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이덕주"
검색결과 총 16건
1949년에, 서울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기관지로 창간한 개신교 신문.
기독공보 (基督公報)
1949년에, 서울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기관지로 창간한 개신교 신문.
1955년에 설립된 기독교 전문 출판사.
기독교문사 (基督敎文社)
1955년에 설립된 기독교 전문 출판사.
네비어스 선교정책은 선교사 네비어스가 중국에서의 선교활동을 위하여 창안한 선교 방법론이다. 네비어스는 1854년부터 1893년까지 중국에서 40년간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네비어스는 선교 경험을 정리하여 1885년에 「선교사의 토착교회 설립 및 육성방안」을 발표하였다. 네비어스 선교 정책은 자전(自傳), 자립, 자치로 요약할 수 있다. 자전은 토착인이 토착인에게 전도하도록 하는 것이다. 자립은 토착 교인이 토착 교회 목회자의 생활비와 교회 운영을 책임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토착 교회 문제를 토착 교인들이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자치이다.
네비어스 선교정책 (Nevius 宣敎政策)
네비어스 선교정책은 선교사 네비어스가 중국에서의 선교활동을 위하여 창안한 선교 방법론이다. 네비어스는 1854년부터 1893년까지 중국에서 40년간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네비어스는 선교 경험을 정리하여 1885년에 「선교사의 토착교회 설립 및 육성방안」을 발표하였다. 네비어스 선교 정책은 자전(自傳), 자립, 자치로 요약할 수 있다. 자전은 토착인이 토착인에게 전도하도록 하는 것이다. 자립은 토착 교인이 토착 교회 목회자의 생활비와 교회 운영을 책임지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토착 교회 문제를 토착 교인들이 처리하도록 하는 것이 자치이다.
토착화 신학은 서구 신학의 모방이나 답습에서 벗어나 ‘한국적 신학’을 수립하기 위하여 한국의 고유한 정신문화와 종교 가치를 탐구 대상으로 삼는 신학이다. 한국적 신학, 상황화 신학이라고도 한다. 19세기 말 개척 선교사들은 토착 문화와 상황에 적응하는 선교를 추구하였다. 하지만 토착화 신학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훼손하고 혼합주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비판을 받았다. 2000년대 들어 선교사들은 토착 신학 수립을 지원해야 한다는 ‘자신학화’(自神學化) 개념을 거론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토착화 신학 역시 선교학의 일종이라는 인식의 변화 때문이다.
토착화 신학 (土着化 神學)
토착화 신학은 서구 신학의 모방이나 답습에서 벗어나 ‘한국적 신학’을 수립하기 위하여 한국의 고유한 정신문화와 종교 가치를 탐구 대상으로 삼는 신학이다. 한국적 신학, 상황화 신학이라고도 한다. 19세기 말 개척 선교사들은 토착 문화와 상황에 적응하는 선교를 추구하였다. 하지만 토착화 신학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훼손하고 혼합주의 오류를 범할 수 있다.”고 비판을 받았다. 2000년대 들어 선교사들은 토착 신학 수립을 지원해야 한다는 ‘자신학화’(自神學化) 개념을 거론하기 시작하였다. 이는 토착화 신학 역시 선교학의 일종이라는 인식의 변화 때문이다.
내리교회는 인천지역에 설립된 최초 개신교회이다. 선교사 아펜젤러가 1885년 6월 20일~7월 29일까지 인천에 머물면서 선교를 준비했다. 1890년 안골(내리)에 초가집을 마련하고 집회를 시작하였다. 1901년 내리 언덕 용동에 ‘웨슬리회당’ 통상 ‘내리교회’를 건축하였다. 1904년 한국인 목사 김기범이 내리교회를 담임하였다. 1910년 이후 내리교회는 인천과 강화, 연안, 해주 지역 선교의 거점이 되었다. 1985년 1백 주년 기념예배당을 건축하였고, 『내리교회 100년사』를 출간하였다. 2013년에는 십자형 ‘웨슬리예배당’을 복원 건축하였다.
