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이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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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동교회는 1910년 서울 대묘동에 설립된 교회이다. 연동교회에 출석하던 고위 양반 출신 이원긍, 함우택, 오경선 등 일부 교인들이 천민 출신 교인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던 차에 연동교회 당회장 게일 선교사의 일방적인 교회 운영에 반발하여 1910년 종묘 서쪽 대묘동에 분립하여 나왔다.
묘동교회 (妙洞敎會)
묘동교회는 1910년 서울 대묘동에 설립된 교회이다. 연동교회에 출석하던 고위 양반 출신 이원긍, 함우택, 오경선 등 일부 교인들이 천민 출신 교인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던 차에 연동교회 당회장 게일 선교사의 일방적인 교회 운영에 반발하여 1910년 종묘 서쪽 대묘동에 분립하여 나왔다.
배민수는 일제강점기 조선예수교장로회 농촌부 총무를 역임하는 등 기독교 농촌운동을 전개한 기독교 목사이다. 1917년 숭실중학 재학 중에 항일민족운동에 참여하였고, 삼일운동 때 옥고를 치렀다. 1923년 숭실전문학교 재학 중 기독교농촌연구회를 조직한 후 미국 유학을 다녀와 목사가 된 후 조선예수교장로회 농촌부 총무로 일했다. 해방 후 대전 농민학원과 일산 삼애농업기술학원을 설립하였다.
배민수 (裵敏洙)
배민수는 일제강점기 조선예수교장로회 농촌부 총무를 역임하는 등 기독교 농촌운동을 전개한 기독교 목사이다. 1917년 숭실중학 재학 중에 항일민족운동에 참여하였고, 삼일운동 때 옥고를 치렀다. 1923년 숭실전문학교 재학 중 기독교농촌연구회를 조직한 후 미국 유학을 다녀와 목사가 된 후 조선예수교장로회 농촌부 총무로 일했다. 해방 후 대전 농민학원과 일산 삼애농업기술학원을 설립하였다.
배은희는 일제강점기 경주교회와 전주 서문교회에서 목회한 장로교 목사이자 정치인이다. 경상북도 경산 출생으로 평양 장로회신학교 재학 중 3·1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고 태형을 받았으며, 경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경주교회와 전주 서문교회에서 목회하였다. 해방 후에는 정치운동에 참가하여 고시위원장과 제2대 국회의원으로 활약했다.
배은희 (裵恩希)
배은희는 일제강점기 경주교회와 전주 서문교회에서 목회한 장로교 목사이자 정치인이다. 경상북도 경산 출생으로 평양 장로회신학교 재학 중 3·1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고 태형을 받았으며, 경북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경주교회와 전주 서문교회에서 목회하였다. 해방 후에는 정치운동에 참가하여 고시위원장과 제2대 국회의원으로 활약했다.
사회신조는 1932년에 발표된 사회현실과 사회운동에 관한 기독교 신학적 선언이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총회에서 채택한 신조로서 농촌 문제와 빈부 격차, 노동 문제, 민족 차별 문제 등 1930년대 조선사회가 당면한 사회 현실에 대한 기독교적 인식과 해결 방안을 12개조로 제시하였다. 이 신조는 해방 후 진보적 기독교계의 사회 참여 운동 방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사회신조 (社會信條)
사회신조는 1932년에 발표된 사회현실과 사회운동에 관한 기독교 신학적 선언이다.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 총회에서 채택한 신조로서 농촌 문제와 빈부 격차, 노동 문제, 민족 차별 문제 등 1930년대 조선사회가 당면한 사회 현실에 대한 기독교적 인식과 해결 방안을 12개조로 제시하였다. 이 신조는 해방 후 진보적 기독교계의 사회 참여 운동 방향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성서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로 구성된 기독교 경전이다. 성경전서 혹은 성경으로도 불리는데 기독교(천주교와 개신교)의 경전이다.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으로 구성되었으며 구약은 히브리어, 신약은 그리스어로 처음 기록되었다가 중세에 라틴어로 번역되었고,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유럽의 각 민족언어로 번역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스(J. Ross)에 의해 1882년 만주에서 첫 한글번역 성서로 『예수성교 누가복음전서』와 『예수성교 요안내복음전서』가 인쇄된 후 140년 동안 다양한 형태의 한글성서가 간행되었다.
