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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색결과 총 320건
조선시대 왕비의 예복. 1403년(태종 3) 면복(冕服)과 태상왕(太上王) 표리(表裏)와 중궁의 관복(冠服)을 가지고 왔는데, 이 때 가져온 의복은 각색소저사의복(各色素紵紗衣服)과 대홍소저사겹대삼(大紅素紵紗裌大衫)·복청소저겹원령(福靑素紵裌圓領)·청소저사수적계하피(靑素紵紗繡翟雞霞帔) 등이었다. 1456년(세조 2)에 전래된 복식은 주취칠적관(珠翠七翟冠)과 대홍저사대삼(大紅紵絲大衫)·청저사수권금적계배자(靑紵絲綉圈金翟雞背子)·청선라채수권하피(靑線羅采綉圈霞帔)·상아여홀(象牙女笏) 등이었다. 명나라 영락(永樂) 3년(1405)의 예제(禮制)로는 대삼과 하피가 황후의 연거복(燕居服)이고 군왕비의 관복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우리 나라의 왕후도 2등체강원칙(二等遞降原則)에 의하여 대삼·배자·하피·여홀 등을...
대삼 (大衫)
조선시대 왕비의 예복. 1403년(태종 3) 면복(冕服)과 태상왕(太上王) 표리(表裏)와 중궁의 관복(冠服)을 가지고 왔는데, 이 때 가져온 의복은 각색소저사의복(各色素紵紗衣服)과 대홍소저사겹대삼(大紅素紵紗裌大衫)·복청소저겹원령(福靑素紵裌圓領)·청소저사수적계하피(靑素紵紗繡翟雞霞帔) 등이었다. 1456년(세조 2)에 전래된 복식은 주취칠적관(珠翠七翟冠)과 대홍저사대삼(大紅紵絲大衫)·청저사수권금적계배자(靑紵絲綉圈金翟雞背子)·청선라채수권하피(靑線羅采綉圈霞帔)·상아여홀(象牙女笏) 등이었다. 명나라 영락(永樂) 3년(1405)의 예제(禮制)로는 대삼과 하피가 황후의 연거복(燕居服)이고 군왕비의 관복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우리 나라의 왕후도 2등체강원칙(二等遞降原則)에 의하여 대삼·배자·하피·여홀 등을...
대례복을 입고 큰머리를 할 때 머리에 꽂는 장식품. # 내용 ‘떨철반자’라고도 한다. 모양은 중앙에 꽂는 나비 모양을 한 선봉잠과 양쪽에 꽂는 둥근 모양의 반자가 있으며, 사각모양의 것도 있다. 재료는 지름 6∼8㎝ 정도 크기의 옥판을 조각하여 판을 만들고, 뒤쪽에는 동으로 만든 납작한 머리꽂이를 붙인다. 앞의 장식은 진주(眞珠)·산호(珊瑚)·비취(翡翠)·칠보(七寶)를 부착하였으며, 또 칠보로 만든 작은 나비를 위에 단 4, 5㎝ 높이의 용수철을 옥판 사방에 달아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게 하였다. 큰머리를 할 때에는 검정색 공단 속에 솜을 넣어 만든 어염족두리를 작은 부분이 이마 위에 오도록 쓰고 어여머리를 얹은 다음, 선봉잠은 앞 중앙 머리에 꽂고 반자는 눈 높이 정도에서 좌우에 하나씩 꽂는다. 이처럼 한사람이 큰머리를 할...
떨잠 (떨簪)
대례복을 입고 큰머리를 할 때 머리에 꽂는 장식품. # 내용 ‘떨철반자’라고도 한다. 모양은 중앙에 꽂는 나비 모양을 한 선봉잠과 양쪽에 꽂는 둥근 모양의 반자가 있으며, 사각모양의 것도 있다. 재료는 지름 6∼8㎝ 정도 크기의 옥판을 조각하여 판을 만들고, 뒤쪽에는 동으로 만든 납작한 머리꽂이를 붙인다. 앞의 장식은 진주(眞珠)·산호(珊瑚)·비취(翡翠)·칠보(七寶)를 부착하였으며, 또 칠보로 만든 작은 나비를 위에 단 4, 5㎝ 높이의 용수철을 옥판 사방에 달아 움직일 때마다 흔들리게 하였다. 큰머리를 할 때에는 검정색 공단 속에 솜을 넣어 만든 어염족두리를 작은 부분이 이마 위에 오도록 쓰고 어여머리를 얹은 다음, 선봉잠은 앞 중앙 머리에 꽂고 반자는 눈 높이 정도에서 좌우에 하나씩 꽂는다. 이처럼 한사람이 큰머리를 할...
조선시대 기녀(妓女)·의녀(醫女) 등 특수층여자가 얹은머리 위에 쓰던 쓰개. # 내용 차액(遮額)이라고도 한다. 그 형태를 ≪임하필기 林下筆記≫와 ≪증보문헌비고 增補文獻備考≫에서는 검은 색 또는 자색 비단의 가운데를 접어 두 겹으로 하고 두꺼운 종이를 그 안에 접어넣고 머리에 쓰는데 이마에서 정수리를 덮고 뒤에 드리워 어깨를 덮는다고 하였다. 또한,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는 기녀는 검은 베[黑褐]로 된 것을 쓰고 의녀는 검은 비단[黑緞]으로 된 것을 쓰는데, 그 형상은 책갑(冊匣)과 같다고 하였다. 이 가리마는 광해군 중기 이후 얹은머리의 금지와 더불어 족두리를 쓰게 되어 차차 사라져갔는데, 신윤복(申潤福)의 그림에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 정조 때까지는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임하필기(林下筆記)...
