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장일규"
검색결과 총 29건
경주 문무대왕릉(慶州 文武大王陵)은 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제30대 문무왕의 능이다.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동해에 장례를 지냈다. 그의 유언은 불교 법식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화장한 유골을 동해의 입구에 있는 큰 바위 위에 장사 지냈다. 사방으로 마련된 수로와 아울러 안쪽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바위를 인위적으로 파낸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기록에 나타난 것처럼 문무왕의 수중릉일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경주 문무대왕릉 (慶州 文武大王陵)
경주 문무대왕릉(慶州 文武大王陵)은 경상북도 경주시 문무대왕면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제30대 문무왕의 능이다.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동해에 장례를 지냈다. 그의 유언은 불교 법식에 따라 화장한 뒤 동해에 묻으면, 용이 되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화장한 유골을 동해의 입구에 있는 큰 바위 위에 장사 지냈다. 사방으로 마련된 수로와 아울러 안쪽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바위를 인위적으로 파낸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기록에 나타난 것처럼 문무왕의 수중릉일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숙위학생은 통일신라 때 중국의 문물과 제도를 익히게 하려고 당나라 국자감에 파견한 유학생이다. 유학승(留學僧)과 함께 신라 대당 외교의 상징이다. 이들은 당 중심의 국제 질서를 인용하면서, 인적 · 물적 교류를 활발히 전개하는 데 기여하였다. 또한, 신라 고유 문화와 제도를 당은 물론 주변 국가에 알리는 데 공헌하였다. 다만, 신라 골품제 사회의 구조적 한계 때문에 능력과 경험이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오히려 새로운 국가에서 발휘하게 되었다. 도당유학생(渡唐留學生), 견당유학생(遣唐留學生)이라고도 한다.
숙위학생 (宿衛學生)
숙위학생은 통일신라 때 중국의 문물과 제도를 익히게 하려고 당나라 국자감에 파견한 유학생이다. 유학승(留學僧)과 함께 신라 대당 외교의 상징이다. 이들은 당 중심의 국제 질서를 인용하면서, 인적 · 물적 교류를 활발히 전개하는 데 기여하였다. 또한, 신라 고유 문화와 제도를 당은 물론 주변 국가에 알리는 데 공헌하였다. 다만, 신라 골품제 사회의 구조적 한계 때문에 능력과 경험이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오히려 새로운 국가에서 발휘하게 되었다. 도당유학생(渡唐留學生), 견당유학생(遣唐留學生)이라고도 한다.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는 894년(진성왕 8)에 신라의 최치원이 진성왕에게 올린 사회개혁안이다. 6두품 유학 지식인을 중심으로 신라 왕실의 안녕과 신라 국가의 위상을 강조한 존왕적 정치 이념을 담았다. 그러나 왕권이 이미 약화된 채 진골 세력이 거세게 반발하고 호족 세력이 지방 곳곳에서 성장한 상황에서 실현되기에는 버거웠다. 후삼국 시기 사회 혼란 수습 요구가 부각되면서, 최치원을 계승한 최언위나 최승로 등 신라 출신 유학 지식인에 의해 강조되어 고려의 국가 체제 정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시무십여조 (時務十餘條)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는 894년(진성왕 8)에 신라의 최치원이 진성왕에게 올린 사회개혁안이다. 6두품 유학 지식인을 중심으로 신라 왕실의 안녕과 신라 국가의 위상을 강조한 존왕적 정치 이념을 담았다. 그러나 왕권이 이미 약화된 채 진골 세력이 거세게 반발하고 호족 세력이 지방 곳곳에서 성장한 상황에서 실현되기에는 버거웠다. 후삼국 시기 사회 혼란 수습 요구가 부각되면서, 최치원을 계승한 최언위나 최승로 등 신라 출신 유학 지식인에 의해 강조되어 고려의 국가 체제 정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신라관은 남북국시대에 당나라가 신라인을 위해서 산둥반도의 등주도독부(登州都督府)에 설치한 숙박소이다. 당나라 조정은 사신이나 유학생, 유학승 등 신라의 공식적 업무를 맡은 이들이 주로 왕래하던 곳에 공식적인 숙박소로 신라관을 설치하였다. 신라와 당나라의 외교 관계를 상징하는 시설이자 재당 신라인의 활동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고려 때에도 당대의 신라관을 이어 곳곳에 객관이 설치되었다.
