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류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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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동맹회는 일제강점기인 1922년 2월 서울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조직하였던 사상단체이다. ‘사회혁명당[서울파]’의 합법적 외곽 사상단체로 조직되었다. 심상완(沈相完), 신일용(辛日鎔), 이영(李英), 장병천(張炳天) 등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인류 생활의 공존공영적(共存共榮的) 진리를 파악하여 민중문화의 건설을 목적으로 한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1922년 3월 31일에 무산자동지회(無産者同志會)와 함께 통합하여 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로 발전적 해체를 하였다.
신인동맹회 (新人同盟會)
신인동맹회는 일제강점기인 1922년 2월 서울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조직하였던 사상단체이다. ‘사회혁명당[서울파]’의 합법적 외곽 사상단체로 조직되었다. 심상완(沈相完), 신일용(辛日鎔), 이영(李英), 장병천(張炳天) 등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인류 생활의 공존공영적(共存共榮的) 진리를 파악하여 민중문화의 건설을 목적으로 한다.“는 입장을 내세웠다. 1922년 3월 31일에 무산자동지회(無産者同志會)와 함께 통합하여 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로 발전적 해체를 하였다.
신흥학우단은 1913년 5월 만주에서 신흥강습소와 연계되어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이다. 만주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에서 창단되어 길림성(吉林省)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서구(西溝) 대화사(大花斜)에 본부를 두었다. 처음에는 강토를 회복한다는 ’다물단(多勿團)‘으로 하였다가, 신흥학우단[혹은 신흥교우단(新興校友團)]으로 불렸다. 신흥강습소 교직원과 학생을 중심으로 결성한 이 단체는 1910년대 만주 지역 항일 독립운동의 핵심 조직이었다.
신흥학우단 (新興學友團)
신흥학우단은 1913년 5월 만주에서 신흥강습소와 연계되어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이다. 만주 통화현(通化縣) 합니하(哈泥河)에서 창단되어 길림성(吉林省)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 서구(西溝) 대화사(大花斜)에 본부를 두었다. 처음에는 강토를 회복한다는 ’다물단(多勿團)‘으로 하였다가, 신흥학우단[혹은 신흥교우단(新興校友團)]으로 불렸다. 신흥강습소 교직원과 학생을 중심으로 결성한 이 단체는 1910년대 만주 지역 항일 독립운동의 핵심 조직이었다.
연정회는 1923년 말부터 민족주의 계열의 일부 세력들이 정치운동의 일환으로 추진했던 자치운동단체이다. 민족주의 계열에서 추진했던 실력양성운동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민족주의 계열의 일부 세력들이 정치운동의 일환으로 ‘자치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1923년 12월에 연정회를 조직하고자 하였으나, 절대 독립에 대한 부정은 사회주의 계열과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켜서 계획은 무산되었다. 1925년 이후 국내외 정세의 변화 속에서 부활 계획이 다시 시도되었으나, 1927년 신간회의 결성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연정회 (硏政會)
연정회는 1923년 말부터 민족주의 계열의 일부 세력들이 정치운동의 일환으로 추진했던 자치운동단체이다. 민족주의 계열에서 추진했던 실력양성운동이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민족주의 계열의 일부 세력들이 정치운동의 일환으로 ‘자치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1923년 12월에 연정회를 조직하고자 하였으나, 절대 독립에 대한 부정은 사회주의 계열과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의 큰 반발을 불러일으켜서 계획은 무산되었다. 1925년 이후 국내외 정세의 변화 속에서 부활 계획이 다시 시도되었으나, 1927년 신간회의 결성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조선물산장려운동(朝鮮物産奬勵運動)은 1920년대 초부터 1930년대 말까지 실력양성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경제자립운동이다. 이 운동은 3 · 1운동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경제적인 영역에서 민족 역량 개발을 목적으로 하였다. 1920~1930년대 민족주의 계열이 주도해서 조선물산의 애용을 장려하면서 조선인 기업의 활동을 촉진한 경제자립운동이었다.
조선물산장려운동 (朝鮮物産奬勵運動)
조선물산장려운동(朝鮮物産奬勵運動)은 1920년대 초부터 1930년대 말까지 실력양성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경제자립운동이다. 이 운동은 3 · 1운동 이후에 나타난 새로운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경제적인 영역에서 민족 역량 개발을 목적으로 하였다. 1920~1930년대 민족주의 계열이 주도해서 조선물산의 애용을 장려하면서 조선인 기업의 활동을 촉진한 경제자립운동이었다.
