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배석만"
검색결과 총 33건
김우중은 1967년 섬유수출업체 대우실업 창업 이래 단기간에 국내 굴지의 재벌 대우그룹을 만들어 낸 기업가이다. 수출을 통한 고도성장을 이뤄낸 한국경제의 발전과 궤를 같이하면서 자동차, 조선, 전자, 건설 등을 주력으로 급속하게 성장하였다. 1990년대에는 세계경영을 표방하면서 해외로 사업망을 확장하여, 현대에 이은 재계 서열 2위까지 올랐다. 이를 토대로 세계에서 주목받은 기업인으로 부상하였으나, IMF사태 이후 직면한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1999년 그룹 해체와 함께 경영 일선에서 퇴장하였다.
김우중 (金宇中)
김우중은 1967년 섬유수출업체 대우실업 창업 이래 단기간에 국내 굴지의 재벌 대우그룹을 만들어 낸 기업가이다. 수출을 통한 고도성장을 이뤄낸 한국경제의 발전과 궤를 같이하면서 자동차, 조선, 전자, 건설 등을 주력으로 급속하게 성장하였다. 1990년대에는 세계경영을 표방하면서 해외로 사업망을 확장하여, 현대에 이은 재계 서열 2위까지 올랐다. 이를 토대로 세계에서 주목받은 기업인으로 부상하였으나, IMF사태 이후 직면한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1999년 그룹 해체와 함께 경영 일선에서 퇴장하였다.
신격호는 1948년 일본 롯데, 1967년 한국 롯데제과㈜ 설립을 시작으로 한일 양국에 걸친 거대 재벌 그룹을 만들어 낸 기업인이다.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기반을 잡고, 사업에 성공하였다. 1967년 한국에서도 사업을 시작하여 식품, 관광레저, 유통 서비스업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신격호 (辛格浩)
신격호는 1948년 일본 롯데, 1967년 한국 롯데제과㈜ 설립을 시작으로 한일 양국에 걸친 거대 재벌 그룹을 만들어 낸 기업인이다. 1941년 일본으로 건너가 기반을 잡고, 사업에 성공하였다. 1967년 한국에서도 사업을 시작하여 식품, 관광레저, 유통 서비스업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신발 산업은 일제 시기 고무신 제조로 시작된 오랜 역사를 가진 경공업이자 경제개발기 한국 대표 수출 산업이다. 일제 시기부터 많은 공장들이 가동하였고, 해방 후에도 가장 성장이 뚜렷한 산업이었다. 1960년대 수출 시장이 열리면서 보다 도약했으며, 그 정점이었던 1970~80년대 신발은 대표 수출품이었다. 그러나 1990년을 전후하여 저임금과 OEM 주문 생산의 취약성이 드러나며 빠르게 사양산업화하였다. 이후 제조 기지 해외 이전, 기술 혁신을 통한 제품 차별화, 독자 브랜드 개발 등을 통해 재도약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신발 산업 (신발 産業)
신발 산업은 일제 시기 고무신 제조로 시작된 오랜 역사를 가진 경공업이자 경제개발기 한국 대표 수출 산업이다. 일제 시기부터 많은 공장들이 가동하였고, 해방 후에도 가장 성장이 뚜렷한 산업이었다. 1960년대 수출 시장이 열리면서 보다 도약했으며, 그 정점이었던 1970~80년대 신발은 대표 수출품이었다. 그러나 1990년을 전후하여 저임금과 OEM 주문 생산의 취약성이 드러나며 빠르게 사양산업화하였다. 이후 제조 기지 해외 이전, 기술 혁신을 통한 제품 차별화, 독자 브랜드 개발 등을 통해 재도약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쌍룡양회는 1962년 설립된 시멘트 생산 회사로 쌍룡그룹의 모태가 된 기업이다. 1960년대 국가 주도 하의 본격적인 경제 개발이 시작되면서 산업 건설의 기본 자재인 시멘트 수요 급증을 배경으로 설립되었다. 이후 생산 규모를 급격히 확장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시멘트 회사로 성장하였다. 쌍룡그룹은 1997년 IMF 위기를 계기로 해체되었고, 쌍룡양회도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으나 현재도 1,500만 톤의 시멘트를 생산하여 전국 각지와 해외에 공급하는 한국 대표 시멘트 회사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쌍룡양회 (雙龍洋灰)