성서 (聖書)
성서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로 구성된 기독교 경전이다. 성경전서 혹은 성경으로도 불리는데 기독교(천주교와 개신교)의 경전이다. 구약 39권, 신약 27권, 총 66권으로 구성되었으며 구약은 히브리어, 신약은 그리스어로 처음 기록되었다가 중세에 라틴어로 번역되었고, 종교개혁자들에 의해 유럽의 각 민족언어로 번역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스(J. Ross)에 의해 1882년 만주에서 첫 한글번역 성서로 『예수성교 누가복음전서』와 『예수성교 요안내복음전서』가 인쇄된 후 140년 동안 다양한 형태의 한글성서가 간행되었다.
신약전서는 구약전서와 함께 기독교 경전을 구성하는 책이다. 신약성서, 또는 줄여서 신약으로도 칭한다. 전체 27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에는 코이네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다가 라틴어를 거쳐 영어와 독일어 등으로 번역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882년 만주에서 최초 한글번역 성서로 『예수성교 누가복음전서』와 『예수성교 요안내복음전서』가 인쇄된 후 다양한 형태의 한글번역 신약전서가 출판되었다.
신약전서 (新約全書)
신약전서는 구약전서와 함께 기독교 경전을 구성하는 책이다. 신약성서, 또는 줄여서 신약으로도 칭한다. 전체 27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음에는 코이네 그리스어로 기록되었다가 라틴어를 거쳐 영어와 독일어 등으로 번역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882년 만주에서 최초 한글번역 성서로 『예수성교 누가복음전서』와 『예수성교 요안내복음전서』가 인쇄된 후 다양한 형태의 한글번역 신약전서가 출판되었다.
『신학세계』는 1916년에 창간된 서울 감리교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교) 기관지이다. 한국 기독교 최초의 신학잡지이다. 1916년 2월 계간지로 창간했다가 1918년 1월부터 격월간으로 발행하였다. 1940년 8월 감리교신학교가 일제에 의해 폐교되면서 『신학세계』도 폐간되었다. 해방 후 1952년 10월 속간되었지만 1955년 11월 제30권 1호를 낸 후 더 이상 발간하지 못했다. 감리교신학대학은 1975년 『신학과 세계』란 제호로 다시 발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신학세계 (神學世界 The Theological World)
『신학세계』는 1916년에 창간된 서울 감리교 협성신학교(현 감리교신학교) 기관지이다. 한국 기독교 최초의 신학잡지이다. 1916년 2월 계간지로 창간했다가 1918년 1월부터 격월간으로 발행하였다. 1940년 8월 감리교신학교가 일제에 의해 폐교되면서 『신학세계』도 폐간되었다. 해방 후 1952년 10월 속간되었지만 1955년 11월 제30권 1호를 낸 후 더 이상 발간하지 못했다. 감리교신학대학은 1975년 『신학과 세계』란 제호로 다시 발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예수성교전서』는 1887년 중국 심양 문광서원에서 인쇄된 최초 한글 신약전서이다. 스코틀랜드연합장로회 선교사 로스, 매킨타이어와 의주 출신 이응찬과 백홍진, 김진기,이성하, 최성균 등의 변역 작업으로 완성되었다. 성서 번역을 통해 창제 후 4백 년 이상 잠들어 있던 한글의 과학적 실용성이 증명되었고, 국내에 반입되어 읽혀 국내 자생적 교회 설립의 기반이 되었다. 2016년 국가등록문화재(현, 국가등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예수성교전서 (예수聖敎全書)
『예수성교전서』는 1887년 중국 심양 문광서원에서 인쇄된 최초 한글 신약전서이다. 스코틀랜드연합장로회 선교사 로스, 매킨타이어와 의주 출신 이응찬과 백홍진, 김진기,이성하, 최성균 등의 변역 작업으로 완성되었다. 성서 번역을 통해 창제 후 4백 년 이상 잠들어 있던 한글의 과학적 실용성이 증명되었고, 국내에 반입되어 읽혀 국내 자생적 교회 설립의 기반이 되었다. 2016년 국가등록문화재(현, 국가등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윤성범은 해방 후 세계종교사학회 실행위원, 감리교신학대학 학장, 한국종교사학회 회장 등을 역임한 기독교 신학자이자 목사이다. 해방 후 한국의 진보주의 신학계를 대표하는 신학자 중 한 명으로 ‘한국적 신학’을 제창하며 1960~1970년대 장로교 신학자들과 ‘토착화 신학논쟁’을 전개하였다.