가리마
조선시대 기녀(妓女)·의녀(醫女) 등 특수층여자가 얹은머리 위에 쓰던 쓰개. # 내용 차액(遮額)이라고도 한다. 그 형태를 ≪임하필기 林下筆記≫와 ≪증보문헌비고 增補文獻備考≫에서는 검은 색 또는 자색 비단의 가운데를 접어 두 겹으로 하고 두꺼운 종이를 그 안에 접어넣고 머리에 쓰는데 이마에서 정수리를 덮고 뒤에 드리워 어깨를 덮는다고 하였다. 또한, ≪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는 기녀는 검은 베[黑褐]로 된 것을 쓰고 의녀는 검은 비단[黑緞]으로 된 것을 쓰는데, 그 형상은 책갑(冊匣)과 같다고 하였다. 이 가리마는 광해군 중기 이후 얹은머리의 금지와 더불어 족두리를 쓰게 되어 차차 사라져갔는데, 신윤복(申潤福)의 그림에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 정조 때까지는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임하필기(林下筆記)...
깃을 달지 아니한 갓난 아이의 저고리. # 내용 배냇옷 또는 깃저고리라고도 한다. 아이가 태어난 뒤에 처음으로 입히는 옷이기 때문에 보온과 위생에 중점을 두고, 혈액순환도 잘 되며, 활동도 자유로이 할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입히고 벗기기 쉽도록 넉넉하고 간편하게 만든다. 옛날에는 흔히 흰색의 부드러운 무명이나 명주를 사용하였고, 등에 솔기를 하지 않았으며, 그 길이는 배를 덮을 정도로 길게 하였고 또 소매도 길쭉하게 하여 손을 덮도록 하였다. 요즈음은 거즈나 양질의 메리야스, 겨울에는 융 등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갓난아이의 옷 모양은 서구식 애기옷에서도 볼 수 있다. 옛 우리 가정에서는 이 배냇저고리를 귀히 여겨 보관하는 습속이 있었으니, 얼마 전까지도 입학시험 때 애기 시절에 입고 있던 배냇저고리를 몸에...
배냇저고리
깃을 달지 아니한 갓난 아이의 저고리. # 내용 배냇옷 또는 깃저고리라고도 한다. 아이가 태어난 뒤에 처음으로 입히는 옷이기 때문에 보온과 위생에 중점을 두고, 혈액순환도 잘 되며, 활동도 자유로이 할 수 있도록 하는 동시에, 입히고 벗기기 쉽도록 넉넉하고 간편하게 만든다. 옛날에는 흔히 흰색의 부드러운 무명이나 명주를 사용하였고, 등에 솔기를 하지 않았으며, 그 길이는 배를 덮을 정도로 길게 하였고 또 소매도 길쭉하게 하여 손을 덮도록 하였다. 요즈음은 거즈나 양질의 메리야스, 겨울에는 융 등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갓난아이의 옷 모양은 서구식 애기옷에서도 볼 수 있다. 옛 우리 가정에서는 이 배냇저고리를 귀히 여겨 보관하는 습속이 있었으니, 얼마 전까지도 입학시험 때 애기 시절에 입고 있던 배냇저고리를 몸에...
1965년 광주광역시 무등산에 있던 김덕령(金德齡:1567∼1596) 장군의 묘를 이장할 때 출토된 16세기 후기의 복식류. 김덕령 장군 의복은 조선 중기의 장군 김덕령의 묘에서 출토된 16세기 후기의 복식류이다. 1965년 광주 무등산에 있던 김덕령(1567∼1596) 장군의 묘를 이장할 때 출토되었다. 철릭 2점, 장옷 1점, 과두 3점, 저고리 1점, 사폭바지 1점 등 모두 8점이다. 저고리는 풍성한 느낌의 무명 솜저고리인데 겉감은 무명, 안감은 삼베로 되어 있다. 바지는 현재 옷감이 소실되고 바지 형체의 솜만 남아 있다. 이 의복은 임진왜란 당시 남녀 평상복 유물로서의 가치가 있다. 특히 사폭바지는 가장 시기가 올라가는 유물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내용 1965년 7월에 광주광역시 무등산 이치(梨峙)에 있던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 장군의 묘를...