쌍룡양회는 1962년 설립된 시멘트 생산 회사로 쌍룡그룹의 모태가 된 기업이다. 1960년대 국가 주도 하의 본격적인 경제 개발이 시작되면서 산업 건설의 기본 자재인 시멘트 수요 급증을 배경으로 설립되었다. 이후 생산 규모를 급격히 확장하며 한국을 대표하는 시멘트 회사로 성장하였다. 쌍룡그룹은 1997년 IMF 위기를 계기로 해체되었고, 쌍룡양회도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으나 현재도 1,500만 톤의 시멘트를 생산하여 전국 각지와 해외에 공급하는 한국 대표 시멘트 회사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1961년 창립된 국내 최대 민간 경제인 단체이다. 1961년 1월 창립된 한국경제협의회를 시작으로 5·16 군사쿠데타 이후 한국경제인연합회로 재출범하였다. 한국 경제 발전에 비례하여 가입 회원사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구성도 국내 산업 전 업종을 망라하게 되면서 1968년 3월 단체명을 전국경제인연합회로 개칭하였다. 국가주도 경제개발이 본격화되는 시점에 설립되어 장기간 정부와 다양한 측면에서 호흡을 맞추면서 공업화와 경제 발전를 이뤄내는 데 역할을 하였다.
전국경제인연합회 (全國經濟人聯合會)
전국경제인연합회는 1961년 창립된 국내 최대 민간 경제인 단체이다. 1961년 1월 창립된 한국경제협의회를 시작으로 5·16 군사쿠데타 이후 한국경제인연합회로 재출범하였다. 한국 경제 발전에 비례하여 가입 회원사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구성도 국내 산업 전 업종을 망라하게 되면서 1968년 3월 단체명을 전국경제인연합회로 개칭하였다. 국가주도 경제개발이 본격화되는 시점에 설립되어 장기간 정부와 다양한 측면에서 호흡을 맞추면서 공업화와 경제 발전를 이뤄내는 데 역할을 하였다.
조진태는 구한말, 일제강점기 조선 경제계의 대표적 친일 기업가이다. 원래 무과에 급제하여 20년간 관직에 있었으나, 갑오개혁 직후에 퇴직하고 기업가로 변신하였다.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식민지화 작업에 편승하여 경제계의 거물로 성장하였다. 한성은행, 대한천일은행, 조선상업은행 등 주로 금융계의 최고 경영자로 활동하였다. 친일 기업가로서 조선총독부 산업조사위원,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하며 일제의 식민 통치에도 적극 가담하였다.
조진태 (趙鎭泰)
조진태는 구한말, 일제강점기 조선 경제계의 대표적 친일 기업가이다. 원래 무과에 급제하여 20년간 관직에 있었으나, 갑오개혁 직후에 퇴직하고 기업가로 변신하였다.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식민지화 작업에 편승하여 경제계의 거물로 성장하였다. 한성은행, 대한천일은행, 조선상업은행 등 주로 금융계의 최고 경영자로 활동하였다. 친일 기업가로서 조선총독부 산업조사위원,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하며 일제의 식민 통치에도 적극 가담하였다.
최창학은 일제강점기 금광 개발로 많은 재산을 축적한 광산업자이자 친일 기업인이다. 1920년대, 고향인 평안북도 구성군(현, 구성시)에서 양질의 금광을 발견하여 삼성 금광을 열고 광산업의 기반을 다졌다. 그의 광산 사업은 날로 번창하였고 평안북도를 중심으로 수십 개의 광구를 보유하였다. 이것을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전반에 걸쳐 미쓰이〔三井〕 광산, 일본 광업 등에 매각하여 큰 부를 일구었다. 조선의 금광왕, 광산왕, 천만장자는 그를 일컫는 수식어였다. 그의 성공 배경에는 친일의 그림자도 드러워져 있다.