윤성범 (尹聖範)
윤성범은 해방 후 세계종교사학회 실행위원, 감리교신학대학 학장, 한국종교사학회 회장 등을 역임한 기독교 신학자이자 목사이다. 해방 후 한국의 진보주의 신학계를 대표하는 신학자 중 한 명으로 ‘한국적 신학’을 제창하며 1960~1970년대 장로교 신학자들과 ‘토착화 신학논쟁’을 전개하였다.
이용도는 일제강점기 부흥강사로 활동하고 예수교회를 창설한 감리교 목사이다.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여러 차례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고, 1928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회자가 된 후 예수와의 완전 합일을 추구했던 신비주의 부흥운동가였다. 주변에 극단적인 신비 체험을 추구하는 신앙인들이 모여들었고 그 때문에 장로교회로부터 이단 정죄를 받았으며 소속했던 감리교회로부터도 휴직 처분을 받았다. 1933년 별세 직전 예수교회를 창설하고 초대 선도감이 되었다.
이용도 (李龍道)
이용도는 일제강점기 부흥강사로 활동하고 예수교회를 창설한 감리교 목사이다.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 재학 시절 여러 차례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고, 1928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회자가 된 후 예수와의 완전 합일을 추구했던 신비주의 부흥운동가였다. 주변에 극단적인 신비 체험을 추구하는 신앙인들이 모여들었고 그 때문에 장로교회로부터 이단 정죄를 받았으며 소속했던 감리교회로부터도 휴직 처분을 받았다. 1933년 별세 직전 예수교회를 창설하고 초대 선도감이 되었다.
이화춘은 남감리회의 북간도지역 선교사로 활동한 기독교 목사이다. 남감리회 전도인으로 1907년 만주 선교사로 임명되어 용정을 중심으로 교회들을 설립하였다. 1908년 만주 선교를 캐나다장로회 선교부에 이양하고 귀국해서 개성과 금천, 서울 등지에서 목회하다가 1924년 재차 북간도지역 선교사로 파송되어 사역하였다.
이화춘 (李和春)
이화춘은 남감리회의 북간도지역 선교사로 활동한 기독교 목사이다. 남감리회 전도인으로 1907년 만주 선교사로 임명되어 용정을 중심으로 교회들을 설립하였다. 1908년 만주 선교를 캐나다장로회 선교부에 이양하고 귀국해서 개성과 금천, 서울 등지에서 목회하다가 1924년 재차 북간도지역 선교사로 파송되어 사역하였다.
전덕기는 독립협회, 황성기독교청년회, 신민회에서 활동한 한말 대표적인 기독교 민족 운동가이다. 미감리회 선교사 스크랜턴 가정에 고용인으로 들어갔다가 성경을 읽고 기독교로 개종한 후 남대문 상동교회 전도사와 목사가 되어 남대문시장의 민중 계층을 중심으로 목회하였다. 독립협회와 황성기독교청년회, 신민회 중심 인물로 활동하면서 한말의 대표적인 기독교 민족운동가가 되었다.
전덕기 (全德基)
전덕기는 독립협회, 황성기독교청년회, 신민회에서 활동한 한말 대표적인 기독교 민족 운동가이다. 미감리회 선교사 스크랜턴 가정에 고용인으로 들어갔다가 성경을 읽고 기독교로 개종한 후 남대문 상동교회 전도사와 목사가 되어 남대문시장의 민중 계층을 중심으로 목회하였다. 독립협회와 황성기독교청년회, 신민회 중심 인물로 활동하면서 한말의 대표적인 기독교 민족운동가가 되었다.
전밀라는 1955년 한국인 최초 여성 목사로 안수를 받고 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회 전국연합회 총무로 활동한 목사이다. 충청북도 제천에서 권서의 딸로 출생하여 서울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한 후 1954년 감리교 중부연회에서 명화용과 함께 한국인 최초 여성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이후 인천 창영교회와 서울 양광교회에서 목회하였고 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회전국연합회 총무로 활약하였다.
전밀라 (全密羅)
전밀라는 1955년 한국인 최초 여성 목사로 안수를 받고 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회 전국연합회 총무로 활동한 목사이다. 충청북도 제천에서 권서의 딸로 출생하여 서울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한 후 1954년 감리교 중부연회에서 명화용과 함께 한국인 최초 여성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이후 인천 창영교회와 서울 양광교회에서 목회하였고 기독교대한감리회 여선교회전국연합회 총무로 활약하였다.
