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서보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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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민족대회는 남한과 북한 및 해외동포가 참여한 민간 주도의 통일행사이다. 1980년대 말 국제적 긴장완화 분위기 속에서 문익환 등 재야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세계대회 및 범민족대회 추진 본부(범민족대회 추진본부)’를 발족하였다. 북한도 이에 응하면서 재야 인사들을 평양으로 초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거부하면서, 1990년 8월 15일에 개최된 제1차 범민족대회는 서울과 판문점에서 각기 따로 개최되었다. 이후 1999년까지 범민족대회는 남-북-해외 3자 연대 방식으로 남(서울), 북(평양), 해외(주로 베를린)에서 동시에 개최되었다.
범민족대회 (凡民族大會)
범민족대회는 남한과 북한 및 해외동포가 참여한 민간 주도의 통일행사이다. 1980년대 말 국제적 긴장완화 분위기 속에서 문익환 등 재야인사들이 주축이 되어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세계대회 및 범민족대회 추진 본부(범민족대회 추진본부)’를 발족하였다. 북한도 이에 응하면서 재야 인사들을 평양으로 초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가 거부하면서, 1990년 8월 15일에 개최된 제1차 범민족대회는 서울과 판문점에서 각기 따로 개최되었다. 이후 1999년까지 범민족대회는 남-북-해외 3자 연대 방식으로 남(서울), 북(평양), 해외(주로 베를린)에서 동시에 개최되었다.
최고인민위원회 정령으로 수여하는 명예칭호를 가리키는 북한용어.
공훈칭호 (功勳稱號)
최고인민위원회 정령으로 수여하는 명예칭호를 가리키는 북한용어.
국가가 군인들의 자격과 상하관계를 규정한 계급을 가리키는 북한용어.
군사칭호 (軍事稱號)
국가가 군인들의 자격과 상하관계를 규정한 계급을 가리키는 북한용어.
북한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비서국 국제담당 비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남북관계와 국제관계를 담당한 외교관·관료.
김용순 (金勇淳)
북한에서,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비서국 국제담당 비서,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등을 역임하며 남북관계와 국제관계를 담당한 외교관·관료.
북한의 최고 권력기관인 조선로동당의 전당대회.
당대회 (黨大會)
북한의 최고 권력기관인 조선로동당의 전당대회.
1966년 10월 12일 조선로동당내에 설립된 공식조직으로 국가의 주요 이념, 인사, 재정, 조직, 외교, 대남관계 등을 총괄하는 실질적인 최고 권력기관.
당비서국 (黨秘書局)
1966년 10월 12일 조선로동당내에 설립된 공식조직으로 국가의 주요 이념, 인사, 재정, 조직, 외교, 대남관계 등을 총괄하는 실질적인 최고 권력기관.
1949년 북조선로동당에 설립된 대표적인 대남 사업부서 중 하나.
대외연락부 (對外連絡部)
1949년 북조선로동당에 설립된 대표적인 대남 사업부서 중 하나.
북·미 미군유해 송환회담은 6·25전쟁에 참가하여 희생된 미군의 유해 송환을 위해 1990년 5월부터 2005년 5월까지 북한과 미국 사이에 진행된 회담이다. 1988년 12월 북경에서 개최된 북미회담에서 참전 미군 유해 송환 문제가 공식적으로 거론되었다. 양국 간 미군 유해 송환 회담 및 협상 결과 2007년 4월까지 모두 436구의 미군 유해가 송환되었다. 3년 정도 공백기가 지난 2010년 북한이 미군 유해 발굴사업 재개를 제안하여 회담이 재개되었다. 그러나 2012년 북한의 장거리 로켓(인공 위성) 발사 계획으로 인해 사업 중단이 선언되면서 재개되지 못했다.
북·미 미군유해 송환회담 (北·美 美軍遺骸 送還會談)
북·미 미군유해 송환회담은 6·25전쟁에 참가하여 희생된 미군의 유해 송환을 위해 1990년 5월부터 2005년 5월까지 북한과 미국 사이에 진행된 회담이다. 1988년 12월 북경에서 개최된 북미회담에서 참전 미군 유해 송환 문제가 공식적으로 거론되었다. 양국 간 미군 유해 송환 회담 및 협상 결과 2007년 4월까지 모두 436구의 미군 유해가 송환되었다. 3년 정도 공백기가 지난 2010년 북한이 미군 유해 발굴사업 재개를 제안하여 회담이 재개되었다. 그러나 2012년 북한의 장거리 로켓(인공 위성) 발사 계획으로 인해 사업 중단이 선언되면서 재개되지 못했다.
북·미 미사일회담은 1996년 4월부터 2000년 11월까지 6회에 걸쳐 진행된 북한과 미국사이의 미사일 협상이다. 냉전의 해체와 함께 북한은 체제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핵무기와 중·장거리 탄도미사일 등 개발에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 1994년 제네바 합의를 통해 북핵문제를 접근한 이후 1996년부터 미사일회담을 시작하였다. 2000년까지 총 6차례의 회담을 거쳤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002년 1월 부시 대통령의 '악의축' 발언과 2002년 3월‘핵태세 보고서’ 등은 북·미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면서 북한 미사일 협상은 결렬되었다.