최창학 (崔昌學)
최창학은 일제강점기 금광 개발로 많은 재산을 축적한 광산업자이자 친일 기업인이다. 1920년대, 고향인 평안북도 구성군(현, 구성시)에서 양질의 금광을 발견하여 삼성 금광을 열고 광산업의 기반을 다졌다. 그의 광산 사업은 날로 번창하였고 평안북도를 중심으로 수십 개의 광구를 보유하였다. 이것을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 전반에 걸쳐 미쓰이〔三井〕 광산, 일본 광업 등에 매각하여 큰 부를 일구었다. 조선의 금광왕, 광산왕, 천만장자는 그를 일컫는 수식어였다. 그의 성공 배경에는 친일의 그림자도 드러워져 있다.
백완혁은 한말부터 일제시기에 걸쳐 활동한 친일기업인이다. 1881년 무과에 급제하여 군인으로 봉직하였으나, 갑오개혁 직후에 퇴직하고 기업가로 변신하였다. 을사조약 이후 일제 재정고문으로 들어온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의 화폐정리사업에 적극 협조하며 금융계의 거물로 성장하였다. 1906년부터 1918년까지 한호농공은행 은행장으로 재임하였다. 조진태(趙鎭泰), 조병택(趙秉澤)과 함께 ‘조선 실업계의 3원로’로 불렸다.
백완혁 (白完爀)
백완혁은 한말부터 일제시기에 걸쳐 활동한 친일기업인이다. 1881년 무과에 급제하여 군인으로 봉직하였으나, 갑오개혁 직후에 퇴직하고 기업가로 변신하였다. 을사조약 이후 일제 재정고문으로 들어온 메가타 다네타로〔目賀田種太郞〕의 화폐정리사업에 적극 협조하며 금융계의 거물로 성장하였다. 1906년부터 1918년까지 한호농공은행 은행장으로 재임하였다. 조진태(趙鎭泰), 조병택(趙秉澤)과 함께 ‘조선 실업계의 3원로’로 불렸다.
이종회는 일제강점기 목재업을 통해 성공한 기업인이다. 성공의 배경에는 조선총독부의 수력 발전 사업과 그 담당 주체였던 일본 재벌 일본질소〔日窒〕가 있었다. 발전소 건설에 필요한 목재를 공급하는 데 수완을 발휘하여 급성장하였다. 30대 중반인 1940년경에는 조선을 대표하는 청년 실업가였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핵심 군수공업인 조선업에 뛰어들어 친일 기업가의 모습으로 보다 큰 성공을 위해 노력했지만, 패전으로 목적을 이룰 수는 없었다. 해방 후에도 기업 활동을 이어 나가지만 일제강점기 때 만큼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이종회 (李鍾會)
이종회는 일제강점기 목재업을 통해 성공한 기업인이다. 성공의 배경에는 조선총독부의 수력 발전 사업과 그 담당 주체였던 일본 재벌 일본질소〔日窒〕가 있었다. 발전소 건설에 필요한 목재를 공급하는 데 수완을 발휘하여 급성장하였다. 30대 중반인 1940년경에는 조선을 대표하는 청년 실업가였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핵심 군수공업인 조선업에 뛰어들어 친일 기업가의 모습으로 보다 큰 성공을 위해 노력했지만, 패전으로 목적을 이룰 수는 없었다. 해방 후에도 기업 활동을 이어 나가지만 일제강점기 때 만큼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조선산업조합령」은 일제시기 산업조합의 설립과 운영, 청산 등을 규정한 법률이다. 산업과 경제 발전을 목적으로 한 산업조합의 설립을 법제화한 것이다. 1926년 1월 25일자 조선총독부제령 제2호로 제정되었고, 1926년 3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산업조합은 1920년대 장기 불황과 일제 식민지 농정의 고율 소작료에 신음하는 농촌 빈곤의 해결책 중 하나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자치'와 '상호부조'를 양대 축으로 하는 자주적 협동조합의 성격 대신 당국의 인가·감독을 강하게 규정하여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실제 활용도도 낮았다.
조선산업조합령 (朝鮮産業組合令)
「조선산업조합령」은 일제시기 산업조합의 설립과 운영, 청산 등을 규정한 법률이다. 산업과 경제 발전을 목적으로 한 산업조합의 설립을 법제화한 것이다. 1926년 1월 25일자 조선총독부제령 제2호로 제정되었고, 1926년 3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산업조합은 1920년대 장기 불황과 일제 식민지 농정의 고율 소작료에 신음하는 농촌 빈곤의 해결책 중 하나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자치'와 '상호부조'를 양대 축으로 하는 자주적 협동조합의 성격 대신 당국의 인가·감독을 강하게 규정하여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고, 실제 활용도도 낮았다.