내리교회 (內里敎會)
내리교회는 인천지역에 설립된 최초 개신교회이다. 선교사 아펜젤러가 1885년 6월 20일~7월 29일까지 인천에 머물면서 선교를 준비했다. 1890년 안골(내리)에 초가집을 마련하고 집회를 시작하였다. 1901년 내리 언덕 용동에 ‘웨슬리회당’ 통상 ‘내리교회’를 건축하였다. 1904년 한국인 목사 김기범이 내리교회를 담임하였다. 1910년 이후 내리교회는 인천과 강화, 연안, 해주 지역 선교의 거점이 되었다. 1985년 1백 주년 기념예배당을 건축하였고, 『내리교회 100년사』를 출간하였다. 2013년에는 십자형 ‘웨슬리예배당’을 복원 건축하였다.
동광원은 1950년 설립된 사회복지 기관이자 기독교 수도공동체이다. 기독교동광원수도회라고도 한다. 이현필이 1943년 남원에서 노동과 기도, 성경공부 중심의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1949년 주택과 부지를 마련하며 수도공동체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1950년 광주에 동광원이란 고아원을 설립하기로 하였다. 동광원은 수도공동체와 사회복지 기관의 기능을 수행했다. 기독교계와 사회의 비판으로, 1954년 8월 전라남도 행정당국이 동광원을 폐쇄하였다. 수도공동체로서 동광원은 1980년 남원으로 본원을 옮기고, 대외적으로 기독교동광원수도회란 명칭을 사용하였다.
동광원 (東光院)
동광원은 1950년 설립된 사회복지 기관이자 기독교 수도공동체이다. 기독교동광원수도회라고도 한다. 이현필이 1943년 남원에서 노동과 기도, 성경공부 중심의 수도 생활을 시작하였다. 1949년 주택과 부지를 마련하며 수도공동체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1950년 광주에 동광원이란 고아원을 설립하기로 하였다. 동광원은 수도공동체와 사회복지 기관의 기능을 수행했다. 기독교계와 사회의 비판으로, 1954년 8월 전라남도 행정당국이 동광원을 폐쇄하였다. 수도공동체로서 동광원은 1980년 남원으로 본원을 옮기고, 대외적으로 기독교동광원수도회란 명칭을 사용하였다.
애락원은 1909년 설립된 개신교 사회복지 기관이자 의료선교 기관이다. 대구애락원, 애락보건병원이라고도 한다. 1909년 내한한 선교사 플레처가 대구에 초가집을 마련하고 한센환자 20여 명을 수용하였다. 1924년에 2층 벽돌 건물로 증축하면서, ‘퍼커스버그 기념관’이라 칭하였고, 한글 명칭도 애락원으로 바꿨다. 플레처 원장이 1942년 6월 강제 출국당하면서 애락원은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해방 후 1949년 당시 1,750명 환자를 수용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2013년 10월 병원 설립 100주년 기념으로 애락원 역사 자료관을 개관하였다.
애락원 (愛樂園)
애락원은 1909년 설립된 개신교 사회복지 기관이자 의료선교 기관이다. 대구애락원, 애락보건병원이라고도 한다. 1909년 내한한 선교사 플레처가 대구에 초가집을 마련하고 한센환자 20여 명을 수용하였다. 1924년에 2층 벽돌 건물로 증축하면서, ‘퍼커스버그 기념관’이라 칭하였고, 한글 명칭도 애락원으로 바꿨다. 플레처 원장이 1942년 6월 강제 출국당하면서 애락원은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해방 후 1949년 당시 1,750명 환자를 수용할 정도로 성장하였다. 2013년 10월 병원 설립 100주년 기념으로 애락원 역사 자료관을 개관하였다.