김덕령 장군 의복 (金德領 將軍 衣服)
1965년 광주광역시 무등산에 있던 김덕령(金德齡:1567∼1596) 장군의 묘를 이장할 때 출토된 16세기 후기의 복식류. 김덕령 장군 의복은 조선 중기의 장군 김덕령의 묘에서 출토된 16세기 후기의 복식류이다. 1965년 광주 무등산에 있던 김덕령(1567∼1596) 장군의 묘를 이장할 때 출토되었다. 철릭 2점, 장옷 1점, 과두 3점, 저고리 1점, 사폭바지 1점 등 모두 8점이다. 저고리는 풍성한 느낌의 무명 솜저고리인데 겉감은 무명, 안감은 삼베로 되어 있다. 바지는 현재 옷감이 소실되고 바지 형체의 솜만 남아 있다. 이 의복은 임진왜란 당시 남녀 평상복 유물로서의 가치가 있다. 특히 사폭바지는 가장 시기가 올라가는 유물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내용 1965년 7월에 광주광역시 무등산 이치(梨峙)에 있던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 장군의 묘를...
의복의 허리에 둘러 앞이 벌어지지 않게 하는 끈. 신라는 진평왕 즉위년에 상황(上皇)이 옥대(玉帶)를 왕에게 받으라 하였다는 기록과 진덕여왕 3년 1월에 중국의 의복을 입기 시작하였다는 기록밖에 없다. 그러나, 포백대를 맨 그림이나 비석 등이 있고, 과대(銙帶)의 유물이 많이 남아 있다. 과대는 삼국이 공통적으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과의 형태와 붙인 방법에 따라 구분된다. 가장 대표적인 형태는, 금속제 방형(方形)의 얇은 판에 좌우 대칭으로 당초문을 투조한 과판 30∼45개를 혁대 또는 포백대 위에 연결하여 못으로 붙인 것이다. 과의 밑에는 심엽형(心葉形)의 것이 달려 있어 거기에 각종 요패를 연결하게 하였다. 창녕·양산과 경주 보문리 금관총에서 출토된 것은 심엽형의 얇은 과판 10개를 혁대 또는 포백대 위에 붙인 것이다. 각...
띠
의복의 허리에 둘러 앞이 벌어지지 않게 하는 끈. 신라는 진평왕 즉위년에 상황(上皇)이 옥대(玉帶)를 왕에게 받으라 하였다는 기록과 진덕여왕 3년 1월에 중국의 의복을 입기 시작하였다는 기록밖에 없다. 그러나, 포백대를 맨 그림이나 비석 등이 있고, 과대(銙帶)의 유물이 많이 남아 있다. 과대는 삼국이 공통적으로 사용하였던 것으로 과의 형태와 붙인 방법에 따라 구분된다. 가장 대표적인 형태는, 금속제 방형(方形)의 얇은 판에 좌우 대칭으로 당초문을 투조한 과판 30∼45개를 혁대 또는 포백대 위에 연결하여 못으로 붙인 것이다. 과의 밑에는 심엽형(心葉形)의 것이 달려 있어 거기에 각종 요패를 연결하게 하였다. 창녕·양산과 경주 보문리 금관총에서 출토된 것은 심엽형의 얇은 과판 10개를 혁대 또는 포백대 위에 붙인 것이다. 각...
1972년 서울에 소재한 조선 후기의 문신 김덕원(金德遠)과 그의 부인 전주이씨의 합장묘에서 출토된 17세기 후반의 복식류 53점. 김덕원 묘 출토 의복 일괄은 조선 후기의 문신 김덕원의 묘에서 출토된 17세기 후반의 복식류 53점이다. 1980년에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후손이 소장하고 있다. 좌의정을 지낸 김덕원(1634~1704)과 그의 부인 전주이씨의 합장묘에서 의복이 출토되었다. 출토 의복은 단령, 철릭, 창의, 중치막, 바지, 장옷, 저고리, 치마, 웃치마, 여자 속바지 등이다. 옷의 본래 색상은 없어지고 갈변된 상태이다. 이 출토 의복은 염습의와 염습 제구이다. 이는 조선 숙종 때 사대부가의 복식 형태 등 당시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김덕원 묘 출토 의복은 1972년 3월서울특별시 영등포구 화곡동에서 조선 후기의 문신인 김덕원(1634∼1704)...
김덕원 묘 출토 의복 일괄 (金德遠 墓 出土 衣服 一括)
1972년 서울에 소재한 조선 후기의 문신 김덕원(金德遠)과 그의 부인 전주이씨의 합장묘에서 출토된 17세기 후반의 복식류 53점. 김덕원 묘 출토 의복 일괄은 조선 후기의 문신 김덕원의 묘에서 출토된 17세기 후반의 복식류 53점이다. 1980년에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후손이 소장하고 있다. 좌의정을 지낸 김덕원(1634~1704)과 그의 부인 전주이씨의 합장묘에서 의복이 출토되었다. 출토 의복은 단령, 철릭, 창의, 중치막, 바지, 장옷, 저고리, 치마, 웃치마, 여자 속바지 등이다. 옷의 본래 색상은 없어지고 갈변된 상태이다. 이 출토 의복은 염습의와 염습 제구이다. 이는 조선 숙종 때 사대부가의 복식 형태 등 당시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김덕원 묘 출토 의복은 1972년 3월서울특별시 영등포구 화곡동에서 조선 후기의 문신인 김덕원(1634∼1704)...
