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김형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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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사단(Young Korean Academy, 興士團)은 일제강점기 실력 양성 운동에 의한 항일 운동 단체로 출발하여 해방 후에는 민족사적 과제인 민족 통일, 민주주의 발전, 건전한 시민과 청소년 육성을 위해 힘쓴 사회교육단체이자 시민사회단체이다. 1913년 5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安昌浩)의 주도로 조선 8도를 대표한 발기인 25명으로 조직되었다.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해산되었다가 1963년 7월에 부활하여 청소년 수련을 위한 아카데미운동을 전개하는 등 시민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크게 이바지했다.
흥사단 (興士團)
흥사단(Young Korean Academy, 興士團)은 일제강점기 실력 양성 운동에 의한 항일 운동 단체로 출발하여 해방 후에는 민족사적 과제인 민족 통일, 민주주의 발전, 건전한 시민과 청소년 육성을 위해 힘쓴 사회교육단체이자 시민사회단체이다. 1913년 5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安昌浩)의 주도로 조선 8도를 대표한 발기인 25명으로 조직되었다.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해산되었다가 1963년 7월에 부활하여 청소년 수련을 위한 아카데미운동을 전개하는 등 시민운동과 민주화 운동에 크게 이바지했다.
강태성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발안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수원군 향남면에서 태어나 성장하였고, 1919년 향남면 발안 장터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당시 수원 지역 독립운동은 크게 확산되는 분위기였다. 일제는 이를 억압하고자 4월 15일 제암리에 나타나 주민들을 제암리교회에 가두고 방화하는 한편, 총격을 가하는 만행을 저질렸다. 강태성은 이때 제암리교회에서 부인과 함께 순국하였다.
강태성 (姜太成)
강태성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발안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수원군 향남면에서 태어나 성장하였고, 1919년 향남면 발안 장터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당시 수원 지역 독립운동은 크게 확산되는 분위기였다. 일제는 이를 억압하고자 4월 15일 제암리에 나타나 주민들을 제암리교회에 가두고 방화하는 한편, 총격을 가하는 만행을 저질렸다. 강태성은 이때 제암리교회에서 부인과 함께 순국하였다.
구낙서는 일제강점기, 서울 시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3 · 1운동 당시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에 크게 자극을 받았다. 만세운동 열기는 지방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서울은 3월 하순에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3월 27일 야간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에 참가한 후, 미행하던 일본 경찰에 의해 사망하였다. 구낙서의 참혹한 죽음은 선교사에 의해 알려져 일제의 야만적이고 잔인한 폭력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게 된 사건이 되었다.
구낙서 (具洛書)
구낙서는 일제강점기, 서울 시내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3 · 1운동 당시 시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에 크게 자극을 받았다. 만세운동 열기는 지방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서울은 3월 하순에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3월 27일 야간을 이용하여 만세운동에 참가한 후, 미행하던 일본 경찰에 의해 사망하였다. 구낙서의 참혹한 죽음은 선교사에 의해 알려져 일제의 야만적이고 잔인한 폭력성을 국제사회에 알리게 된 사건이 되었다.
김덕용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발안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향남면 제암리에서 태어났으며, 1919년 3월 31일 향남면 발안 장터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당시 수원 지역 독립운동이 확산되며 격렬해지자 일본 군인은 대대적인 보복에 나섰다. 4월 15일 제암리에 나타난 일제수비대는 주민들을 제암리교회에 가두고 방화하는 한편, 총격을 가하는 만행을 저질렸다. 이때 김덕용도 주민들과 함께 순국하였다.
김덕용 (金德用)
김덕용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발안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향남면 제암리에서 태어났으며, 1919년 3월 31일 향남면 발안 장터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당시 수원 지역 독립운동이 확산되며 격렬해지자 일본 군인은 대대적인 보복에 나섰다. 4월 15일 제암리에 나타난 일제수비대는 주민들을 제암리교회에 가두고 방화하는 한편, 총격을 가하는 만행을 저질렸다. 이때 김덕용도 주민들과 함께 순국하였다.
김성열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발안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수원군 팔탄면 고주리 출신으로 천도교 전교사로서 구국동지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향남면 발안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하는 등 화성 지역 항일운동을 확산시켰다. 4월 15일 제암리 학살사건을 저지른 일본 수비대에 의해 고주리에서 김성열을 포함한 일가족 6명은 무참하게 살해되어 순국하였다.
김성열 (金聖烈)
김성열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발안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수원군 팔탄면 고주리 출신으로 천도교 전교사로서 구국동지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향남면 발안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하는 등 화성 지역 항일운동을 확산시켰다. 4월 15일 제암리 학살사건을 저지른 일본 수비대에 의해 고주리에서 김성열을 포함한 일가족 6명은 무참하게 살해되어 순국하였다.
김세열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발안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수원군 팔탄면 고주리에서 태어났으며, 향남면 발안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김성열의 동생으로 발안 장터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5일 제암리 학살사건을 저지른 일본 수비대에 의해 고주리에서 김세열을 포함한 일가족 6명은 무참하게 살해되어 순국하였다.