『신역신구약전서』는 조선기독교창문사에서 선교사 게일이 신약과 구약성서를 한국어로 번역하여 1925년에 출간한 개신교경전이다. 크기는 19×13㎝, 본문은 국한문 내려쓰기, 2단 편집으로 되어 있다. 총 1,106쪽이며 원색 성경 지도 2매가 첨부되어 있다. 게일은 이해하기 쉽게 조선어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성경 본문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에 부딪쳤다. 다른 한국인 번역자과 함께 별도의 성경 번역에 매진하여 1925년 말 『신역신구약전서』를 출판하였다. 그러나 개인 번역 성경이란 한계, 국한문 혼용체로 인한 접근 장벽 등으로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신역신구약전서 (新譯新舊約全書)
『신역신구약전서』는 조선기독교창문사에서 선교사 게일이 신약과 구약성서를 한국어로 번역하여 1925년에 출간한 개신교경전이다. 크기는 19×13㎝, 본문은 국한문 내려쓰기, 2단 편집으로 되어 있다. 총 1,106쪽이며 원색 성경 지도 2매가 첨부되어 있다. 게일은 이해하기 쉽게 조선어로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성경 본문을 훼손할 수 있다는 우려에 부딪쳤다. 다른 한국인 번역자과 함께 별도의 성경 번역에 매진하여 1925년 말 『신역신구약전서』를 출판하였다. 그러나 개인 번역 성경이란 한계, 국한문 혼용체로 인한 접근 장벽 등으로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교회연합운동은 개신교회들이 교파와 교단을 초월해서 연합하여 추진하는 선교 및 사회 활동이다. 교회일치운동, 에큐메니컬운동이라고도 한다. 개신교회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불필요한 경쟁과 갈등을 피하고자 하였다. 이에 성경 번역 같은 문서 사업과 사회봉사 사역 분야에서 교파를 초월하여 연합 운동을 추진하였다. 선교사들처럼 한국 개신교회도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시기에 다양한 분야에서 교회연합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해방 후 한국교회 ‘전체를’ 아우르는 연합 운동 단체가 되지는 못하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CCK)로 양분되었다.
교회연합운동 (敎會聯合運動)
교회연합운동은 개신교회들이 교파와 교단을 초월해서 연합하여 추진하는 선교 및 사회 활동이다. 교회일치운동, 에큐메니컬운동이라고도 한다. 개신교회 선교사들은 선교지에서 불필요한 경쟁과 갈등을 피하고자 하였다. 이에 성경 번역 같은 문서 사업과 사회봉사 사역 분야에서 교파를 초월하여 연합 운동을 추진하였다. 선교사들처럼 한국 개신교회도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시기에 다양한 분야에서 교회연합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해방 후 한국교회 ‘전체를’ 아우르는 연합 운동 단체가 되지는 못하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와 한국기독교총연합회(CCK)로 양분되었다.
문창모는 일제강점기 때, 최초로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하여 결핵퇴치운동을 전개한 의료인·개신교인·정치인·독립운동가이다. 해방 이후 서울 세브란스병원 원장, 대한결핵협회 사무총장,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1907년 평안북도 선천군 출생으로, 6·10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옥고를 치렀다. 일제말 친일노선을 취하던 혁신교단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해주 구세병원 의사로 재직 중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해 결핵퇴치운동을 벌였다. 1992년 14대 국회의원에 당시 최고령(86)으로 당선되었다. 2002년 별세하였으며, 같은 해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문창모 (文昌模)
문창모는 일제강점기 때, 최초로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하여 결핵퇴치운동을 전개한 의료인·개신교인·정치인·독립운동가이다. 해방 이후 서울 세브란스병원 원장, 대한결핵협회 사무총장, 국회의원 등을 역임하였다. 1907년 평안북도 선천군 출생으로, 6·10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옥고를 치렀다. 일제말 친일노선을 취하던 혁신교단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해주 구세병원 의사로 재직 중 크리스마스실을 발행해 결핵퇴치운동을 벌였다. 1992년 14대 국회의원에 당시 최고령(86)으로 당선되었다. 2002년 별세하였으며, 같은 해 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박성춘(1862 철종13~1933)은 일제강점기 승동교회 장로, 경기충청노회 재정위원 등으로 활동한 개신교인이다.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백정이 되었다. 1894년 무렵 중병에 걸렸을 때, 무어 선교사가 데려온 에비슨의 치료를 받고 나은 후 교회에 출석하였다. 기독교를 통해 ‘만민평등’의 기치를 깨달은 박성춘은 백정 해방운동을 전개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가 주최한 관민공동회에 시민 대표로 나가 ‘충군애국’을 주제로 연설하였다. 1911년 인사동 건립된 승동교회 장로로 선출되었고, 경기충청노회 재정위원으로도 활약했다.