남의 머리털로 여러 가지 머리 모양을 만들어 치레로 머리에 쓰는 물건. # 내용 가발은 다리[月子]나 가체와는 달리 머리에 씌우는 기본 바탕 위에 머리털을 심은 것이다. 머리 전체에 씌우는 전가발과 밑 부분에만 사용하는 부분가발이 있다. 개화기 이후 서양식 연극과 무용, 오페라 등에서 극중 인물의 창조를 위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 뒤 숱이 적거나 대머리인 남자들이나, 머리형을 색다르고 아름답게 보이기를 원하는 여성들 사이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가발이 보편화된 것은 1960년대 이후이다. 당시 전세계적으로 가발을 이용한 머리 모양의 유행과 더불어 이미지 변화를 위한 패션 상품으로 가발이 등장하여 1970년대 전반까지 지속되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가발은 사람의 머리카락으로만...
가발 (假髮)
남의 머리털로 여러 가지 머리 모양을 만들어 치레로 머리에 쓰는 물건. # 내용 가발은 다리[月子]나 가체와는 달리 머리에 씌우는 기본 바탕 위에 머리털을 심은 것이다. 머리 전체에 씌우는 전가발과 밑 부분에만 사용하는 부분가발이 있다. 개화기 이후 서양식 연극과 무용, 오페라 등에서 극중 인물의 창조를 위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 뒤 숱이 적거나 대머리인 남자들이나, 머리형을 색다르고 아름답게 보이기를 원하는 여성들 사이에 사용되었다. 그러나 가발이 보편화된 것은 1960년대 이후이다. 당시 전세계적으로 가발을 이용한 머리 모양의 유행과 더불어 이미지 변화를 위한 패션 상품으로 가발이 등장하여 1970년대 전반까지 지속되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가발은 사람의 머리카락으로만...
장삼 위에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걸쳐입는 승려의 법의(法衣). # 내용 종파와 법계에 따라 그 색과 형태에 엄격한 규정이 있다. 가사는 범어(梵語)인 ‘카사야(Kasaya)’에서 음을 딴 것으로, 괴색(壞色)·부정색(不正色)·탁색(濁色)·탁염색(濁染色)·염색 등으로 번역된다. 색에 의한 명칭으로는 염의(染衣)·염색의·부정색의·괴색의·탁적의(濁赤衣)·황갈색의 등이 있다. 용도에 따라서는 삼의(三衣)·승의(僧衣)·비구의(比丘衣)라 하며, 공덕의 측면을 강조하여서 법복·법의·불의·공덕의라고도 한다. 인도에서는 사계절의 평상복으로 착용하였는데, 중국에 전래되면서 불교의식 및 법회 때 편삼 위에 걸치는 의식복으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 중엽에 흑장삼(黑長衫)과 붉은 가사가 전래되어, 전통적인 바지...
가사 (袈裟)
장삼 위에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걸쳐입는 승려의 법의(法衣). # 내용 종파와 법계에 따라 그 색과 형태에 엄격한 규정이 있다. 가사는 범어(梵語)인 ‘카사야(Kasaya)’에서 음을 딴 것으로, 괴색(壞色)·부정색(不正色)·탁색(濁色)·탁염색(濁染色)·염색 등으로 번역된다. 색에 의한 명칭으로는 염의(染衣)·염색의·부정색의·괴색의·탁적의(濁赤衣)·황갈색의 등이 있다. 용도에 따라서는 삼의(三衣)·승의(僧衣)·비구의(比丘衣)라 하며, 공덕의 측면을 강조하여서 법복·법의·불의·공덕의라고도 한다. 인도에서는 사계절의 평상복으로 착용하였는데, 중국에 전래되면서 불교의식 및 법회 때 편삼 위에 걸치는 의식복으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 중엽에 흑장삼(黑長衫)과 붉은 가사가 전래되어, 전통적인 바지...
1985년 경기도 광주시 추월면 지월리에 위치한 김첨(金瞻: 1502∼1584)과 그의 딸 안동김씨, 손부(孫婦) 원주원씨 묘에서 출토된 임진왜란 전후의 유물 15점. 안동김씨 묘 출토 의복은 1985년 경기도 광주시 추월면에 위치한 김첨과 그의 딸 안동 김씨, 손부 원주 원씨 묘에서 출토된 임진왜란 전후의 유물 15점이다. 1세기에 걸친 한 집안의 묘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김첨의 묘에서는 장옷 2점과 명주 솜누비 바지, 솜이불이 수습되었다. 김첨의 딸 묘에서는 여자 미라, 관에 ‘안동김씨지구’라고 쓰인 기, 회장저고리가 출토되었다. 17세기 말의 원주 원씨 묘에서는 누비솜저고리와 치마, 속옷이 출토되었다.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충북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시대 연대를 알 수 있는 유물로 복식사의 사료적 가치가 크다.출토 의복’은 1985년...