태평양문제연구회는 1925년 11월 동아시아 ‧ 태평양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결성된 민족주의 계열의 정치단체이다. 1925년에 개최된 제1차 태평양회의에 참석하고 국내에 돌아온 신흥우, 유억겸, 송진우 등은 태평양문제연구회 조선지회를 설립하여 정치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1925년 11월 28일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창립모임이 열렸다. 태평양문제연구회 조선지회는 중앙기독교청년회 및 『동아일보』 ‧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한 국내 민족주의 세력이 중심이 되었다. 또한, 이승만과 연결된 비밀조직인 흥업구락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태평양문제연구회 (太平洋問題硏究會)
태평양문제연구회는 1925년 11월 동아시아 ‧ 태평양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결성된 민족주의 계열의 정치단체이다. 1925년에 개최된 제1차 태평양회의에 참석하고 국내에 돌아온 신흥우, 유억겸, 송진우 등은 태평양문제연구회 조선지회를 설립하여 정치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1925년 11월 28일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창립모임이 열렸다. 태평양문제연구회 조선지회는 중앙기독교청년회 및 『동아일보』 ‧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한 국내 민족주의 세력이 중심이 되었다. 또한, 이승만과 연결된 비밀조직인 흥업구락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
흥업구락부는 1925년 3월 이승만의 독립혁명동지회와 연계되어 서울에서 조직된 비밀 독립운동단체이다. 서울 신흥우의 집에서 비밀리에 흥업구락부가 조직되었으며, 창립회원 대부분은 YMCA와 밀접하게 연관을 가진 민족주의 계열의 인물이었다. 이들은 실력양성운동을 수행하였으며, 사회주의 계열과 함께 민족연합전선인 신간회를 결성하는 데 참여하였다.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관련자 54명이 체포되었다. 1938년 9월 일제는 ‘흥업구락부 사건’ 관련자에게 ‘전향 성명서’를 받은 후, 이들을 기소유예 처분으로 석방하였다.
흥업구락부 (興業俱樂部)
흥업구락부는 1925년 3월 이승만의 독립혁명동지회와 연계되어 서울에서 조직된 비밀 독립운동단체이다. 서울 신흥우의 집에서 비밀리에 흥업구락부가 조직되었으며, 창립회원 대부분은 YMCA와 밀접하게 연관을 가진 민족주의 계열의 인물이었다. 이들은 실력양성운동을 수행하였으며, 사회주의 계열과 함께 민족연합전선인 신간회를 결성하는 데 참여하였다.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관련자 54명이 체포되었다. 1938년 9월 일제는 ‘흥업구락부 사건’ 관련자에게 ‘전향 성명서’를 받은 후, 이들을 기소유예 처분으로 석방하였다.
흥업단(興業團)은 1919년 7월 만주에서 대종교인(大倧敎人)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이다. 봉천성(奉天省) 무송현(撫松縣)에서 항일운동을 위해 윤세복(尹世復)이 대종교인과 협의해서 조직하였다. 이 지역 이주 한인(韓人)의 권익을 옹호하고,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면서 독립군 기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1921년 10월 백두산 지역의 여러 독립운동단체와 함께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에 통합되었다.
흥업단 (興業團)
흥업단(興業團)은 1919년 7월 만주에서 대종교인(大倧敎人)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이다. 봉천성(奉天省) 무송현(撫松縣)에서 항일운동을 위해 윤세복(尹世復)이 대종교인과 협의해서 조직하였다. 이 지역 이주 한인(韓人)의 권익을 옹호하고, 청년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면서 독립군 기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1921년 10월 백두산 지역의 여러 독립운동단체와 함께 대한국민단(大韓國民團)에 통합되었다.
대동민우회는 1936년 9월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전향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친일 단체이다. 일제의 침략 전쟁을 적극 지지하였으며, 참가자들은 1920년대 사회주의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던 인물이었다. 이 단체는 식민지 조선에서 결성된 최초의 전향자 친일 단체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나자 일제의 침략 전쟁을 지지하는 성명서와 시국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1938년 6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 가입하고, 1941년 12월 미국 유학의 경험이 있는 인물을 중심으로 미영배격혈전대동맹을 조직하였다.