정경옥은 일제강점기 기독교 신학자이자 목사이다. 전라남도 진도에서 출생하였다.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동맹휴학을 주도하고 제적당하였다. 이후 고향에서 항일 비밀결사 보향단을 조직하고 활동하던 중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옥중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서울 협성신학교와 미국 게릿신학교, 노스웨스턴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하여 감리교신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진보적 신학을 강의하였다.
정경옥 (鄭景玉)
정경옥은 일제강점기 기독교 신학자이자 목사이다. 전라남도 진도에서 출생하였다.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동맹휴학을 주도하고 제적당하였다. 이후 고향에서 항일 비밀결사 보향단을 조직하고 활동하던 중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옥중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였고 서울 협성신학교와 미국 게릿신학교, 노스웨스턴대학을 졸업한 후 귀국하여 감리교신학교 교수로 부임하여 진보적 신학을 강의하였다.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은 1921년,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태화여자관이란 이름으로 출발한 한국의 최초 근대적 여성사회사업기관이다. 부녀자복지와 아동보건, 공중위생, 여성계몽, 문맹퇴치, 여자야학, 우유급식 등 시대를 선도하는 사회복지 사업을 추진하였다. 1995년에 서울특별시 강남구 수서로 옮긴 후에도 지적장애자, 사회부적응자 지원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 (泰和基督敎社會福祉館)
태화기독교사회복지관은 1921년,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 태화여자관이란 이름으로 출발한 한국의 최초 근대적 여성사회사업기관이다. 부녀자복지와 아동보건, 공중위생, 여성계몽, 문맹퇴치, 여자야학, 우유급식 등 시대를 선도하는 사회복지 사업을 추진하였다. 1995년에 서울특별시 강남구 수서로 옮긴 후에도 지적장애자, 사회부적응자 지원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네비어스 선교정책은 선교사 네비어스가 중국에서의 선교활동을 위하여 창안한 선교 방법론이다. 네비어스는 1854년부터 1893년까지 중국에서 40년간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네비어스는 선교 경험을 정리하여 1885년에 「선교사의 토착교회 설립 및 육성방안」을 발표하였다. 네비어스 선교 정책은 자전(自傳), 자립, 자치로 요약할 수 있다. 자전은 토착인이 토착인에게 전도하도록 하는 것이다. 자립은 토착 교인이 토착 교회 목회자의 생활비와 교회 운영을 책임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토착 교회 문제를 토착 교인들이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자치이다.
네비어스 선교정책 (Nevius 宣敎政策)
네비어스 선교정책은 선교사 네비어스가 중국에서의 선교활동을 위하여 창안한 선교 방법론이다. 네비어스는 1854년부터 1893년까지 중국에서 40년간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네비어스는 선교 경험을 정리하여 1885년에 「선교사의 토착교회 설립 및 육성방안」을 발표하였다. 네비어스 선교 정책은 자전(自傳), 자립, 자치로 요약할 수 있다. 자전은 토착인이 토착인에게 전도하도록 하는 것이다. 자립은 토착 교인이 토착 교회 목회자의 생활비와 교회 운영을 책임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토착 교회 문제를 토착 교인들이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자치이다.
토착화 신학은 서구 신학의 모방이나 답습에서 벗어나 ‘한국적 신학’을 수립하기 위하여 한국의 고유한 정신문화와 종교 가치를 탐구 대상으로 삼는 신학이다. 한국적 신학, 상황화 신학이라고도 한다. 19세기 말 개척 선교사들은 토착 문화와 상황에 적응하는 선교를 추구하였다. 하지만 토착화 신학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훼손하고 혼합주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비판을 받았다. 2000년대 들어 선교사들은 토착 신학 수립을 지원해야 한다는 ‘자신학화’(自神學化) 개념을 거론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토착화 신학 역시 선교학의 일종이라는 인식의 변화 때문이다.
토착화 신학 (土着化 神學)
토착화 신학은 서구 신학의 모방이나 답습에서 벗어나 ‘한국적 신학’을 수립하기 위하여 한국의 고유한 정신문화와 종교 가치를 탐구 대상으로 삼는 신학이다. 한국적 신학, 상황화 신학이라고도 한다. 19세기 말 개척 선교사들은 토착 문화와 상황에 적응하는 선교를 추구하였다. 하지만 토착화 신학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훼손하고 혼합주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비판을 받았다. 2000년대 들어 선교사들은 토착 신학 수립을 지원해야 한다는 ‘자신학화’(自神學化) 개념을 거론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토착화 신학 역시 선교학의 일종이라는 인식의 변화 때문이다.