안동김씨 묘 출토 의복 (安東金氏 墓 出土 衣服)
1985년 경기도 광주시 추월면 지월리에 위치한 김첨(金瞻: 1502∼1584)과 그의 딸 안동김씨, 손부(孫婦) 원주원씨 묘에서 출토된 임진왜란 전후의 유물 15점. 안동김씨 묘 출토 의복은 1985년 경기도 광주시 추월면에 위치한 김첨과 그의 딸 안동 김씨, 손부 원주 원씨 묘에서 출토된 임진왜란 전후의 유물 15점이다. 1세기에 걸친 한 집안의 묘에서 출토된 유물이다. 김첨의 묘에서는 장옷 2점과 명주 솜누비 바지, 솜이불이 수습되었다. 김첨의 딸 묘에서는 여자 미라, 관에 ‘안동김씨지구’라고 쓰인 기, 회장저고리가 출토되었다. 17세기 말의 원주 원씨 묘에서는 누비솜저고리와 치마, 속옷이 출토되었다.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충북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선시대 연대를 알 수 있는 유물로 복식사의 사료적 가치가 크다.출토 의복’은 1985년...
관원(官員)의 정복(正服). 신라는 제23대 법흥왕 7년(520)에 신라 육부 관원들의 복색과 상하·존비를 가려 의복제도를 정했다고 하지만 전해오는 것이 없다. 다만 ≪삼국사기≫ 색복조에 흥덕왕 10년에 경정한 백관의 관복제도가 수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신라의 관복제도는 사색공복제도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진덕여왕 2년(648)에는 김춘추(金春秋)가 당나라에 청병하러 가서 당태종에게 장복(章服)의 개혁을 청하고 그들의 관복을 가지고 귀국하여 이듬 해 정월부터 착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당나라의 사색공복제도를 그대로 답습하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고려의 백관복제도는 ≪고려사≫ 여복지에 잘 나타나 있으며, 조복·제복·공복의 구별도 이 때부터 비로소 나타난다. 제복은 제17대 인종 18년(1140)의 ≪조정체례복장...
백관복 (百官服)
관원(官員)의 정복(正服). 신라는 제23대 법흥왕 7년(520)에 신라 육부 관원들의 복색과 상하·존비를 가려 의복제도를 정했다고 하지만 전해오는 것이 없다. 다만 ≪삼국사기≫ 색복조에 흥덕왕 10년에 경정한 백관의 관복제도가 수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신라의 관복제도는 사색공복제도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진덕여왕 2년(648)에는 김춘추(金春秋)가 당나라에 청병하러 가서 당태종에게 장복(章服)의 개혁을 청하고 그들의 관복을 가지고 귀국하여 이듬 해 정월부터 착용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당나라의 사색공복제도를 그대로 답습하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고려의 백관복제도는 ≪고려사≫ 여복지에 잘 나타나 있으며, 조복·제복·공복의 구별도 이 때부터 비로소 나타난다. 제복은 제17대 인종 18년(1140)의 ≪조정체례복장...
조선시대 때 왕비의 원삼이나 당의에 달던 표장(表章). # 내용 1979년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보(補)는 원래 4장이 일습이나 본 유물은 1장만 남아 있다. 연두색 양단에 발톱이 5개인 반룡(蟠龍)과 장생문 · 칠보문을 수놓았다. 용의 눈은 검은색 실로, 용의 몸은 광택금사로 수놓았으며, 가장자리는 굵은 무광택금사로 징거 양감을 주었다. 보 중앙에 여의주와 염초가, 하단에 바위 · 물결 등의 장생문 · 칠보문이 있고, 운문은 용을 중심으로 보 전체에 배열되었다. 장생문 · 칠보문은 가는 금사로 외곽선을 두 번씩 징겄으며, 보의 둥근 가장자리는 굵은 명주실로 두 번씩 징겄다. 섬세하게 수놓은 궁수(宮繡)의 가작이다. 현재 서울공예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한국의 자수(刺繡)』(허동화...
오조룡 왕비 보 (五爪龍 王妃 補)
조선시대 때 왕비의 원삼이나 당의에 달던 표장(表章). # 내용 1979년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보(補)는 원래 4장이 일습이나 본 유물은 1장만 남아 있다. 연두색 양단에 발톱이 5개인 반룡(蟠龍)과 장생문 · 칠보문을 수놓았다. 용의 눈은 검은색 실로, 용의 몸은 광택금사로 수놓았으며, 가장자리는 굵은 무광택금사로 징거 양감을 주었다. 보 중앙에 여의주와 염초가, 하단에 바위 · 물결 등의 장생문 · 칠보문이 있고, 운문은 용을 중심으로 보 전체에 배열되었다. 장생문 · 칠보문은 가는 금사로 외곽선을 두 번씩 징겄으며, 보의 둥근 가장자리는 굵은 명주실로 두 번씩 징겄다. 섬세하게 수놓은 궁수(宮繡)의 가작이다. 현재 서울공예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한국의 자수(刺繡)』(허동화...
조선 후기 때 사람 홍극가(洪克加, 1670년 사망)의 무덤에서 출토된 복식. 1974년에 안동댐공사관계로 무덤을 이장하던 중 발견되었는데, 출토된 의복은 중치막 1점, 도포 1점, 누비바지 1점, 버선 1족 등 4점이다. 중치막은 조선 중기 사대부의 편복(便服)으로 착용되었다. 이 유물은 흰 무명으로 된 겹옷으로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직령(直領)에 무가 없이 양옆이 트인 세 자락 옷으로 깃은 넓고 길며, 화장이 105.5㎝나 되는 긴소매가 달려 있다. 옷 크기에 비하여 고름은 좁고 짧은 형태이다. 현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이단하(李端夏)가 착용하였던 중치막은 출토품이 아닌 전세유물인데, 모시로 된 홑옷으로 이 유물과 거의 흡사하다. 특히, 이단하의 중치막에도 화장이 116㎝ 되는 긴소매가 달려 있어 이 유물은 평상복과 같은 형태임을 알 수...
