되면서 조운제도의 비중은 점차 줄어들어 19세기 말에 소멸하였다.
가흥창은 조선시대 충주에 설치되었던 조창이다. 충청도와 경상도 군현은 지역 내에서 거두어들인 세곡을 남한강을 경유하여 서울까지 상납해야 했는데, 가흥창이 그 세곡 보관과 수송의 거점으로서 기능하였다. 조선 전기 가흥창은 전국 9개의 조창 중 가장 큰 규모의 조창이었으나, 조선 후기 세곡을 납부하는 속읍(屬邑)이 줄어들면서 그 기능이 축소되었다.
가흥창 (可興倉)
가흥창은 조선시대 충주에 설치되었던 조창이다. 충청도와 경상도 군현은 지역 내에서 거두어들인 세곡을 남한강을 경유하여 서울까지 상납해야 했는데, 가흥창이 그 세곡 보관과 수송의 거점으로서 기능하였다. 조선 전기 가흥창은 전국 9개의 조창 중 가장 큰 규모의 조창이었으나, 조선 후기 세곡을 납부하는 속읍(屬邑)이 줄어들면서 그 기능이 축소되었다.
전운사(轉運使)는 고려 전기에 각 도(道)에서 징수한 조세를 개경으로 운송하기 위해 파견된 관리이다. 전운사의 주요 업무는 제도(諸道)에서 징수한 조세를 중앙으로 운송하는 업무를 감독하는 것이었다. 전운사는 조세 운송 업무뿐만 아니라 외관과 함께 백성의 고소 업무를 처리하는 권한까지 수행하였다. 이는 지방 제도가 정비되면서 1029년(현종 20)에 폐지되었다.
전운사 (轉運使)
전운사(轉運使)는 고려 전기에 각 도(道)에서 징수한 조세를 개경으로 운송하기 위해 파견된 관리이다. 전운사의 주요 업무는 제도(諸道)에서 징수한 조세를 중앙으로 운송하는 업무를 감독하는 것이었다. 전운사는 조세 운송 업무뿐만 아니라 외관과 함께 백성의 고소 업무를 처리하는 권한까지 수행하였다. 이는 지방 제도가 정비되면서 1029년(현종 20)에 폐지되었다.
진성창은 현재의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지역에 설치되었던 고려시대의 조창(漕倉)이다. 고려시대에는 전국에 13조창을 설치하고 각 지방의 세곡을 개경으로 운반하였다. 금강 하구 연안에 위치한 진성창은 전라도 전주와 임피, 진례 등 주변 지역의 세곡을 모아 경창으로 운송하였다. 세곡 운송과 보관을 관리하는 판관이 임명되었으며, 1척 당 1000석의 곡식을 실을 수 있는 초마선 6척을 배치되었다. 1358년 왜구의 침략으로 큰 피해를 입으면서 폐쇄 또는 이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1390년에 내륙에 가까운 용안에 득성창이 설치되면서 역할이 크게 위축되었다.
진성창 (鎭成倉)
진성창은 현재의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지역에 설치되었던 고려시대의 조창(漕倉)이다. 고려시대에는 전국에 13조창을 설치하고 각 지방의 세곡을 개경으로 운반하였다. 금강 하구 연안에 위치한 진성창은 전라도 전주와 임피, 진례 등 주변 지역의 세곡을 모아 경창으로 운송하였다. 세곡 운송과 보관을 관리하는 판관이 임명되었으며, 1척 당 1000석의 곡식을 실을 수 있는 초마선 6척을 배치되었다. 1358년 왜구의 침략으로 큰 피해를 입으면서 폐쇄 또는 이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1390년에 내륙에 가까운 용안에 득성창이 설치되면서 역할이 크게 위축되었다.
영산창은 조선 초기 현 전라남도 나주시의 영산강변에 설치되었던 조창이다. 조선시대에 전국의 주요 지점에 조창을 설치하고 조운을 통하여 각 지방의 세곡을 경창으로 운반하였다. 영산창은 고려시대에 운영된 해릉창의 역할을 계승하여 나주 등 남부 지역 17개 고을의 세곡을 수납하여 조운선으로 경창으로 운송하였다. 조운선 53척이 배치되었으며 세곡 조운을 감독하는 해운판관이 임명되었다. 1512년 험난한 해로에서 해난 사고가 발생하여 세곡이 손실되는 것을 방비한다는 이유로 폐쇄되었고, 그 기능은 영광 법성포창에 통합되었다.