내리교회는 인천지역에 설립된 최초 개신교회이다. 선교사 아펜젤러가 1885년 6월 20일~7월 29일까지 인천에 머물면서 선교를 준비했다. 1890년 안골(내리)에 초가집을 마련하고 집회를 시작하였다. 1901년 내리 언덕 용동에 ‘웨슬리회당’ 통상 ‘내리교회’를 건축하였다. 1904년 한국인 목사 김기범이 내리교회를 담임하였다. 1910년 이후 내리교회는 인천과 강화, 연안, 해주 지역 선교의 거점이 되었다. 1985년 1백 주년 기념예배당을 건축하였고, 『내리교회 100년사』를 출간하였다. 2013년에는 십자형 ‘웨슬리예배당’을 복원 건축하였다.
내리교회 (內里敎會)
내리교회는 인천지역에 설립된 최초 개신교회이다. 선교사 아펜젤러가 1885년 6월 20일~7월 29일까지 인천에 머물면서 선교를 준비했다. 1890년 안골(내리)에 초가집을 마련하고 집회를 시작하였다. 1901년 내리 언덕 용동에 ‘웨슬리회당’ 통상 ‘내리교회’를 건축하였다. 1904년 한국인 목사 김기범이 내리교회를 담임하였다. 1910년 이후 내리교회는 인천과 강화, 연안, 해주 지역 선교의 거점이 되었다. 1985년 1백 주년 기념예배당을 건축하였고, 『내리교회 100년사』를 출간하였다. 2013년에는 십자형 ‘웨슬리예배당’을 복원 건축하였다.
동광원은 1950년 설립된 사회복지 기관이자 기독교 수도공동체이다. 기독교동광원수도회라고도 한다. 이현필이 1943년 남원에서 노동과 기도, 성경공부 중심의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1949년 주택과 부지를 마련하며 수도공동체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1950년 광주에 동광원이란 고아원을 설립하기로 하였다. 동광원은 수도공동체와 사회복지 기관의 기능을 수행했다. 기독교계와 사회의 비판으로, 1954년 8월 전라남도 행정당국이 동광원을 폐쇄하였다. 수도공동체로서 동광원은 1980년 남원으로 본원을 옮기고, 대외적으로 기독교동광원수도회란 명칭을 사용하였다.
동광원 (東光院)
동광원은 1950년 설립된 사회복지 기관이자 기독교 수도공동체이다. 기독교동광원수도회라고도 한다. 이현필이 1943년 남원에서 노동과 기도, 성경공부 중심의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1949년 주택과 부지를 마련하며 수도공동체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1950년 광주에 동광원이란 고아원을 설립하기로 하였다. 동광원은 수도공동체와 사회복지 기관의 기능을 수행했다. 기독교계와 사회의 비판으로, 1954년 8월 전라남도 행정당국이 동광원을 폐쇄하였다. 수도공동체로서 동광원은 1980년 남원으로 본원을 옮기고, 대외적으로 기독교동광원수도회란 명칭을 사용하였다.
애락원은 1909년 설립된 개신교 사회복지 기관이자 의료선교 기관이다. 대구애락원, 애락보건병원이라고도 한다. 1909년 내한한 선교사 플레처가 대구에 초가집을 마련하고 한센환자 20여 명을 수용하였다. 1924년에 2층 벽돌 건물로 증축하면서, ‘퍼커스버그 기념관’이라 칭하였고, 한글 명칭도 애락원으로 바꿨다. 플레처 원장이 1942년 6월 강제 출국당하면서 애락원은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해방 후 1949년 당시 1,750명 환자를 수용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2013년 10월 병원 설립 100주년 기념으로 애락원 역사 자료관을 개관하였다.
애락원 (愛樂園)
애락원은 1909년 설립된 개신교 사회복지 기관이자 의료선교 기관이다. 대구애락원, 애락보건병원이라고도 한다. 1909년 내한한 선교사 플레처가 대구에 초가집을 마련하고 한센환자 20여 명을 수용하였다. 1924년에 2층 벽돌 건물로 증축하면서, ‘퍼커스버그 기념관’이라 칭하였고, 한글 명칭도 애락원으로 바꿨다. 플레처 원장이 1942년 6월 강제 출국당하면서 애락원은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해방 후 1949년 당시 1,750명 환자를 수용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2013년 10월 병원 설립 100주년 기념으로 애락원 역사 자료관을 개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