박성춘 (朴晟春)
박성춘(1862 철종13~1933)은 일제강점기 승동교회 장로, 경기충청노회 재정위원 등으로 활동한 개신교인이다. 백정의 아들로 태어나 백정이 되었다. 1894년 무렵 중병에 걸렸을 때, 무어 선교사가 데려온 에비슨의 치료를 받고 나은 후 교회에 출석하였다. 기독교를 통해 ‘만민평등’의 기치를 깨달은 박성춘은 백정 해방운동을 전개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가 주최한 관민공동회에 시민 대표로 나가 ‘충군애국’을 주제로 연설하였다. 1911년 인사동 건립된 승동교회 장로로 선출되었고, 경기충청노회 재정위원으로도 활약했다.
일제강점기 양성학교 교사, 기전여학교 교사 등을 역임한 교육자. 개신교인, 여성운동가.
방애인 (方愛人)
일제강점기 양성학교 교사, 기전여학교 교사 등을 역임한 교육자. 개신교인, 여성운동가.
변선환은 해방 이후 감리교신학대학 원장·학장·한국기독교공동학회 회장 등을 역임한 목사, 신학자이다. 1927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나 1995년에 사망했다.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인 신석구 목사에게 감화되어 기독교인이 되었다.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하고, 현 한신대학교인 한국신학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미국 드류(Drew) 대학교에 유학을 다녀온 후 감리교신학대학 교수가 되었다. 신학자로서 변선환은 ‘종교다원주의’ 노선을 취하여 보수적 목회자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논저로 『변선환 전집』(전7권)과 설교집 『인생은 살만한가』가 있다.
변선환 (邊鮮煥)
변선환은 해방 이후 감리교신학대학 원장·학장·한국기독교공동학회 회장 등을 역임한 목사, 신학자이다. 1927년 평안남도 진남포에서 태어나 1995년에 사망했다. 민족 대표 33인 중 한 명인 신석구 목사에게 감화되어 기독교인이 되었다. 감리교신학교를 졸업하고, 현 한신대학교인 한국신학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미국 드류(Drew) 대학교에 유학을 다녀온 후 감리교신학대학 교수가 되었다. 신학자로서 변선환은 ‘종교다원주의’ 노선을 취하여 보수적 목회자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논저로 『변선환 전집』(전7권)과 설교집 『인생은 살만한가』가 있다.
이현필은 일제강점기 기독교 영성 운동을 전개한 개신교인이자 교육자이다. 1913년 출생하여 1964년 사망하였다. 1927년 화순군 천태산에서 도생활을 하던 이세종을 찾아가 5년간 성경 공부를 하였다. 1940년 화순군 산중에 들어가 2년 넘게 ‘1일1식(一日一食)’, 맨발 독수도(獨修道)하면서 깨우친 진리를 전하기 시작하였다. 이현필은 탁발과 노동을 하면서 순결(동정)과 청빈, 순명을 추구하는 수도 공동체 운동을 지도하였다. 1977년 『맨발의 성자 이현필전』이 출판되면서 ‘한국의 프란체스코’, ‘맨발의 성자’란 칭호를 받기 시작하였다.