신라관 (新羅館)
신라관은 남북국시대에 당나라가 신라인을 위해서 산둥반도의 등주도독부(登州都督府)에 설치한 숙박소이다. 당나라 조정은 사신이나 유학생, 유학승 등 신라의 공식적 업무를 맡은 이들이 주로 왕래하던 곳에 공식적인 숙박소로 신라관을 설치하였다. 신라와 당나라의 외교 관계를 상징하는 시설이자 재당 신라인의 활동상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고려 때에도 당대의 신라관을 이어 곳곳에 객관이 설치되었다.
신라소는 8세기 중엽 이후 신라인이 당나라 해안 곳곳에 설치한 자치기관이다. 신라관(新羅館)과 함께 신라와 당나라의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히 전개되었고, 중국의 문물과 제도가 신라의 그것과 어우려졌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그 뒤에도 꾸준히 이어져 고려시대에도 한중 두 나라의 문물 교류의 중심으로 자리하였다.
신라소 (新羅所)
신라소는 8세기 중엽 이후 신라인이 당나라 해안 곳곳에 설치한 자치기관이다. 신라관(新羅館)과 함께 신라와 당나라의 인적・물적 교류가 활발히 전개되었고, 중국의 문물과 제도가 신라의 그것과 어우려졌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그 뒤에도 꾸준히 이어져 고려시대에도 한중 두 나라의 문물 교류의 중심으로 자리하였다.
애장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40대(재위: 800~809) 왕이다.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작은아버지 김언승의 섭정을 받았지만, 재위 6년에 친정을 행하여 중앙과 지방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막대한 비용이 드는 불사(佛事)를 금지시키며 귀족 세력을 제어하면서 왕권을 강화하였지만, 재위 10년에 김언승에게 시해되었다.
애장왕 (哀莊王)
애장왕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40대(재위: 800~809) 왕이다. 12세의 나이로 즉위하여 작은아버지 김언승의 섭정을 받았지만, 재위 6년에 친정을 행하여 중앙과 지방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막대한 비용이 드는 불사(佛事)를 금지시키며 귀족 세력을 제어하면서 왕권을 강화하였지만, 재위 10년에 김언승에게 시해되었다.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집사성시중, 상대등 등을 역임한 관리이다. 862년(경문왕 2) 정월에 아찬(阿飡)의 관등으로 집사성(執事省) 시중이 되었고, 874년(경문왕 14)에는 상대등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이찬으로 승진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재직한 지 1년이 지난 875년에 헌강왕이 즉위하자 상대등에서 물러났다.
위진 (魏珍)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집사성시중, 상대등 등을 역임한 관리이다. 862년(경문왕 2) 정월에 아찬(阿飡)의 관등으로 집사성(執事省) 시중이 되었고, 874년(경문왕 14)에는 상대등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이찬으로 승진하였을 것으로 보이는데, 재직한 지 1년이 지난 875년에 헌강왕이 즉위하자 상대등에서 물러났다.
진평왕은 삼국시대 신라의 제26대(재위: 579~632) 왕이다. 진흥왕의 영토 확장을 토대로 관제 정비 등 지배체제 구축과 정비에 힘썼다. 특히, 초기에는 군사·재정·관리·인사 관련 관서를 주로 정비하였고, 후기에는 관원을 확대하는 데 주력하였다. 중국 수나라와 조공을 통한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중국 문물과 제도를 신라에 반영하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석가불 신앙을 내세우면서 입당 구법승을 적극적으로 파견하여 불교사상을 통해서도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려고 하였다. 고구려·백제와 치열한 영역 다툼을 벌이기도 하였다.
