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황민호"
검색결과 총 31건
권쾌복은 일제강점기에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 항일 비밀결사 다혁당(茶革黨)을 결성하고 당수(黨首)로 추대되었다. 다혁당은 독서와 토론을 통해 학생들에게 항일 의식을 고취하였으며, 각 분야에서 수재 양성 교육을 통해 독립운동의 역량을 강화해 나가겠다는 목표로 활동하였다.
권쾌복 (權快福)
권쾌복은 일제강점기에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 항일 비밀결사 다혁당(茶革黨)을 결성하고 당수(黨首)로 추대되었다. 다혁당은 독서와 토론을 통해 학생들에게 항일 의식을 고취하였으며, 각 분야에서 수재 양성 교육을 통해 독립운동의 역량을 강화해 나가겠다는 목표로 활동하였다.
김상길은 일제강점기 대구상업학교 재학 중 이상호·서상교 등과 함께 독립운동 단체인 태극단을 결성하고, 관방국장과 군사부장의 직책을 담당하였다. 태극단은 항일 독립운동의 전개를 위해 동지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체력 단련과 군사학에 관한 다양한 지식을 공유하고자 노력하였다. 1943년 5월 조직의 실체가 일제 경찰에 의해 발각되어 체포되었으며, 인천소년형무소에서 복역 중 1945년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김상길 (金相吉)
김상길은 일제강점기 대구상업학교 재학 중 이상호·서상교 등과 함께 독립운동 단체인 태극단을 결성하고, 관방국장과 군사부장의 직책을 담당하였다. 태극단은 항일 독립운동의 전개를 위해 동지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체력 단련과 군사학에 관한 다양한 지식을 공유하고자 노력하였다. 1943년 5월 조직의 실체가 일제 경찰에 의해 발각되어 체포되었으며, 인천소년형무소에서 복역 중 1945년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서상교는 일제강점기 대구상업학교 재학 중 교내의 항일 비밀결사인 태극단의 결성에 참여하여 체육국장으로 활동하였다. 태극단은 동지 간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군사 지식을 공유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상황에 따라서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투쟁에 참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내부의 밀고로 조직의 실체가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어 인천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15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서상교 (徐尙敎)
서상교는 일제강점기 대구상업학교 재학 중 교내의 항일 비밀결사인 태극단의 결성에 참여하여 체육국장으로 활동하였다. 태극단은 동지 간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한편, 군사 지식을 공유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상황에 따라서는 중국으로 망명하여 항일투쟁에 참가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내부의 밀고로 조직의 실체가 일제 경찰에게 발각되어 인천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15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유흥수는 일제강점기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 윤독회와 문예부를 조직하고 독서와 토론을 통해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다혁당의 결성에 참여하여 항일 조직의 역량을 강화하던 중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1943년 11월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유흥수 (柳興洙)
유흥수는 일제강점기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 윤독회와 문예부를 조직하고 독서와 토론을 통해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다혁당의 결성에 참여하여 항일 조직의 역량을 강화하던 중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1943년 11월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윤창하는 일제강점기 광주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같은 학교 이경채의 퇴학 처분에 저항하여 일으킨 동맹휴학에 가담하였으며, 광주사범학교와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이 연합한 독서회중앙부가 조직되자 재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광주고등보통학교의 독서회에서는 조사선전부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하자 시위를 주도하던 중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윤창하 (尹敞夏)
윤창하는 일제강점기 광주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같은 학교 이경채의 퇴학 처분에 저항하여 일으킨 동맹휴학에 가담하였으며, 광주사범학교와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이 연합한 독서회중앙부가 조직되자 재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광주고등보통학교의 독서회에서는 조사선전부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하자 시위를 주도하던 중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조길룡은 일제강점기 광주농업학교 재학 중 광주고등보통학교 및 광주사범학교 학생들과 연합하여 조직한 독서회중앙부에 참가해 출판위원에 선임되었다.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하자 선언문을 작성하여 배포하는 등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의 시위를 주도하였다.
조길룡 (曺吉龍)
조길룡은 일제강점기 광주농업학교 재학 중 광주고등보통학교 및 광주사범학교 학생들과 연합하여 조직한 독서회중앙부에 참가해 출판위원에 선임되었다. 광주학생운동이 발발하자 선언문을 작성하여 배포하는 등 광주농업학교 학생들의 시위를 주도하였다.