영산창 (榮山倉)
영산창은 조선 초기 현 전라남도 나주시의 영산강변에 설치되었던 조창이다. 조선시대에 전국의 주요 지점에 조창을 설치하고 조운을 통하여 각 지방의 세곡을 경창으로 운반하였다. 영산창은 고려시대에 운영된 해릉창의 역할을 계승하여 나주 등 남부 지역 17개 고을의 세곡을 수납하여 조운선으로 경창으로 운송하였다. 조운선 53척이 배치되었으며 세곡 조운을 감독하는 해운판관이 임명되었다. 1512년 험난한 해로에서 해난 사고가 발생하여 세곡이 손실되는 것을 방비한다는 이유로 폐쇄되었고, 그 기능은 영광 법성포창에 통합되었다.
덕흥창은 고려시대 13조창(漕倉) 중 지금의 충주시 가금면 창동리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창이다. 13조창은 고려시대에 지방에서 징수한 조세를 보관하였다가 중앙으로 올려 보내는 역할을 하였다. 덕흥창은 그러한 13조창의 하나이며, 충청도 충주 일원과 경상도 북부 지역의 세곡을 집송(集送)하였다. 조선 초기까지 그대로 이용되다가 1465년(세조 11)에 좀 더 하류 지역에 가흥창(可興倉)이 설치되면서 폐지되었다.
덕흥창 (德興倉)
덕흥창은 고려시대 13조창(漕倉) 중 지금의 충주시 가금면 창동리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창이다. 13조창은 고려시대에 지방에서 징수한 조세를 보관하였다가 중앙으로 올려 보내는 역할을 하였다. 덕흥창은 그러한 13조창의 하나이며, 충청도 충주 일원과 경상도 북부 지역의 세곡을 집송(集送)하였다. 조선 초기까지 그대로 이용되다가 1465년(세조 11)에 좀 더 하류 지역에 가흥창(可興倉)이 설치되면서 폐지되었다.
군산창은 조선시대에 현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금강 하구 남단에 설치되었던 조창이다. 고려시대에 금강 하구에 진성창이 있었는데 왜구의 침략으로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여 용안의 득성창과 함열의 덕성창을 설치하였다. 1512년 득성창을 폐쇄하고 옥구 군산포에 군산창을 신설하여 전주와 금산, 남원 등 20개 고을의 세곡을 수납하여 경창으로 운송하였다. 17세기 중반 이후 용안에 성당창이 신설되면서 군산창의 수세 구역은 전주, 옥구 등 7개 고을로 축소되었다. 19세기에 조세의 금납화로 세곡 운송이 감소하면서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하고 폐지되었다.
군산창 (群山倉)
군산창은 조선시대에 현 전북특별자치도 군산시 금강 하구 남단에 설치되었던 조창이다. 고려시대에 금강 하구에 진성창이 있었는데 왜구의 침략으로 정상적인 기능을 하지 못하여 용안의 득성창과 함열의 덕성창을 설치하였다. 1512년 득성창을 폐쇄하고 옥구 군산포에 군산창을 신설하여 전주와 금산, 남원 등 20개 고을의 세곡을 수납하여 경창으로 운송하였다. 17세기 중반 이후 용안에 성당창이 신설되면서 군산창의 수세 구역은 전주, 옥구 등 7개 고을로 축소되었다. 19세기에 조세의 금납화로 세곡 운송이 감소하면서 점차 그 기능을 상실하고 폐지되었다.
매년 단오절에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포에서 행해지는 마을축제. 지역축제.
영광법성포단오제 (靈光法聖浦端午祭)
매년 단오절에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포에서 행해지는 마을축제. 지역축제.
강창(江倉)은 곡물을 보관하기 위하여 강이나 하천 인근에 설치한 창고를 의미한다. 곡물은 무게가 많이 나가고, 부피가 크기 때문에 다량의 곡물은 보통 선박을 통해 운송되었다. 따라서 고려와 조선 왕조는 수로 교통의 중심지에 강창을 설치하고, 곡물을 보관하고 유통했다. 일반적으로 강창은 국가가 세곡을 보관하기 위한 창고를 뜻하지만, 지방 군현에서도 세곡을 보관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강변에 설치한 창고도 강창이라 불렀다. 또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진휼곡, 유사시 군사들의 식량인 군량미 등을 보관하기 위한 강창도 존재하였다.