안동홍씨 수의 (安東洪氏 壽衣)
조선 후기 때 사람 홍극가(洪克加, 1670년 사망)의 무덤에서 출토된 복식. 1974년에 안동댐공사관계로 무덤을 이장하던 중 발견되었는데, 출토된 의복은 중치막 1점, 도포 1점, 누비바지 1점, 버선 1족 등 4점이다. 중치막은 조선 중기 사대부의 편복(便服)으로 착용되었다. 이 유물은 흰 무명으로 된 겹옷으로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직령(直領)에 무가 없이 양옆이 트인 세 자락 옷으로 깃은 넓고 길며, 화장이 105.5㎝나 되는 긴소매가 달려 있다. 옷 크기에 비하여 고름은 좁고 짧은 형태이다. 현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이단하(李端夏)가 착용하였던 중치막은 출토품이 아닌 전세유물인데, 모시로 된 홑옷으로 이 유물과 거의 흡사하다. 특히, 이단하의 중치막에도 화장이 116㎝ 되는 긴소매가 달려 있어 이 유물은 평상복과 같은 형태임을 알 수...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현의(玄衣)와 청색 중단(中單)으로 구성된 구한말의 왕실복식. # 개설 이 유물들은 1979년 중요민속자료(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장복이란 왕이나 황태자가 국가의 대례(大禮)와 제례(祭禮), 흉례(凶禮)에 사용하는 구장문(九章文)의 면복(冕服) 일습을 의미한다. 면복은 규(圭)와 면(冕), 의(衣), 상(裳), 대대(大帶), 중단(中單), 패(佩), 수(綬), 방심곡령(方心曲領), 폐슬(蔽膝), 말(襪), 석(舃)과 같이 다양한 복식물로 구성된다. 구장복이라는 명칭은 면복의 구성물인 현의(玄衣)와 훈상(纁裳)에 사용되는 무늬[章紋]가 9종류이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현의에 5문장을, 훈상에 4문장을 사용하였다. 1979년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구장복은 구장복의 겉옷인 현의와...
구장복 (九章服)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현의(玄衣)와 청색 중단(中單)으로 구성된 구한말의 왕실복식. # 개설 이 유물들은 1979년 중요민속자료(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장복이란 왕이나 황태자가 국가의 대례(大禮)와 제례(祭禮), 흉례(凶禮)에 사용하는 구장문(九章文)의 면복(冕服) 일습을 의미한다. 면복은 규(圭)와 면(冕), 의(衣), 상(裳), 대대(大帶), 중단(中單), 패(佩), 수(綬), 방심곡령(方心曲領), 폐슬(蔽膝), 말(襪), 석(舃)과 같이 다양한 복식물로 구성된다. 구장복이라는 명칭은 면복의 구성물인 현의(玄衣)와 훈상(纁裳)에 사용되는 무늬[章紋]가 9종류이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현의에 5문장을, 훈상에 4문장을 사용하였다. 1979년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구장복은 구장복의 겉옷인 현의와...
흰 베로 만든 갓. # 내용 가늘게 쪼갠 죽사(竹絲)로 흑립(黑笠)과 같이 만든 뒤, 다시 그 위에 베를 입혀 만든다. 백포립(白布笠)이라고도 한다. 이 백립은 상복(喪服)에 착용하였다. 국휼(國恤)에 국민이 씀으로써 국상(國喪)을 표하였던 것이며, 또 사인(士人)이 삼년상(三年喪)을 치르고 담제(禫祭 : 대상 다음다음 달에 지내는 제사)까지 가는 동안에 평량자(平凉子 : 패랭이) 대신 쓰기도 하였다. 백립의 착용에 대한 논의는 조선시대에 수차례 있어, 1454년(단종 2) 12월에 모든 벼슬아치들이 백립을 착용하고 궐내에 출입하는 것을 금하였고, 1466년(세조 12) 음력 3월에도 대소행행(大小行行) 시에 시위인원(호위병)의 백립착용을 금하였다. 1469년(예종 1)에도 일반의 백립착용을 일체 금하고, 반면에 국상 때의 착용을 허락하였으며...
백립 (白笠)
흰 베로 만든 갓. # 내용 가늘게 쪼갠 죽사(竹絲)로 흑립(黑笠)과 같이 만든 뒤, 다시 그 위에 베를 입혀 만든다. 백포립(白布笠)이라고도 한다. 이 백립은 상복(喪服)에 착용하였다. 국휼(國恤)에 국민이 씀으로써 국상(國喪)을 표하였던 것이며, 또 사인(士人)이 삼년상(三年喪)을 치르고 담제(禫祭 : 대상 다음다음 달에 지내는 제사)까지 가는 동안에 평량자(平凉子 : 패랭이) 대신 쓰기도 하였다. 백립의 착용에 대한 논의는 조선시대에 수차례 있어, 1454년(단종 2) 12월에 모든 벼슬아치들이 백립을 착용하고 궐내에 출입하는 것을 금하였고, 1466년(세조 12) 음력 3월에도 대소행행(大小行行) 시에 시위인원(호위병)의 백립착용을 금하였다. 1469년(예종 1)에도 일반의 백립착용을 일체 금하고, 반면에 국상 때의 착용을 허락하였으며...