산업부흥 5개년 계획은 1949년에 정부 기획처가 산업 부흥과 경제 발전을 목적으로 수립한 경제 계획이다. 1949년부터 1953년까지가 계획 기간으로, 국내 경제의 가장 취약한 부분인 연료(燃料)와 동력(動力), 공업(工業)의 14개 부분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와 증산(增産)을 계획하였다. 한국전쟁(韓國戰爭) 등의 원인으로 계획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지만 이 계획은 이후 전개되는 국가 주도 경제개발계획(經濟開發計劃)의 시작점으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산업부흥 5개년 계획 (産業復興 五個年 計劃)
산업부흥 5개년 계획은 1949년에 정부 기획처가 산업 부흥과 경제 발전을 목적으로 수립한 경제 계획이다. 1949년부터 1953년까지가 계획 기간으로, 국내 경제의 가장 취약한 부분인 연료(燃料)와 동력(動力), 공업(工業)의 14개 부분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와 증산(增産)을 계획하였다. 한국전쟁(韓國戰爭) 등의 원인으로 계획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지만 이 계획은 이후 전개되는 국가 주도 경제개발계획(經濟開發計劃)의 시작점으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산업교육진흥 및 산학협력촉진에 관한 법률」은 2003년 기존 「산업교육진흥법」을 개정한 것으로, 창의적인 산업 인력 양성과 효율적인 연구개발 체제를 구축할 목적으로 제정된 법률이다. 전문은 총 6장 46조로 구성되어 있다. 이 법의 시작은 1963년 9월 19일, 법률 제1403호로 제정·시행된 「산업교육진흥법」이다. 법령 명칭이 현재와 같이 바뀐 것은 2003년 개정에 의해서이다. 경제개발이 본격화된 1960년대 이후 필요한 양질의 산업 인력을 대규모로 양성하는 기본 시스템을 구축하는 법적 근거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산업교육진흥 및 산학협력촉진에 관한 법률 (産業敎育振興 및 産學協力促進에 關한 法律)
「산업교육진흥 및 산학협력촉진에 관한 법률」은 2003년 기존 「산업교육진흥법」을 개정한 것으로, 창의적인 산업 인력 양성과 효율적인 연구개발 체제를 구축할 목적으로 제정된 법률이다. 전문은 총 6장 46조로 구성되어 있다. 이 법의 시작은 1963년 9월 19일, 법률 제1403호로 제정·시행된 「산업교육진흥법」이다. 법령 명칭이 현재와 같이 바뀐 것은 2003년 개정에 의해서이다. 경제개발이 본격화된 1960년대 이후 필요한 양질의 산업 인력을 대규모로 양성하는 기본 시스템을 구축하는 법적 근거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장기자동차공업진흥계획은 1973년 상공부가 중화학공업화 정책의 일환으로 자동차공업 육성을 위해 작성한 장기 계획이다. 계획의 주요 내용은 1,500cc 이하의 소형차 국산화를 달성하여 1980년대까지 연간 50만 대 생산, 그리고 이를 토대로 1억 5천만 달러의 수출을 달성한다는 것이다. 동 계획은 이전 단순 조립에 의존하던 자동차 산업을 도약시켜 '한국형 자동차 산업 건설'의 본격적인 출발점이 되었다.
장기자동차공업진흥계획 (長期自動車工業振興計劃)
장기자동차공업진흥계획은 1973년 상공부가 중화학공업화 정책의 일환으로 자동차공업 육성을 위해 작성한 장기 계획이다. 계획의 주요 내용은 1,500cc 이하의 소형차 국산화를 달성하여 1980년대까지 연간 50만 대 생산, 그리고 이를 토대로 1억 5천만 달러의 수출을 달성한다는 것이다. 동 계획은 이전 단순 조립에 의존하던 자동차 산업을 도약시켜 '한국형 자동차 산업 건설'의 본격적인 출발점이 되었다.