김세열 (金世烈)
김세열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발안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수원군 팔탄면 고주리에서 태어났으며, 향남면 발안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김성열의 동생으로 발안 장터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5일 제암리 학살사건을 저지른 일본 수비대에 의해 고주리에서 김세열을 포함한 일가족 6명은 무참하게 살해되어 순국하였다.
김순서는 일제강점기,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 양성면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1일 원곡면 · 양성면 주민이 연합한 독립만세시위를 이끌었다. 시위 군중이 2,000여 명으로 늘어나자 김순서는 앞장서서 원곡면사무소, 순사주재소 등의 문서와 물품 등을 불태우고 양성우편소의 전화선을 절단하는 등 일제 식민기관에 직접적인 무력을 행사하였다. 일본 군경에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김순서 (金順西)
김순서는 일제강점기, 경기도 안성군 원곡면 · 양성면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1일 원곡면 · 양성면 주민이 연합한 독립만세시위를 이끌었다. 시위 군중이 2,000여 명으로 늘어나자 김순서는 앞장서서 원곡면사무소, 순사주재소 등의 문서와 물품 등을 불태우고 양성우편소의 전화선을 절단하는 등 일제 식민기관에 직접적인 무력을 행사하였다. 일본 군경에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김연방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수원군 우정면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화수리에서 태어나 관직 생활을 하다가 을사늑약 이후 낙향하여 고향 지사들과 국채보상운동과 사립학교설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우정면 일대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후원하는 등 지역사회 명망가로 활동하였다. 1919년 4월 13일 발안에 도착한 일본군에 의해 집에서 살해되었다.
김연방 (金然昉)
김연방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수원군 우정면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화수리에서 태어나 관직 생활을 하다가 을사늑약 이후 낙향하여 고향 지사들과 국채보상운동과 사립학교설립운동에 참여하였다. 우정면 일대에서 일어난 만세운동을 후원하는 등 지역사회 명망가로 활동하였다. 1919년 4월 13일 발안에 도착한 일본군에 의해 집에서 살해되었다.
김재항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안성군 죽산 지역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죽산 지역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4월 1일부터 3일까지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죽산 장날인 4월 2일에 시위 군중은 2,000여 명으로 늘어나 이죽면사무소와 죽산경찰관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김재항은 4월 2일과 3일 삼죽면 덕산리 주민들과 만세운동을 하다가 3일 일본 수비대의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김재항 (金在恒)
김재항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안성군 죽산 지역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죽산 지역 독립만세운동은 1919년 4월 1일부터 3일까지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죽산 장날인 4월 2일에 시위 군중은 2,000여 명으로 늘어나 이죽면사무소와 죽산경찰관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김재항은 4월 2일과 3일 삼죽면 덕산리 주민들과 만세운동을 하다가 3일 일본 수비대의 총탄에 맞아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김정헌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발안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향남면 제암리에서 태어나 동학에 입문하여 농민운동에 참여하였다. 천도교인에서 기독교인으로 개종한 후, 청년들 모아 개혁운동을 도모하였다. 1919년 4월 5일 발안 장터에서 시위행진을 하였고 시위가 격렬하게 전개되자 일본군은 4월 15일 제암리, 고주리, 수촌리 등지에서 학살을 저질렀다. 이때 김정헌은 제암리교회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김정헌 (金正憲)
김정헌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발안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향남면 제암리에서 태어나 동학에 입문하여 농민운동에 참여하였다. 천도교인에서 기독교인으로 개종한 후, 청년들 모아 개혁운동을 도모하였다. 1919년 4월 5일 발안 장터에서 시위행진을 하였고 시위가 격렬하게 전개되자 일본군은 4월 15일 제암리, 고주리, 수촌리 등지에서 학살을 저질렀다. 이때 김정헌은 제암리교회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김주남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발안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895년 수원군 팔탄면에서 태어났으며, 큰아버지는 화성 지역 천도교 지도자 김흥렬, 중부는 구국동지회(救國同志會)를 조직한 독립운동가 김성열이다. 3월 31일 발안 장터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온 가족이 동참하는 등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후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당하다가 풀려났다. 제암리 학살사건 이후 고주리에서 김주남 가족 6명이 일본군에게 무참히 살해되었다.
김주남 (金周男)
김주남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발안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895년 수원군 팔탄면에서 태어났으며, 큰아버지는 화성 지역 천도교 지도자 김흥렬, 중부는 구국동지회(救國同志會)를 조직한 독립운동가 김성열이다. 3월 31일 발안 장터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온 가족이 동참하는 등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후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당하다가 풀려났다. 제암리 학살사건 이후 고주리에서 김주남 가족 6명이 일본군에게 무참히 살해되었다.