궁중 잔치 때 춤을 추는 무동(舞童)이 쓰던 건(巾). # 내용 그 모양은 복두(幞頭)와 비슷하여 포(布)로 만들고 능각(稜角 : 뾰족한 모)이 있으며, 무(武)에 양각(兩脚)이 있다. 다만 복두와 다른 것은 복두는 전후단(前後段)이 있어 전단은 낮고 후단은 조금 높은데 비하여 각건은 전후단이 없이 경사져 있으며 앞부분을 제외한 정부(頂部) 둘레와 중앙에 세로로 백선으로 장식하고 있다. 당시 무동의 복장은 이 각건에 흑선(黑襈 : 옷의 가장자리를 흑색 헝겊으로 두른 것)을 두른 백색 중단을 입고 그 위에 홍포(紅袍)를 덧입고 남야대(藍也帶 : 남색의 띠)를 띠었으며 흑화를 신었다. - 『진찬의궤(進饌儀軌)』 - 『진서(晉書)』
각건 (角巾)
궁중 잔치 때 춤을 추는 무동(舞童)이 쓰던 건(巾). # 내용 그 모양은 복두(幞頭)와 비슷하여 포(布)로 만들고 능각(稜角 : 뾰족한 모)이 있으며, 무(武)에 양각(兩脚)이 있다. 다만 복두와 다른 것은 복두는 전후단(前後段)이 있어 전단은 낮고 후단은 조금 높은데 비하여 각건은 전후단이 없이 경사져 있으며 앞부분을 제외한 정부(頂部) 둘레와 중앙에 세로로 백선으로 장식하고 있다. 당시 무동의 복장은 이 각건에 흑선(黑襈 : 옷의 가장자리를 흑색 헝겊으로 두른 것)을 두른 백색 중단을 입고 그 위에 홍포(紅袍)를 덧입고 남야대(藍也帶 : 남색의 띠)를 띠었으며 흑화를 신었다. - 『진찬의궤(進饌儀軌)』 - 『진서(晉書)』
백관이 관복(官服)에 두르던 띠. # 내용 착용자의 신분과 계급에 따라 차별을 두었다. 관원이 공복 등에 띠를 두르던 것은 신라시대에 이미 제도화되었고, 고려에서는 계급에 따라 구분하여 제도화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더욱 발달되어 계급에 따라 장식이 다양해졌다. 조선 말기 각대를 보면 가죽바탕에 비단으로 싸고 그 위에 석줄이나 다섯줄의 금줄 혹은 검정줄을 그어 띠의 바닥[帶鞓]을 만들었다, 그리고 양끝은 장방형의 띠돈[大銙]과 걸이쇠[鉸具]를 붙여 띠의 앞 중심에 오도록 하였다. 그 양옆은 작은 장방형의 띠돈[小銙]을 대고 다시 그 양옆은 심엽형(心葉形)의 띠돈을 간격을 두어 붙이고, 뒷면에는 장방형의 띠돈을 연결해 붙였다. 띠의 길이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나 가슴둘레보다 커서 보통 120㎝ 정도이며...
각대 (角帶)
백관이 관복(官服)에 두르던 띠. # 내용 착용자의 신분과 계급에 따라 차별을 두었다. 관원이 공복 등에 띠를 두르던 것은 신라시대에 이미 제도화되었고, 고려에서는 계급에 따라 구분하여 제도화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더욱 발달되어 계급에 따라 장식이 다양해졌다. 조선 말기 각대를 보면 가죽바탕에 비단으로 싸고 그 위에 석줄이나 다섯줄의 금줄 혹은 검정줄을 그어 띠의 바닥[帶鞓]을 만들었다, 그리고 양끝은 장방형의 띠돈[大銙]과 걸이쇠[鉸具]를 붙여 띠의 앞 중심에 오도록 하였다. 그 양옆은 작은 장방형의 띠돈[小銙]을 대고 다시 그 양옆은 심엽형(心葉形)의 띠돈을 간격을 두어 붙이고, 뒷면에는 장방형의 띠돈을 연결해 붙였다. 띠의 길이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다르나 가슴둘레보다 커서 보통 120㎝ 정도이며...