대동민우회 (大東民友會)
대동민우회는 1936년 9월 민족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전향한 인물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친일 단체이다. 일제의 침략 전쟁을 적극 지지하였으며, 참가자들은 1920년대 사회주의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던 인물이었다. 이 단체는 식민지 조선에서 결성된 최초의 전향자 친일 단체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나자 일제의 침략 전쟁을 지지하는 성명서와 시국 강연회를 개최하였다. 1938년 6월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 가입하고, 1941년 12월 미국 유학의 경험이 있는 인물을 중심으로 미영배격혈전대동맹을 조직하였다.
대동청년단은 1909년 10월 경상남도 동래에서 조직되어 만주까지 확대된 항일 비밀결사이다. 일제에 의해 강제 병합되기 직전인 1909년 10월 경상도 지역의 개신(改新) 유학자와 근대적 교육을 받은 청년을 중심으로 조직된 국권 회복 운동 단체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 및 독립운동의 연락 기지 및 자금 지원 역할을 담당하였다.
대동청년단 (大東靑年團)
대동청년단은 1909년 10월 경상남도 동래에서 조직되어 만주까지 확대된 항일 비밀결사이다. 일제에 의해 강제 병합되기 직전인 1909년 10월 경상도 지역의 개신(改新) 유학자와 근대적 교육을 받은 청년을 중심으로 조직된 국권 회복 운동 단체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 및 독립운동의 연락 기지 및 자금 지원 역할을 담당하였다.
무산자동맹회는 1922년 3월 서울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조직하였던 사상단체이다. 무산자동지회(無産者同志會)와 신인동맹회(新人同盟會)가 통합하여 설립된 단체이다. 1922년 12월 22일 서울 천도교당에서 개최한 강연회에는 1,500여 명의 청중이 참여하였고, 참석자 가운데 양화공(洋靴工)만도 200여 명에 달하였다. 1925년 4월 사회주의단체인 화요회(火曜會) · 북풍회(北風會) · 조선노동당과 함께 ‘4단체 합동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1926년 4월 이들 세 단체와 함께 정우회(正友會)를 발족시키고 발전적으로 해산되었다.
무산자동맹회 (無産者同盟會)
무산자동맹회는 1922년 3월 서울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조직하였던 사상단체이다. 무산자동지회(無産者同志會)와 신인동맹회(新人同盟會)가 통합하여 설립된 단체이다. 1922년 12월 22일 서울 천도교당에서 개최한 강연회에는 1,500여 명의 청중이 참여하였고, 참석자 가운데 양화공(洋靴工)만도 200여 명에 달하였다. 1925년 4월 사회주의단체인 화요회(火曜會) · 북풍회(北風會) · 조선노동당과 함께 ‘4단체 합동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1926년 4월 이들 세 단체와 함께 정우회(正友會)를 발족시키고 발전적으로 해산되었다.
무산자동지회는 일제강점기인 1922년 1월 서울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조직하였던 사상단체이다. 1922년 1월 19일 ‘조선공산당’의 합법적 외곽 사상단체로 서울에서 조직되었으며, 식민지 조선에서 결성된 최초의 합법적 사상단체였다. 이 단체는 청년 ‧ 노동 ‧ 농민 단체를 통일적으로 결속하는 활동을 수행하였고, ‘사회운동유지간담회’를 개최하여 정세와 정책에 관한 토론을 이끌어 나갔다. 발족 3개월 뒤인 1922년 3월 31일에 신인동맹회(新人同盟會)와 함께 통합하여 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로 발전적 해체를 하였다.
무산자동지회 (無産者同志會)
무산자동지회는 일제강점기인 1922년 1월 서울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조직하였던 사상단체이다. 1922년 1월 19일 ‘조선공산당’의 합법적 외곽 사상단체로 서울에서 조직되었으며, 식민지 조선에서 결성된 최초의 합법적 사상단체였다. 이 단체는 청년 ‧ 노동 ‧ 농민 단체를 통일적으로 결속하는 활동을 수행하였고, ‘사회운동유지간담회’를 개최하여 정세와 정책에 관한 토론을 이끌어 나갔다. 발족 3개월 뒤인 1922년 3월 31일에 신인동맹회(新人同盟會)와 함께 통합하여 무산자동맹회(無産者同盟會)로 발전적 해체를 하였다.