강창 (江倉)
강창(江倉)은 곡물을 보관하기 위하여 강이나 하천 인근에 설치한 창고를 의미한다. 곡물은 무게가 많이 나가고, 부피가 크기 때문에 다량의 곡물은 보통 선박을 통해 운송되었다. 따라서 고려와 조선 왕조는 수로 교통의 중심지에 강창을 설치하고, 곡물을 보관하고 유통했다. 일반적으로 강창은 국가가 세곡을 보관하기 위한 창고를 뜻하지만, 지방 군현에서도 세곡을 보관하기 위해 자체적으로 강변에 설치한 창고도 강창이라 불렀다. 또한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진휼곡, 유사시 군사들의 식량인 군량미 등을 보관하기 위한 강창도 존재하였다.
성당창은 조선 후기 전라도 북부 지역의 세곡을 운송하기 위해 함열(현 익산시)에 설치되었던 조창이다. 성당창은 함열, 고산, 진산, 익산, 금산, 용담, 남원, 운봉 등 8개 군현의 세곡을 운송했는데, 이를 위해 조창에는 12척의 조운선과 192명의 조군이 배치되었다. 성당창 내부에는 조창의 핵심 관아 건물인 봉세청을 비롯하여 사공청, 창고 등이 있었고, 조운선의 무사 항해를 기원하는 순풍당도 존재하였다.
성당창 (聖堂倉)
성당창은 조선 후기 전라도 북부 지역의 세곡을 운송하기 위해 함열(현 익산시)에 설치되었던 조창이다. 성당창은 함열, 고산, 진산, 익산, 금산, 용담, 남원, 운봉 등 8개 군현의 세곡을 운송했는데, 이를 위해 조창에는 12척의 조운선과 192명의 조군이 배치되었다. 성당창 내부에는 조창의 핵심 관아 건물인 봉세청을 비롯하여 사공청, 창고 등이 있었고, 조운선의 무사 항해를 기원하는 순풍당도 존재하였다.
마산창은 고려 석두창의 후신으로 1403년에 폐지되었다가 1760년 현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남성동에 다시 설치되었던 조선시대의 조창이다. 경상도 남부 지역에 설치된 가산창, 삼랑창과 함께 삼조창으로 불렸다. 이 지역의 세금은 지토선과 민간선반으로만 이동하였는데, 운송기간이 길어져 곡식이 손상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창원과 그 주변 함안·칠원·진해·거제 등 8개 고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한성의 경창으로 운송하는 역할을 맡았다. 조세의 금납화로 인해 19세기 말 조운제도가 사실상 폐지되자 마산창 역시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마산창 (馬山倉)
마산창은 고려 석두창의 후신으로 1403년에 폐지되었다가 1760년 현 경남 창원시 마산합포구 남성동에 다시 설치되었던 조선시대의 조창이다. 경상도 남부 지역에 설치된 가산창, 삼랑창과 함께 삼조창으로 불렸다. 이 지역의 세금은 지토선과 민간선반으로만 이동하였는데, 운송기간이 길어져 곡식이 손상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설치하였다. 창원과 그 주변 함안·칠원·진해·거제 등 8개 고을의 전세와 대동미를 모아 한성의 경창으로 운송하는 역할을 맡았다. 조세의 금납화로 인해 19세기 말 조운제도가 사실상 폐지되자 마산창 역시 그 기능을 상실하였다.
가산창은 1760년(영조 36) 진주에 설치되어 경상도 서남부 일대의 세곡을 보관하던 조창이다. 17세기 이후 경상도의 세곡은 서울의 경강선 또는 군현이 보유하고 있는 지토선 등으로 운반하였다. 그러나 이 선박들은 국가에서 관리하는 선박이 아니었기 때문에 선주들의 농간이 개입될 여지가 많았다. 조선왕조는 경상도의 세곡 운송을 공적인 영역으로 전환하고자 진주, 창원, 밀양 등 3곳에 각각 조창을 설치하였다. 그중 가산창은 진주, 곤양, 하동, 단성, 남해, 사천, 고성 등 7읍의 세곡을 보관하고 운송하였다.
가산창 (駕山倉)
가산창은 1760년(영조 36) 진주에 설치되어 경상도 서남부 일대의 세곡을 보관하던 조창이다. 17세기 이후 경상도의 세곡은 서울의 경강선 또는 군현이 보유하고 있는 지토선 등으로 운반하였다. 그러나 이 선박들은 국가에서 관리하는 선박이 아니었기 때문에 선주들의 농간이 개입될 여지가 많았다. 조선왕조는 경상도의 세곡 운송을 공적인 영역으로 전환하고자 진주, 창원, 밀양 등 3곳에 각각 조창을 설치하였다. 그중 가산창은 진주, 곤양, 하동, 단성, 남해, 사천, 고성 등 7읍의 세곡을 보관하고 운송하였다.