강진구는 1973년 삼성전자에서 상무로 시작하여 2000년까지 삼성그룹 전문 경영인으로 활약한 기업인이다. 삼성그룹의 전자·전기 분야 3사(삼성전자·삼성전기·삼성전관)의 최고 경영자로 뛰어난 업적을 내었다. 특히 197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전자 업계 후발 주자였던 삼성전자를 맡아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시킨 장본인이었다. 아울러 한국전자공업진흥 회장, 전자산업진흥 회장, 전자부품 연구원 이사장 등을 맡아 봉사함으로써, 명실공히 한국 전자업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강진구 (姜晉求)
강진구는 1973년 삼성전자에서 상무로 시작하여 2000년까지 삼성그룹 전문 경영인으로 활약한 기업인이다. 삼성그룹의 전자·전기 분야 3사(삼성전자·삼성전기·삼성전관)의 최고 경영자로 뛰어난 업적을 내었다. 특히 197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전자 업계 후발 주자였던 삼성전자를 맡아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시킨 장본인이었다. 아울러 한국전자공업진흥 회장, 전자산업진흥 회장, 전자부품 연구원 이사장 등을 맡아 봉사함으로써, 명실공히 한국 전자업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대한석유공사는 1962년 「대한 석유 공사법」에 의거하여 설립된 국영 정유기업으로 출발하였다. 정부가 주도하고, 자본과 기술적 측면에서 미국 걸프(gulf)사와 합작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1960~70년대에 걸쳐 순조롭게 공장을 건설하고 설비를 증강하여 안정적 석유 에너지의 공급은 물론, 현재도 한국 대표 수출 산업 중 하나인 석유화학산업 성장을 길을 열었다. 1960년대 이후 국가 주도 한국 경제발전과 공업화의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대한석유공사 (大韓石油公社)
대한석유공사는 1962년 「대한 석유 공사법」에 의거하여 설립된 국영 정유기업으로 출발하였다. 정부가 주도하고, 자본과 기술적 측면에서 미국 걸프(gulf)사와 합작하였다. 그리고 이를 통해 1960~70년대에 걸쳐 순조롭게 공장을 건설하고 설비를 증강하여 안정적 석유 에너지의 공급은 물론, 현재도 한국 대표 수출 산업 중 하나인 석유화학산업 성장을 길을 열었다. 1960년대 이후 국가 주도 한국 경제발전과 공업화의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1950년 대한조선공사법에 의한 국영 기업으로 출범한 당시 한국 최대의 조선소이다. 1968년 민영화되기까지 국가 주도 조선산업 육성을 담당하였다. 민영화된 이후에는 현대중공업에 의해 국내 최대 조선소의 자리는 내주었지만, 여전히 한국 조선 산업 발전의 중핵 기업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장기간의 불황을 견디지 못하고 1989년 한진그룹에 인수되면서 그 이름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대한조선공사 (大韓造船公社)
1950년 대한조선공사법에 의한 국영 기업으로 출범한 당시 한국 최대의 조선소이다. 1968년 민영화되기까지 국가 주도 조선산업 육성을 담당하였다. 민영화된 이후에는 현대중공업에 의해 국내 최대 조선소의 자리는 내주었지만, 여전히 한국 조선 산업 발전의 중핵 기업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장기간의 불황을 견디지 못하고 1989년 한진그룹에 인수되면서 그 이름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산업기지개발촉진법은 1973년 정부가 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한 산업 기지 개발을 촉진할 목적으로 제정한 법률이다. 대규모 중화학공업 관련 시설이 들어서는 산업 단지의 조성을 위한 방법과 구체적 시행 방안을 담았다. 이 법은 총 5장 58개조, 부칙 10개조로 구성되었다. 1973년 12월 24일에 법률 제2657호로 제정되었으며, 1991년 폐지될 때까지 총 9차례 개정되었다. 1970년대 이후 한국 중화학공업 건설의 법적 근거 중 하나로 역할을 하였다.