무정부주의운동(無政府主義運動)은 일제강점기 국가권력인 일제에 저항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개혁하고자 한 운동이다. 압박받고 지배당하는 자들을 중심으로 노동과 자본이란 생산관계에 입각한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를 비판하고 국가권력 등 모든 사회적 권력을 부정하며 절대 자유가 행해지는 사회를 추구한 해방운동이다. 사회주의 계열과는 자본주의 비판에 공조하면서 러시아 공산주의의 당 중심의 볼셰비즘에 비판적이었다. 전시 체제기에 들어가면서 중국 관내에 거주하던 무정부주의자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민족주의 계열과 공동전선을 도모하였다.
무정부주의운동 (無政府主義運動)
무정부주의운동(無政府主義運動)은 일제강점기 국가권력인 일제에 저항하고 자본주의 체제를 개혁하고자 한 운동이다. 압박받고 지배당하는 자들을 중심으로 노동과 자본이란 생산관계에 입각한 자본주의적 경제체제를 비판하고 국가권력 등 모든 사회적 권력을 부정하며 절대 자유가 행해지는 사회를 추구한 해방운동이다. 사회주의 계열과는 자본주의 비판에 공조하면서 러시아 공산주의의 당 중심의 볼셰비즘에 비판적이었다. 전시 체제기에 들어가면서 중국 관내에 거주하던 무정부주의자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민족주의 계열과 공동전선을 도모하였다.
서울청년회는 1921년 1월 경성(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사회주의 사상단체이다. 상해파(上海派)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국내 세력과 대립해서 조직의 주도권을 잡은 후, 당 조직을 지향한 고려공산동맹(高麗共産同盟)이란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이후 전위 조직체인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을 결성하기 위해 화요파(火曜派)와 경쟁을 하다가 1929년 8월 해체되었다. 청년운동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서울청년회 (서울靑年會)
서울청년회는 1921년 1월 경성(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사회주의 사상단체이다. 상해파(上海派)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 국내 세력과 대립해서 조직의 주도권을 잡은 후, 당 조직을 지향한 고려공산동맹(高麗共産同盟)이란 비밀결사를 조직하였다. 이후 전위 조직체인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을 결성하기 위해 화요파(火曜派)와 경쟁을 하다가 1929년 8월 해체되었다. 청년운동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갑자구락부는 1924년 8월 경성에서 재조(在朝) 일본인과 조선인 유력 세력이 함께 조직한 친일 정치 단체이다. 이 단체는 각종 정치 현안에 관해 조사하고 이를 청원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자치론’에 관해서는 독립의 전제가 된다는 이유로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중점을 둔 참정권 청원 운동은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정치적 위상을 강화하는 데 있었다.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일제의 침략 전쟁을 지지하는 시국 대회와 시국 간담회 등을 개최하였다.
갑자구락부 (甲子俱樂部)
갑자구락부는 1924년 8월 경성에서 재조(在朝) 일본인과 조선인 유력 세력이 함께 조직한 친일 정치 단체이다. 이 단체는 각종 정치 현안에 관해 조사하고 이를 청원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자치론’에 관해서는 독립의 전제가 된다는 이유로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중점을 둔 참정권 청원 운동은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정치적 위상을 강화하는 데 있었다.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일제의 침략 전쟁을 지지하는 시국 대회와 시국 간담회 등을 개최하였다.
태서신사는 1897년, 대한제국 학부 편집국에서 발행한 서양 역사 관련 번역서이다. 영국 책 『19세기 역사』를 중국에서 번역한 서양 역사서이다. 이를 1897년 대한제국 학부 편집국에서 한문본과 번역본 2종을 발행하였다. 중국에서 유입된 서적 중 하나로 대한제국시기 근대 지식 형성과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서양의 역사를 통해 치국과 흥국의 방안을 찾고, 자주, 독립, 애국의 사상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태서신사 (泰西新史)
태서신사는 1897년, 대한제국 학부 편집국에서 발행한 서양 역사 관련 번역서이다. 영국 책 『19세기 역사』를 중국에서 번역한 서양 역사서이다. 이를 1897년 대한제국 학부 편집국에서 한문본과 번역본 2종을 발행하였다. 중국에서 유입된 서적 중 하나로 대한제국시기 근대 지식 형성과 보급에 크게 기여하였다. 서양의 역사를 통해 치국과 흥국의 방안을 찾고, 자주, 독립, 애국의 사상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대한학회월보』는 1908년, 일본의 한국 유학생 단체인 대한학회가 발행한 월간지이다. 신교육과 실업 보급을 통한 대한제국의 국력 강화를 주장한다. 이를 위해 일본에 유학온 학생들이 전공 과목을 소개하거나 국내외 시국 관련 연설회 내용 등을 소개하고 있다. 아울러 운동회와 모임 등에 참여했던 각 회원의 동정을 알려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대한학회월보 (大韓學會月報)
『대한학회월보』는 1908년, 일본의 한국 유학생 단체인 대한학회가 발행한 월간지이다. 신교육과 실업 보급을 통한 대한제국의 국력 강화를 주장한다. 이를 위해 일본에 유학온 학생들이 전공 과목을 소개하거나 국내외 시국 관련 연설회 내용 등을 소개하고 있다. 아울러 운동회와 모임 등에 참여했던 각 회원의 동정을 알려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하는 역할도 수행하였다.