김주업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발안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큰아버지는 화성 지역 천도교 지도자 김흥렬, 중부는 구국동지회를 조직한 김성열이었다. 3월 31일 향남면 발안 장터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온 가족이 동참하였다. 이후 체포되어 수원경찰서 등에서 온갖 고문을 당하다가 풀려났다. 제암리 학살사건 이후 김주업은 고주리에서 가족 6명과 함께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김주업 (金周業)
김주업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발안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큰아버지는 화성 지역 천도교 지도자 김흥렬, 중부는 구국동지회를 조직한 김성열이었다. 3월 31일 향남면 발안 장터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온 가족이 동참하였다. 이후 체포되어 수원경찰서 등에서 온갖 고문을 당하다가 풀려났다. 제암리 학살사건 이후 김주업은 고주리에서 가족 6명과 함께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김진성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870년경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중 3 · 1운동 소식을 듣고 백남식, 이용화 등과 사발통문을 돌리고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동지들과 3월 28일 가납리로 나아가 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헌병의 발포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김진성 (金辰成)
김진성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양주군 광적면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870년경 양주군 광적면 효촌리에서 태어났다. 고향에서 농업에 종사하던 중 3 · 1운동 소식을 듣고 백남식, 이용화 등과 사발통문을 돌리고 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동지들과 3월 28일 가납리로 나아가 면사무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본 헌병의 발포로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김흥렬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발안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천도교 전교사와 순회교사로서 청년들에게 항일의식을 일깨웠다. 3 · 1운동 소식을 접하고 발안 장터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1919년 3월 31일 가족 6명이 마을 주민들과 만세운동에 참가하였고, 이후 검거되어 고문을 당한 후 풀려났다. 4월 15일 제암리 학살사건을 저지른 일본 수비대에 의해 고주리 김흥렬 일가 6명은 무참하게 살해당하였다.
김흥렬 (金興烈)
김흥렬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발안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천도교 전교사와 순회교사로서 청년들에게 항일의식을 일깨웠다. 3 · 1운동 소식을 접하고 발안 장터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1919년 3월 31일 가족 6명이 마을 주민들과 만세운동에 참가하였고, 이후 검거되어 고문을 당한 후 풀려났다. 4월 15일 제암리 학살사건을 저지른 일본 수비대에 의해 고주리 김흥렬 일가 6명은 무참하게 살해당하였다.
김흥복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발안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31일 발안 장터 만세운동에 일가족과 마을 주민들이 함께 참가하였다. 김흥복의 가족은 발안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후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당한 후 풀려났으나, 제암리 학살사건을 저지른 일본 수비대에 의해 고주리에서 김흥복을 비롯한 일가족 6명은 무참하게 살해되어 순국하였다.
김흥복 (金興福)
김흥복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발안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31일 발안 장터 만세운동에 일가족과 마을 주민들이 함께 참가하였다. 김흥복의 가족은 발안 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후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당한 후 풀려났으나, 제암리 학살사건을 저지른 일본 수비대에 의해 고주리에서 김흥복을 비롯한 일가족 6명은 무참하게 살해되어 순국하였다.
남위는 일제강점기, 서울에서 일어난 3 · 1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00년 9월 함경남도 홍원에서 태어났다. 보성전문학교 2학년 재학 중 동료들과 탑골공원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시위 군중을 이끌었다. 특히 3월 5일 남대문역 앞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감 후 고문 후유증으로 1919년 11월 21일에 사망하였다.
남위 (南偉)
남위는 일제강점기, 서울에서 일어난 3 · 1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 1900년 9월 함경남도 홍원에서 태어났다. 보성전문학교 2학년 재학 중 동료들과 탑골공원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시위 군중을 이끌었다. 특히 3월 5일 남대문역 앞 만세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감 후 고문 후유증으로 1919년 11월 21일에 사망하였다.
사립경성유치원은 1913년 서울에 설립되었던 친일 관료와 매판자본가 자제를 위한 ‘귀족 유치원’으로서의 유아교육기관이다. 한일 합병 조약 이후 이완용 등 친일 관료와 조진태 등 매판자본가들은 ‘일본어 만능 시대’에 부응하는 사립경성유치원을 설립·운영하였다. 원장은 구와바라 고이치, 보모는 교구 사다코, 조수는 장옥식이 맡았다. 30명 원아를 모집한 가운데 개원하였다. 수업도 철저하게 일본어로 실시하는 등 일본 문화나 생활양식 등이 그대로 원아들에게 주입되도록 하였다. 사립경성유치원은 1920년대 어느 시점에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사립경성유치원 (私立京城幼稚園)
사립경성유치원은 1913년 서울에 설립되었던 친일 관료와 매판자본가 자제를 위한 ‘귀족 유치원’으로서의 유아교육기관이다. 한일 합병 조약 이후 이완용 등 친일 관료와 조진태 등 매판자본가들은 ‘일본어 만능 시대’에 부응하는 사립경성유치원을 설립·운영하였다. 원장은 구와바라 고이치, 보모는 교구 사다코, 조수는 장옥식이 맡았다. 30명 원아를 모집한 가운데 개원하였다. 수업도 철저하게 일본어로 실시하는 등 일본 문화나 생활양식 등이 그대로 원아들에게 주입되도록 하였다. 사립경성유치원은 1920년대 어느 시점에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