진평왕 (眞平王)
진평왕은 삼국시대 신라의 제26대(재위: 579~632) 왕이다. 진흥왕의 영토 확장을 토대로 관제 정비 등 지배체제 구축과 정비에 힘썼다. 특히, 초기에는 군사·재정·관리·인사 관련 관서를 주로 정비하였고, 후기에는 관원을 확대하는 데 주력하였다. 중국 수나라와 조공을 통한 외교관계를 수립하여 중국 문물과 제도를 신라에 반영하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석가불 신앙을 내세우면서 입당 구법승을 적극적으로 파견하여 불교사상을 통해서도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려고 하였다. 고구려·백제와 치열한 영역 다툼을 벌이기도 하였다.
촌주(村主)는 삼국시대, 신라의 지방 관직이다. 신라는 경주를 중심으로 영역 확대를 꾀하였고, 점차 주변 지역을 아우르면서 해당 지역의 토착세력을 국가체제로 편입하고자 하였다. 촌주를 그 편입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결국 신라 말에 사회 혼란이 발생하자 새로운 사회를 이끈 주체로 다시 등장하였으며, 고려에서도 체제 내 편입과 정비를 도모하였다.
촌주 (村主)
촌주(村主)는 삼국시대, 신라의 지방 관직이다. 신라는 경주를 중심으로 영역 확대를 꾀하였고, 점차 주변 지역을 아우르면서 해당 지역의 토착세력을 국가체제로 편입하고자 하였다. 촌주를 그 편입의 대상으로 삼았는데, 결국 신라 말에 사회 혼란이 발생하자 새로운 사회를 이끈 주체로 다시 등장하였으며, 고려에서도 체제 내 편입과 정비를 도모하였다.
최치원 남북국시대 당에 유학하고 통일신라의 학자, 문장가, 관료이다. 당을 중심으로 한 국제 질서를 인정하면서도 신라의 고유성과 토착성을 알리려고 하였다. 특히, 사람에 도가 있고 사람은 나라의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여, 인간 중심의 보편성과 그에 따른 다양성을 강조하여 신라의 세계화를 이끌었다. 다만, 생존 당시 신라가 쇠퇴하여 정치 이념과 사상은 신라 사회에서 실현되지 못하고, 이후 고려 국가의 체제 정비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문장은 동아시아 문서의 형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어서 조선시대에도 특별히 주목을 받았다.
최치원 (崔致遠)
최치원 남북국시대 당에 유학하고 통일신라의 학자, 문장가, 관료이다. 당을 중심으로 한 국제 질서를 인정하면서도 신라의 고유성과 토착성을 알리려고 하였다. 특히, 사람에 도가 있고 사람은 나라의 차이가 없다고 주장하여, 인간 중심의 보편성과 그에 따른 다양성을 강조하여 신라의 세계화를 이끌었다. 다만, 생존 당시 신라가 쇠퇴하여 정치 이념과 사상은 신라 사회에서 실현되지 못하고, 이후 고려 국가의 체제 정비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문장은 동아시아 문서의 형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이어서 조선시대에도 특별히 주목을 받았다.
경주월성로고분군(慶州月城路古墳群)은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무덤군이다. 4세기에서 6세기 전반에 이르는 56기의 무덤이 모여 있는데, 신라 왕경인 분묘 구역의 동쪽 끝부분에 해당한다. 덧널무덤과 돌무지덧널무덤, 구덩식돌덧널무덤 등의 묘제가 확인되고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어, 신라고분 및 신라토기의 변화와 특징을 구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경주 월성로 고분군 (慶州 月城路 古墳群)
경주월성로고분군(慶州月城路古墳群)은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무덤군이다. 4세기에서 6세기 전반에 이르는 56기의 무덤이 모여 있는데, 신라 왕경인 분묘 구역의 동쪽 끝부분에 해당한다. 덧널무덤과 돌무지덧널무덤, 구덩식돌덧널무덤 등의 묘제가 확인되고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어, 신라고분 및 신라토기의 변화와 특징을 구명할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는 남북국시대 신라의 최치원이 찬술한 대숭복사의 연혁을 담은 비명이다. 886년(헌강왕 12) 봄에 헌강왕으로부터 작성 명령을 받아 890년(진성왕 4)에 작성 완료한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명」 이전에 완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문왕이 즉위 이후 원성왕을 추복하고자 하였던 의도는 물론, 최치원의 아버지 최견일이 곡사 중창과 대숭복사 개창 과정에 깊이 관여하였음을 담고 있다.