제국청년회는 1898년 일본에 파견된 관비 유학생을 중심으로 조직된 친목 단체이다. 1895년 4월 조직되었던 대조선인일본유학생친목회가 1898년 9월 제국청년회로 재결성된 것이다. 연설회, 토론회를 개최하였고, 『제국청년회회보』를 발간하였다. 회원 상호간의 친목과 상호부조를 도모하는 활동을 하다 1903년 2월 정부의 일본 관비유학생 소환령으로 대부분의 회원이 귀국한 뒤 해산하였다.
제국청년회 (第國靑年會)
제국청년회는 1898년 일본에 파견된 관비 유학생을 중심으로 조직된 친목 단체이다. 1895년 4월 조직되었던 대조선인일본유학생친목회가 1898년 9월 제국청년회로 재결성된 것이다. 연설회, 토론회를 개최하였고, 『제국청년회회보』를 발간하였다. 회원 상호간의 친목과 상호부조를 도모하는 활동을 하다 1903년 2월 정부의 일본 관비유학생 소환령으로 대부분의 회원이 귀국한 뒤 해산하였다.
재일조선불교청년회는 1920년 4월 11일 일본 도쿄에서 발족한 재일 조선인의 불교 청년 단체이다. 조선 불교의 미래를 위한 개혁을 목적으로, 정광진 등 11명이 모여 '조선불교유학생학우회'라는 명칭으로 발기총회를 개최하였다. 1921년 4월 제2회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재일조선불교청년회'로 명칭을 바꾸었고, 1931년까지 국내 불교계와의 연계를 통해 불교 개혁에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재일조선불교청년회 (在日朝鮮佛敎靑年會)
재일조선불교청년회는 1920년 4월 11일 일본 도쿄에서 발족한 재일 조선인의 불교 청년 단체이다. 조선 불교의 미래를 위한 개혁을 목적으로, 정광진 등 11명이 모여 '조선불교유학생학우회'라는 명칭으로 발기총회를 개최하였다. 1921년 4월 제2회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재일조선불교청년회'로 명칭을 바꾸었고, 1931년까지 국내 불교계와의 연계를 통해 불교 개혁에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일제강점기 때, 『해파리의 노래』, 『금모래』, 『봄의 노래』 등을 저술한 시인·문학평론가·친일반민족행위자.
김억 (金億)
일제강점기 때, 『해파리의 노래』, 『금모래』, 『봄의 노래』 등을 저술한 시인·문학평론가·친일반민족행위자.
서춘은 일제 강점기 조선일보사 주필, 매일신보 주필 등을 역임한 언론인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94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도쿄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1919년 2·8독립선언의 실행위원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독립 시위를 전개하다가 투옥되었다. 출옥 이후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경제 시평과 해설, 강연 등의 평론 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일보』 주필을 지내면서 조선총독부에서 주최하는 시국강연 등에서 강사로 활동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나, 친일 행적으로 1996년 서훈이 취소되었다.
서춘 (徐椿)
서춘은 일제 강점기 조선일보사 주필, 매일신보 주필 등을 역임한 언론인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1894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나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도쿄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다. 1919년 2·8독립선언의 실행위원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독립 시위를 전개하다가 투옥되었다. 출옥 이후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 동아일보사에 입사하여 경제 시평과 해설, 강연 등의 평론 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일보』 주필을 지내면서 조선총독부에서 주최하는 시국강연 등에서 강사로 활동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나, 친일 행적으로 1996년 서훈이 취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