산업기지개발촉진법 (産業基地開發促進法)
산업기지개발촉진법은 1973년 정부가 중화학공업 육성을 위한 산업 기지 개발을 촉진할 목적으로 제정한 법률이다. 대규모 중화학공업 관련 시설이 들어서는 산업 단지의 조성을 위한 방법과 구체적 시행 방안을 담았다. 이 법은 총 5장 58개조, 부칙 10개조로 구성되었다. 1973년 12월 24일에 법률 제2657호로 제정되었으며, 1991년 폐지될 때까지 총 9차례 개정되었다. 1970년대 이후 한국 중화학공업 건설의 법적 근거 중 하나로 역할을 하였다.
기계공업진흥법은 1967년에 기계공업의 합리적 육성을 통해 그 진흥과 발전을 목적으로 제정한 법률이다. 국가 주도 기계공업 육성의 법적 근거이며, 기계공업 육성의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담았다. 상공부를 주관 기관으로 하여 육성을 위한 기본 계획을 작성하고, 필요 자금의 조달 방안, 기술 도입과 인력 양성, 제품 국산화 등을 명문화하였다. 1970년대 이후 본격화되는 정부 중화학 공업화 정책에서 기계공업 분야 발전의 기초적 틀로서 역할을 하였다.
기계공업진흥법 (機械工業振興法)
기계공업진흥법은 1967년에 기계공업의 합리적 육성을 통해 그 진흥과 발전을 목적으로 제정한 법률이다. 국가 주도 기계공업 육성의 법적 근거이며, 기계공업 육성의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담았다. 상공부를 주관 기관으로 하여 육성을 위한 기본 계획을 작성하고, 필요 자금의 조달 방안, 기술 도입과 인력 양성, 제품 국산화 등을 명문화하였다. 1970년대 이후 본격화되는 정부 중화학 공업화 정책에서 기계공업 분야 발전의 기초적 틀로서 역할을 하였다.
4대핵공장사업은 1970년대 초 정부가 군수 공업 육성을 위한 토대로써 중기계, 조선, 주물용 선철, 특수강의 4개 공장을 긴급하게 설립하려고 했던 사업이다. 그 배경은 1969년 미국 정부의 아시아 방위에 대한 방침 변화와 북한의 빈번한 무력 도발이 결합한 안보 위기 상황이었다. 사업 방식은 공장 건설의 경우 민간 기업을 선정하여 맡기고, 관련한 자금은 정부가 나서서 일본에 협조를 구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비협조로 계획은 차질을 빚었으나, 1973년부터 본격화되는 중화학공업화의 주요한 토대가 되었다.
4대핵공장사업 (四大核工場事業)
4대핵공장사업은 1970년대 초 정부가 군수 공업 육성을 위한 토대로써 중기계, 조선, 주물용 선철, 특수강의 4개 공장을 긴급하게 설립하려고 했던 사업이다. 그 배경은 1969년 미국 정부의 아시아 방위에 대한 방침 변화와 북한의 빈번한 무력 도발이 결합한 안보 위기 상황이었다. 사업 방식은 공장 건설의 경우 민간 기업을 선정하여 맡기고, 관련한 자금은 정부가 나서서 일본에 협조를 구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비협조로 계획은 차질을 빚었으나, 1973년부터 본격화되는 중화학공업화의 주요한 토대가 되었다.
구로공단은 1965년에 조성이 시작된, 한국 최초의 수도권 공업단지이다. 1965년 구로동의 1단지 조성을 시작으로 1973년 3단지까지 공단 부지가 만들어졌다. 주로 저임금에 의존한 노동 집약적 제조업체들이 입주하여 섬유, 봉제, 가발 등을 생산하여 수출하였다. 전성기인 1980년대에는 270개 업체가 입주하였고, 전체 수출액의 10%를 차지하였다. 1990년대 이후 경공업 제조업의 쇠퇴에 따라 2000년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변모하였다.
구로공단 (九老工團)
구로공단은 1965년에 조성이 시작된, 한국 최초의 수도권 공업단지이다. 1965년 구로동의 1단지 조성을 시작으로 1973년 3단지까지 공단 부지가 만들어졌다. 주로 저임금에 의존한 노동 집약적 제조업체들이 입주하여 섬유, 봉제, 가발 등을 생산하여 수출하였다. 전성기인 1980년대에는 270개 업체가 입주하였고, 전체 수출액의 10%를 차지하였다. 1990년대 이후 경공업 제조업의 쇠퇴에 따라 2000년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변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