소양강창(昭陽江倉)은 조선시대 북한강 중상류 지역의 세곡을 보관, 수송하기 위하여 춘천에 설치된 조창(漕倉)이다. 조선 왕조는 전국에서 수취된 재원을 서울로 운송하기 위하여 수로와 해로의 요충지에 조창을 설치했는데, 북한강과 소양강이 만나는 춘천에는 소양강창이 설치되었다. 소양강창은 춘천을 비롯하여 홍천, 인제, 양구, 낭천 등 5개 고을의 세곡을 수납한 다음 선박을 통해 서울의 경창(京倉)으로 운반하였다.
소양강창 (昭陽江倉)
소양강창(昭陽江倉)은 조선시대 북한강 중상류 지역의 세곡을 보관, 수송하기 위하여 춘천에 설치된 조창(漕倉)이다. 조선 왕조는 전국에서 수취된 재원을 서울로 운송하기 위하여 수로와 해로의 요충지에 조창을 설치했는데, 북한강과 소양강이 만나는 춘천에는 소양강창이 설치되었다. 소양강창은 춘천을 비롯하여 홍천, 인제, 양구, 낭천 등 5개 고을의 세곡을 수납한 다음 선박을 통해 서울의 경창(京倉)으로 운반하였다.
공세곶창은 조선시대에 현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창(漕倉)이다. 공진창, 공세창, 아산창이라고도 부르는데, 『경국대전』에 수록된 조선 전기 전국 9개 조창 중 한 곳이다. 충청도 청주와 천안 등지의 세금으로 받은 곡식을 수납하여 한성의 경창으로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조선 후기에 면포로 전세를 상납하면서 조창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공세곶창(공진창)은 15세기 후반 이래 아산만 일대의 유일한 조창으로서 조선시대 충청도 서부 권역의 세곡을 수납하여 한성의 경창으로 운송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공세곶창 (貢稅串倉)
공세곶창은 조선시대에 현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창(漕倉)이다. 공진창, 공세창, 아산창이라고도 부르는데, 『경국대전』에 수록된 조선 전기 전국 9개 조창 중 한 곳이다. 충청도 청주와 천안 등지의 세금으로 받은 곡식을 수납하여 한성의 경창으로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조선 후기에 면포로 전세를 상납하면서 조창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공세곶창(공진창)은 15세기 후반 이래 아산만 일대의 유일한 조창으로서 조선시대 충청도 서부 권역의 세곡을 수납하여 한성의 경창으로 운송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법성창은 조선시대에 현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면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창이다. 고려시대에 전라도 영광 지역에는 부용창이 있었으나 고려 말기에 폐쇄되었다. 1472년(성종 3)에 법성창이 설치되었다. 1512년 나주 영산창이 폐지되면서 영산창의 담당 지역 세곡도 수납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각 고을별로 지토선에 의한 세곡 운송이 늘면서 조창의 필요성이 감소하였다. 19세기 말이 되면 조세의 금납화가 일반화되면서 조운제도는 사실상 폐지되었다. 법성창은 조선 말기까지 기능이 유지된 전라도 남부의 유일한 조창으로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법성창 (法聖倉)
법성창은 조선시대에 현 전라남도 영광군 법성면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창이다. 고려시대에 전라도 영광 지역에는 부용창이 있었으나 고려 말기에 폐쇄되었다. 1472년(성종 3)에 법성창이 설치되었다. 1512년 나주 영산창이 폐지되면서 영산창의 담당 지역 세곡도 수납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각 고을별로 지토선에 의한 세곡 운송이 늘면서 조창의 필요성이 감소하였다. 19세기 말이 되면 조세의 금납화가 일반화되면서 조운제도는 사실상 폐지되었다. 법성창은 조선 말기까지 기능이 유지된 전라도 남부의 유일한 조창으로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해룡창은 고려시대에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시 홍내동, 오천동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창(漕倉)이다. 고려시대 13조창 중의 하나로 전라남도 순천시 홍내동 해룡산 일대에 있었다. 추수가 끝난 후 전라도 동남부 지역의 조세를 모아 두었다가 2월에 발송을 시작하여 4월까지 마치도록 하였다. 정종 때 전국 조창에 조운선을 설치할 때 1,000석을 적재할 수 있는 초마선 6척이 설치되어 개경까지의 조세 운동을 담당하였다. 지금도 해룡산 정상부와 남서쪽 평지에는 당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편과 청자편이 종종 목격된다.