이현필 (李鉉弼)
이현필은 일제강점기 기독교 영성 운동을 전개한 개신교인이자 교육자이다. 1913년 출생하여 1964년 사망하였다. 1927년 화순군 천태산에서 도생활을 하던 이세종을 찾아가 5년간 성경 공부를 하였다. 1940년 화순군 산중에 들어가 2년 넘게 ‘1일1식(一日一食)’, 맨발 독수도(獨修道)하면서 깨우친 진리를 전하기 시작하였다. 이현필은 탁발과 노동을 하면서 순결(동정)과 청빈, 순명을 추구하는 수도 공동체 운동을 지도하였다. 1977년 『맨발의 성자 이현필전』이 출판되면서 ‘한국의 프란체스코’, ‘맨발의 성자’란 칭호를 받기 시작하였다.
한석진은 일제강점기 경기충청노회장, 조선예수교장로회 제6대 총회장, 연합공의회 회장 등을 역임한 목사, 사회운동가이다. 1868년 평안북도 의주 출생으로, 1891년 세례를 받았다. 1898년 그의 설교를 듣고 안창호가 기독교인으로 개종한 것으로 전해진다. 1907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7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6대 총회장이 된 후, 중단 위기의 산동선교 재개 및 초교파 연합 기구 창설을 적극 추진했다. 한국 교회에 대한 선교사들의 지나친 간섭과 통제 및 선교사들에 의해 도입된 교파주의를 반대했다. 1939년 서울 당인리 자택에서 별세했다.
한석진 (韓錫晋)
한석진은 일제강점기 경기충청노회장, 조선예수교장로회 제6대 총회장, 연합공의회 회장 등을 역임한 목사, 사회운동가이다. 1868년 평안북도 의주 출생으로, 1891년 세례를 받았다. 1898년 그의 설교를 듣고 안창호가 기독교인으로 개종한 것으로 전해진다. 1907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7년 조선예수교장로회 제6대 총회장이 된 후, 중단 위기의 산동선교 재개 및 초교파 연합 기구 창설을 적극 추진했다. 한국 교회에 대한 선교사들의 지나친 간섭과 통제 및 선교사들에 의해 도입된 교파주의를 반대했다. 1939년 서울 당인리 자택에서 별세했다.
원산부흥운동은 1903년 원산에서 일어난 부흥회와 그에 따른 한국 교회의 영적 각성 운동이다. 한국의 선교 부진이 성령의 인도와 능력을 따르지 않았음을 깨달은 선교사 하디가 한국인 회중 앞에서 자신의 교만과 실수를 공개적으로 자복하였다. 공개 자복과 윤리적 갱신은 원산부흥운동의 특징적 현상이 되었다. 원산에서 시작된 하디의 부흥운동은 1904년 이후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907년 1월 평양 대부흥운동은 초기 한국기독교사에 큰 획을 그었다. 원산부흥운동을 통해 새벽기도와 통성기도 같은 ‘토착적’ 신앙 양태가 나타나면서 외래 기독교가 한국의 토착 교회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원산부흥운동 (元山復興運動)
원산부흥운동은 1903년 원산에서 일어난 부흥회와 그에 따른 한국 교회의 영적 각성 운동이다. 한국의 선교 부진이 성령의 인도와 능력을 따르지 않았음을 깨달은 선교사 하디가 한국인 회중 앞에서 자신의 교만과 실수를 공개적으로 자복하였다. 공개 자복과 윤리적 갱신은 원산부흥운동의 특징적 현상이 되었다. 원산에서 시작된 하디의 부흥운동은 1904년 이후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907년 1월 평양 대부흥운동은 초기 한국기독교사에 큰 획을 그었다. 원산부흥운동을 통해 새벽기도와 통성기도 같은 ‘토착적’ 신앙 양태가 나타나면서 외래 기독교가 한국의 토착 교회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