북·미 미사일회담 (北·美 missile會談)
북·미 미사일회담은 1996년 4월부터 2000년 11월까지 6회에 걸쳐 진행된 북한과 미국사이의 미사일 협상이다. 냉전의 해체와 함께 북한은 체제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핵무기와 중·장거리 탄도미사일 등 개발에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 1994년 제네바 합의를 통해 북핵문제를 접근한 이후 1996년부터 미사일회담을 시작하였다. 2000년까지 총 6차례의 회담을 거쳤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002년 1월 부시 대통령의 '악의축' 발언과 2002년 3월‘핵태세 보고서’ 등은 북·미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면서 북한 미사일 협상은 결렬되었다.
1970년 9월 신설된 중학교 4∼6학년(남한의 고등학교) 남녀학생들(14∼16세)을 대상으로 한 조선인민군의 준군사조직.
붉은청년근위대 (붉은靑年近衛隊)
1970년 9월 신설된 중학교 4∼6학년(남한의 고등학교) 남녀학생들(14∼16세)을 대상으로 한 조선인민군의 준군사조직.
십사 남북정상선언은 2007년 10월 4일 평양에서 대한민국 16대 대통령 노무현과 북한 국방위원장 김정일이 합의한 제2차 남북정상선언이다. ‘6·15공동선언’에 이은 남북정상회담의 결과로 8개항 및 별항 2항으로 구성되었다. ‘서해평화협력 특별지대 설치’, ‘한반도 종전선언을 위한 관련국 정상회담’ 등은 한반도 평화체제의 제도화라는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공동선언문에는 한반도 평화체제, 정치·군사, 경제협력, 사회문화교류 등 남북한의 중장기적 과제를 담아냈다. 이 선언은 한반도 평화·번영을 위한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십사 남북정상선언 (十四 南北頂上宣言)
십사 남북정상선언은 2007년 10월 4일 평양에서 대한민국 16대 대통령 노무현과 북한 국방위원장 김정일이 합의한 제2차 남북정상선언이다. ‘6·15공동선언’에 이은 남북정상회담의 결과로 8개항 및 별항 2항으로 구성되었다. ‘서해평화협력 특별지대 설치’, ‘한반도 종전선언을 위한 관련국 정상회담’ 등은 한반도 평화체제의 제도화라는 측면에서 주목할 만하다. 공동선언문에는 한반도 평화체제, 정치·군사, 경제협력, 사회문화교류 등 남북한의 중장기적 과제를 담아냈다. 이 선언은 한반도 평화·번영을 위한 중요한 계기를 만들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북한에서 최고의 영예라는 공화국영웅, 노력영웅 등의 칭호를 가리키는 북한용어. 공화국영웅칭호·노력영웅칭호.
영웅칭호 (英雄稱號)
북한에서 최고의 영예라는 공화국영웅, 노력영웅 등의 칭호를 가리키는 북한용어. 공화국영웅칭호·노력영웅칭호.
북한에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등을 역임한 군인·관료.
조명록 (趙明綠)
북한에서, 조선인민군 총정치국장,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등을 역임한 군인·관료.
1999년 6월 20일 금강산관광 중 남측 여성관광객 한 명이 북측에 억류되었다가 풀려난 사건.
금강산 관광객 억류 사건 (金剛山 觀光客 抑留 事件)
1999년 6월 20일 금강산관광 중 남측 여성관광객 한 명이 북측에 억류되었다가 풀려난 사건.
왕래·접촉·교역·협력사업 및 통신 역무(役務) 제공 등 남한과 북한 간의 상호 교류와 협력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를 다룬 법.
남북교류협력법 (南北交流協力法)
왕래·접촉·교역·협력사업 및 통신 역무(役務) 제공 등 남한과 북한 간의 상호 교류와 협력을 목적으로 하는 행위를 다룬 법.
남북상호불가침협정은 1974년 1월 18일 박정희 대통령이 연두 기자회견에서 북한 측에 제의한 협정이다. 협정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력침범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 상호 내정간섭을 하지 말 것, 정전협정의 효력 존속이다. 남한은 북한에 촉구해 오던 무력도발 포기를 남북 간 협정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정전협정의 존속을 전제로 남북 간 협정을 제안했다. 이 협정은 같은 해 8월 15일 광복절 기념사를 통해 발표된 ‘평화통일 3대 기본원칙’으로 구체화되었다. 남북상호불가침협정은 1991년 12월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체결로 현실화되었다.
남북상호불가침협정 (南北相互不可侵協定)
남북상호불가침협정은 1974년 1월 18일 박정희 대통령이 연두 기자회견에서 북한 측에 제의한 협정이다. 협정의 구체적인 내용은 무력침범을 하지 않겠다는 선언, 상호 내정간섭을 하지 말 것, 정전협정의 효력 존속이다. 남한은 북한에 촉구해 오던 무력도발 포기를 남북 간 협정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정전협정의 존속을 전제로 남북 간 협정을 제안했다. 이 협정은 같은 해 8월 15일 광복절 기념사를 통해 발표된 ‘평화통일 3대 기본원칙’으로 구체화되었다. 남북상호불가침협정은 1991년 12월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 체결로 현실화되었다.