해룡창 (海龍倉)
해룡창은 고려시대에 지금의 전라남도 순천시 홍내동, 오천동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창(漕倉)이다. 고려시대 13조창 중의 하나로 전라남도 순천시 홍내동 해룡산 일대에 있었다. 추수가 끝난 후 전라도 동남부 지역의 조세를 모아 두었다가 2월에 발송을 시작하여 4월까지 마치도록 하였다. 정종 때 전국 조창에 조운선을 설치할 때 1,000석을 적재할 수 있는 초마선 6척이 설치되어 개경까지의 조세 운동을 담당하였다. 지금도 해룡산 정상부와 남서쪽 평지에는 당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편과 청자편이 종종 목격된다.
60포는 992년(성종 11년) 고려의 중앙 정부에서 개경으로 운송하는 세곡(稅穀)의 수경가(輸京價)를 지정해 주었던 60곳의 포구(浦口)이다. 가장 먼 곳은 경상도 지역의 나포(螺浦, 지금의 창원시 마산 합포구)와 통조포(通潮浦, 지금의 경상남도 사천군)이고, 가까운 곳은 한강 주변 지역이었다. 수경가는 지방에서 징수한 조세를 개경까지 옮겨 오는 댓가로 지불한 값을 일컫는다. 따라서 이 시기의 조세는 유력한 호족들의 협조 하에 그들의 선박을 이용하여 값을 지불하고 조세가 운송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60포 (六十浦)
60포는 992년(성종 11년) 고려의 중앙 정부에서 개경으로 운송하는 세곡(稅穀)의 수경가(輸京價)를 지정해 주었던 60곳의 포구(浦口)이다. 가장 먼 곳은 경상도 지역의 나포(螺浦, 지금의 창원시 마산 합포구)와 통조포(通潮浦, 지금의 경상남도 사천군)이고, 가까운 곳은 한강 주변 지역이었다. 수경가는 지방에서 징수한 조세를 개경까지 옮겨 오는 댓가로 지불한 값을 일컫는다. 따라서 이 시기의 조세는 유력한 호족들의 협조 하에 그들의 선박을 이용하여 값을 지불하고 조세가 운송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장흥창은 고려시대에 현 전라남도 영암군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창(漕倉)이다. 고려시대에 설치한 전국 13조창 중 하나로, 영암, 장흥 및 그 속군현의 세곡을 모아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전라도 서남부의 세곡을 모아 서해안을 따라 개경의 경창으로 운송하였다. 『고려사』에 따르면 운송용 초마선은 6척을 두었는데 1척당 1000석의 곡식을 실을 수 있다고 한다. 판관이 세곡 운송과 보관을 관리, 감독하였고, 외관(外官)의 녹봉 규정에 따라 20석이 지급되었다. 장흥창의 폐쇄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고려 말기에 폐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장흥창 (長興倉)
장흥창은 고려시대에 현 전라남도 영암군 지역에 설치되었던 조창(漕倉)이다. 고려시대에 설치한 전국 13조창 중 하나로, 영암, 장흥 및 그 속군현의 세곡을 모아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전라도 서남부의 세곡을 모아 서해안을 따라 개경의 경창으로 운송하였다. 『고려사』에 따르면 운송용 초마선은 6척을 두었는데 1척당 1000석의 곡식을 실을 수 있다고 한다. 판관이 세곡 운송과 보관을 관리, 감독하였고, 외관(外官)의 녹봉 규정에 따라 20석이 지급되었다. 장흥창의 폐쇄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고려 말기에 폐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 조창(漕倉)에 소속되어 있던 향리(鄕吏).
색전 (色典)
고려시대 조창(漕倉)에 소속되어 있던 향리(鄕吏).
공진창은 조선시대에 지금의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에 설치되었던 조창(漕倉)이다. 공세곶창(貢稅串倉), 공세창(貢稅倉), 아산창(牙山倉)이라고도 하며, 조선시대 전국 9개 조창 중 한 곳이다. 아산(牙山) · 목천(木川) · 연기(燕岐) · 천안(天安) · 온양(溫陽) · 전의(全義) · 서원(西原)의 전세(田稅)를 실어 부근의 변장(邊將)이 영납하였다.
공진창 (貢津倉)
공진창은 조선시대에 지금의 충청남도 아산시 인주면 공세리에 설치되었던 조창(漕倉)이다. 공세곶창(貢稅串倉), 공세창(貢稅倉), 아산창(牙山倉)이라고도 하며, 조선시대 전국 9개 조창 중 한 곳이다. 아산(牙山) · 목천(木川) · 연기(燕岐) · 천안(天安) · 온양(溫陽) · 전의(全義) · 서원(西原)의 전세(田稅)를 실어 부근의 변장(邊將)이 영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