대숭복사비 (大崇福寺碑)
대숭복사비(大崇福寺碑)는 남북국시대 신라의 최치원이 찬술한 대숭복사의 연혁을 담은 비명이다. 886년(헌강왕 12) 봄에 헌강왕으로부터 작성 명령을 받아 890년(진성왕 4)에 작성 완료한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명」 이전에 완성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문왕이 즉위 이후 원성왕을 추복하고자 하였던 의도는 물론, 최치원의 아버지 최견일이 곡사 중창과 대숭복사 개창 과정에 깊이 관여하였음을 담고 있다.
수력지명각석편(首力知銘刻石片)은 삼국시대 신라 인명과 관등을 새긴 각석 조각이다. 발견한 수로 주변에 월성해자 시설이 있기에, ‘월성해자비(月城垓字碑)’라고도 부른다. "작인 거정차 급벌차 도인 수력지나말 차3인야(作人 居丁次 及伐車 徒人 首力知奈末 此三人也)"로 석독할 수 있으며, "작인 거정차 급벌차 도인 수력지나말 이들 3인이다."로 해석할 수 있다. 6세기 후반~7세기 중반에 축조된 월성이나 월성해자 등 토목공사를 완료한 뒤 그 사실을 기록한 비석으로 보인다.
수력지명 각석편 (首力知銘 刻石片)
수력지명각석편(首力知銘刻石片)은 삼국시대 신라 인명과 관등을 새긴 각석 조각이다. 발견한 수로 주변에 월성해자 시설이 있기에, ‘월성해자비(月城垓字碑)’라고도 부른다. "작인 거정차 급벌차 도인 수력지나말 차3인야(作人 居丁次 及伐車 徒人 首力知奈末 此三人也)"로 석독할 수 있으며, "작인 거정차 급벌차 도인 수력지나말 이들 3인이다."로 해석할 수 있다. 6세기 후반~7세기 중반에 축조된 월성이나 월성해자 등 토목공사를 완료한 뒤 그 사실을 기록한 비석으로 보인다.
남북국시대 최치원의 형인 현준과 함께 해인사를 이끈 승려.
정현사 (定玄師)
남북국시대 최치원의 형인 현준과 함께 해인사를 이끈 승려.
남북국시대 해인사에서 대덕, 별대덕 등을 역임한 승려.
현준 (賢俊)
남북국시대 해인사에서 대덕, 별대덕 등을 역임한 승려.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병부시랑, 납정절사 등을 역임한 관리.
김처회 (金處誨)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병부시랑, 납정절사 등을 역임한 관리.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역관 출신으로 당나라 초주의 신라방 총관을 역임한 관리.
유신언 (劉愼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역관 출신으로 당나라 초주의 신라방 총관을 역임한 관리.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견당 청익승 엔닌[圓仁]의『입당구법순례행기』와 관련된 역관.
박정장 (朴正長)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견당 청익승 엔닌[圓仁]의『입당구법순례행기』와 관련된 역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로 견당사의 통역과 당나라 관공서와의 교섭 등을 담당한 역관.
도현 (道玄)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로 견당사의 통역과 당나라 관공서와의 교섭 등을 담당한 역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견당 청익승 엔닌[圓仁]의『입당구법순례행기』와 관련된 역관.
김정남 (金正南)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견당 청익승 엔닌[圓仁]의『입당구법순례행기』와 관련된 역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