삼·노 따위로 삼은 신. 미투리는 선비들이 맑은 날 나들이에 신었으며, 조선 말기에는 종이미투리와 미혼남녀의 장식신인 꽃미투리도 있었다. 『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類選)』에서는 왕골신이나 망혜(芒鞋)는 가난한 사람의 신이었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미투리도 신분에 따라 그 재료나 구조가 달라졌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미투리는 조선시대 서민층 상류계급에서 신었던 대표적인 신이라 하겠다. - 『한국복식사연구』(유희경,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80) - 『조선상식(朝鮮常識)』(최남선, 동명사, 1948) - 『조선복식고(朝鮮服飾考)』(이여성, 백양당, 1947) - 「화제(靴制)」(조효순, 『한국(韓國)의 복식(服飾)』, 문화재관리국, 1982)
미투리
삼·노 따위로 삼은 신. 미투리는 선비들이 맑은 날 나들이에 신었으며, 조선 말기에는 종이미투리와 미혼남녀의 장식신인 꽃미투리도 있었다. 『성호사설유선(星湖僿說類選)』에서는 왕골신이나 망혜(芒鞋)는 가난한 사람의 신이었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미투리도 신분에 따라 그 재료나 구조가 달라졌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미투리는 조선시대 서민층 상류계급에서 신었던 대표적인 신이라 하겠다. - 『한국복식사연구』(유희경, 이화여자대학교출판부, 1980) - 『조선상식(朝鮮常識)』(최남선, 동명사, 1948) - 『조선복식고(朝鮮服飾考)』(이여성, 백양당, 1947) - 「화제(靴制)」(조효순, 『한국(韓國)의 복식(服飾)』, 문화재관리국, 1982)
세종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옥색을 띈 명주 재질의 쓰개용 장옷. # 내용 1979년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옥색 명주 장옷은 착용자는 분명하지 않으나 고름이 달린 위치는 조선 말기 쓰개 전용의 장옷임을 말해 준다. 개화기 이후 유일한 여성의 포제(袍制)인 두루마기와 비교할 때 매우 크고 길다. 혜원신윤복(申潤福)의 풍속화에서 볼 수 있듯이, 장옷은 여성용 쓰개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조선 후기의 착장법이다. 조선 전기에는 쓰개보다는 오히려 두루마기처럼 겉옷으로 착용하였다. 장옷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많은 양이 출토되고 있다. 여자의 포(袍)로 모시 홑 장옷에서부터 솜장옷, 솜누비 장옷 등, 다양한 구성법이 확인된다. 이는 사계절에 장옷이 착용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성인 여자만이 아니라 어린...
옥색 명주 장옷 (玉色 明紬 장옷)
세종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옥색을 띈 명주 재질의 쓰개용 장옷. # 내용 1979년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옥색 명주 장옷은 착용자는 분명하지 않으나 고름이 달린 위치는 조선 말기 쓰개 전용의 장옷임을 말해 준다. 개화기 이후 유일한 여성의 포제(袍制)인 두루마기와 비교할 때 매우 크고 길다. 혜원신윤복(申潤福)의 풍속화에서 볼 수 있듯이, 장옷은 여성용 쓰개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는 조선 후기의 착장법이다. 조선 전기에는 쓰개보다는 오히려 두루마기처럼 겉옷으로 착용하였다. 장옷은 임진왜란을 전후하여 많은 양이 출토되고 있다. 여자의 포(袍)로 모시 홑 장옷에서부터 솜장옷, 솜누비 장옷 등, 다양한 구성법이 확인된다. 이는 사계절에 장옷이 착용되었음을 의미한다. 또한 성인 여자만이 아니라 어린...
비가 올 때 갓 위에 덮어쓰는 우장(雨裝). # 내용 원래 명칭은 입모(笠帽 : 갓모)이며, 우모(雨帽)라고도 한다. 위가 뾰족하고 아래는 둥그스름하게 퍼져 있어 펼치면 고깔모양이 되고 접으면 홀쭉해서 쥘부채처럼 된다. 갈모지 또는 환지라는 기름을 먹인 종이에 접는 간살마다 대를 가늘게 잘라서 만든 살을 넣고, 꼭대기에 닭의 볏처럼 생긴 꼭지를 단다. 안쪽 중턱의 양옆에 실끈을 달아서 비가 올 때에는 갓 위에 펼쳐쓴 뒤 이 끈을 턱밑에 매어 고정시킨다. 언제부터 사용하게 되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조선 초기부터 갓을 쓰기 시작하였고, 선조 때 이제신(李濟臣)이 쓴 『청강선생후청쇄어(淸江先生鯸鯖瑣語)』에는 명종 때를 전후한 입제(笠制)의 설명 중에 우모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에 이미 널리 사용되고...
갈모 (갈帽)
비가 올 때 갓 위에 덮어쓰는 우장(雨裝). # 내용 원래 명칭은 입모(笠帽 : 갓모)이며, 우모(雨帽)라고도 한다. 위가 뾰족하고 아래는 둥그스름하게 퍼져 있어 펼치면 고깔모양이 되고 접으면 홀쭉해서 쥘부채처럼 된다. 갈모지 또는 환지라는 기름을 먹인 종이에 접는 간살마다 대를 가늘게 잘라서 만든 살을 넣고, 꼭대기에 닭의 볏처럼 생긴 꼭지를 단다. 안쪽 중턱의 양옆에 실끈을 달아서 비가 올 때에는 갓 위에 펼쳐쓴 뒤 이 끈을 턱밑에 매어 고정시킨다. 언제부터 사용하게 되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으나 조선 초기부터 갓을 쓰기 시작하였고, 선조 때 이제신(李濟臣)이 쓴 『청강선생후청쇄어(淸江先生鯸鯖瑣語)』에는 명종 때를 전후한 입제(笠制)의 설명 중에 우모에 대한 것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중기에 이미 널리 사용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