남북 간의 원활한 인적·물적 교류에 관한 출입 업무를 총괄하기 위한 사무소.
남북출입사무소 (南北出入事務所)
남북 간의 원활한 인적·물적 교류에 관한 출입 업무를 총괄하기 위한 사무소.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은 1989년 9월 11일 국회 특별연설을 통해 노태우 대통령이 제시한 제6공화국의 통일방안이다. 주요내용은 남북정상회의, 남북각료회의, 남북평의회, 공동사무처 등이 포함된 ‘남북연합’ 구성이다. 1987년 민선정부가 탄생과 민주화의 진전으로 새로운 통일정책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확산되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남북연합을 구성해 남북 간 개방과 교류협력을 실현하고 민족사회의 동질화와 통합의 기반을 다져나가자는 통일안을 제시했다. 이 통일방안의 의의는 통일의 주역인 민족구성원, 즉 국민들의 다양한 여론을 수렴해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 (韓民族共同體統一方案)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은 1989년 9월 11일 국회 특별연설을 통해 노태우 대통령이 제시한 제6공화국의 통일방안이다. 주요내용은 남북정상회의, 남북각료회의, 남북평의회, 공동사무처 등이 포함된 ‘남북연합’ 구성이다. 1987년 민선정부가 탄생과 민주화의 진전으로 새로운 통일정책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확산되었다. 노태우 대통령은 남북연합을 구성해 남북 간 개방과 교류협력을 실현하고 민족사회의 동질화와 통합의 기반을 다져나가자는 통일안을 제시했다. 이 통일방안의 의의는 통일의 주역인 민족구성원, 즉 국민들의 다양한 여론을 수렴해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은 1982년 1월 22일 국정연설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발표한 제5공화국의 통일방안이다. 1980년 북한의 고려민주연방공화국 방안에 대한 대응으로 1982년 민족자결, 민주적 절차, 평화적 방법을 원칙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거부와 제5공화국 자체의 도덕적·정치적 정통성에 대한 비판운동이 확산되면서 실효성을 거둘 수 없게 되었다. 평화협정 없이 휴전협정체제를 유지하면서 적대관계 해소를 도모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라는 지적도 있다. 한편 민족자결 원칙을 통해 통일문제에 대한 유엔의 관여를 배제하고 대신 민족 내부적 성격을 강화했다는 의의도 있다.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 (民族和合民主統一方案)
민족화합민주통일방안은 1982년 1월 22일 국정연설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발표한 제5공화국의 통일방안이다. 1980년 북한의 고려민주연방공화국 방안에 대한 대응으로 1982년 민족자결, 민주적 절차, 평화적 방법을 원칙으로 발표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거부와 제5공화국 자체의 도덕적·정치적 정통성에 대한 비판운동이 확산되면서 실효성을 거둘 수 없게 되었다. 평화협정 없이 휴전협정체제를 유지하면서 적대관계 해소를 도모하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라는 지적도 있다. 한편 민족자결 원칙을 통해 통일문제에 대한 유엔의 관여를 배제하고 대신 민족 내부적 성격을 강화했다는 의의도 있다.
대남 수재물자 지원은 1984년 8월 말과 9월 초 서울과 경기, 충청 지역에 발생한 최악의 홍수피해에 대해 북한이 남한 수재민들에게 수재물자를 제공한 일을 말한다. 당시 서울의 하루 최다 강우량은 294.8㎜로 한강이 위험수위인 10.5m를 넘었고, 전국적으로 수많은 이재민과 사상자를 내었다. 1984년 9월 8일 북한적십자회는 동포애와 인도주의 입장에서 남한의 이재민에게 수재물자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하였고 남한의 전두환 정부가 제의를 수락하였다. 북한의 대남 수재물자 지원은 그동안 막혔던 남북 간 대화와 교류의 물꼬를 다시 여는 계기가 되었다.
대남 수재물자 지원 (對南 水災物資 支援)
대남 수재물자 지원은 1984년 8월 말과 9월 초 서울과 경기, 충청 지역에 발생한 최악의 홍수피해에 대해 북한이 남한 수재민들에게 수재물자를 제공한 일을 말한다. 당시 서울의 하루 최다 강우량은 294.8㎜로 한강이 위험수위인 10.5m를 넘었고, 전국적으로 수많은 이재민과 사상자를 내었다. 1984년 9월 8일 북한적십자회는 동포애와 인도주의 입장에서 남한의 이재민에게 수재물자를 제공하겠다고 제의하였고 남한의 전두환 정부가 제의를 수락하였다. 북한의 대남 수재물자 지원은 그동안 막혔던 남북 간 대화와 교류의 물꼬를 다시 여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