최낙철은 일제강점기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 항일 비밀결사 연구회의 조직과 활동을 주도하였다. 연구회는 독서 토론과 학문 연구를 통해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실력을 양성하여 조선 독립에 대비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최낙철은 연구회 지리부 책임을 맡아 활동하였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8·15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최낙철 (崔洛哲)
최낙철은 일제강점기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 항일 비밀결사 연구회의 조직과 활동을 주도하였다. 연구회는 독서 토론과 학문 연구를 통해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실력을 양성하여 조선 독립에 대비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최낙철은 연구회 지리부 책임을 맡아 활동하였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8·15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강윤희는 대한제국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서울에 설치된 유약소(儒約所)에 참여하여 조약의 파기와 을사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리는 한편, 각국 공사에게 조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관동창의진과 13도창의군에서 활동하였으며, 강원도 지역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하던 중 체포되어 춘천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강윤희 (姜允熙)
강윤희는 대한제국기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서울에 설치된 유약소(儒約所)에 참여하여 조약의 파기와 을사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리는 한편, 각국 공사에게 조약의 부당함을 알리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관동창의진과 13도창의군에서 활동하였으며, 강원도 지역을 중심으로 의병 활동을 전개하던 중 체포되어 춘천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김동수는 전라남도 광주 출신의 의병장 양진여 부대에 합진하여 그의 휘하에서 활동하였으며, 1909년 2월 양진여 의진에서 분진한 후에는 주로 전라남도 화순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 5월 19 광주군 덕산면 덕산리에서 일본군 광주분견소군의 습격을 받고 교전하였으며, 이후 체포되어 경성공소원에서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김동수 (金東洙)
김동수는 전라남도 광주 출신의 의병장 양진여 부대에 합진하여 그의 휘하에서 활동하였으며, 1909년 2월 양진여 의진에서 분진한 후에는 주로 전라남도 화순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 5월 19 광주군 덕산면 덕산리에서 일본군 광주분견소군의 습격을 받고 교전하였으며, 이후 체포되어 경성공소원에서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김영백은 대한제국기 1907년 정미칠조약이 체결되고 군대마저 강제로 해산당하자 전라남도 장성군에서 1천여 명의 의병을 규합해 선봉, 중군, 후군장 등의 조직 체계를 갖추고 의병장으로서 큰 전과를 올렸다. 부하 의병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수하였다가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김영백 (金永伯)
김영백은 대한제국기 1907년 정미칠조약이 체결되고 군대마저 강제로 해산당하자 전라남도 장성군에서 1천여 명의 의병을 규합해 선봉, 중군, 후군장 등의 조직 체계를 갖추고 의병장으로서 큰 전과를 올렸다. 부하 의병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수하였다가 대구감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였다.
김원식은 1907년 강원도 금강산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이다. 서양 총 등으로 무장하였으며, 충청북도 제천에서 강원도 지역으로 북상한 이강년 의진과 연합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강원도 금성군 과반리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 중 전사하였다.
김원식 (金元植)
김원식은 1907년 강원도 금강산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이다. 서양 총 등으로 무장하였으며, 충청북도 제천에서 강원도 지역으로 북상한 이강년 의진과 연합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강원도 금성군 과반리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 중 전사하였다.
손기혁은 대한제국기 경상남도 하동군 가종면(지금의 옥종면) 출신의 의병장으로, 김용이 등 다수의 청년과 의병진을 조직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2년 형을 받고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다.
손기혁 (孫琪赫)
손기혁은 대한제국기 경상남도 하동군 가종면(지금의 옥종면) 출신의 의병장으로, 김용이 등 다수의 청년과 의병진을 조직하여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2년 형을 받고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다.
엄해윤은 대한제국기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노응규 의진과 이은찬 의진에서 각각 선봉장과 참모로 의병 활동에 참가하였다. 일제 경찰에 체포된 후에는 경성감옥에서 탈옥을 결행하였으나 실패하고, 교수형을 선고받아 순국하였다.
엄해윤 (嚴海潤)
엄해윤은 대한제국기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노응규 의진과 이은찬 의진에서 각각 선봉장과 참모로 의병 활동에 참가하였다. 일제 경찰에 체포된 후에는 경성감옥에서 탈옥을 결행하였으나 실패하고, 교수형을 선고받아 순국하였다.
이성화는 대한제국기 전라북도 고부군에서 의병을 일의킨 유생 의병장이다. 소규모의 병력으로 고부·정읍·순창·태인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신보현 의병장과 연합작전을 전개하는 등 활발한 군사 활동을 전개하여 일제 군경에 타격을 가하였다.
이성화 (李成化)
이성화는 대한제국기 전라북도 고부군에서 의병을 일의킨 유생 의병장이다. 소규모의 병력으로 고부·정읍·순창·태인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신보현 의병장과 연합작전을 전개하는 등 활발한 군사 활동을 전개하여 일제 군경에 타격을 가하였다.
이필상은 대한제국기 동우회에 가입하여 활동한 의병이다. 1907년 7월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하자 이에 항의하여 총리대신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질렀다. 이 일로 진도로 유배되었으나 탈출하여 해남 일대의 의병과 함께 진도읍 습격 계획을 추진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본서로 호송 중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호송 경찰의 총격으로 순국하였다.
이필상 (李弼相)
이필상은 대한제국기 동우회에 가입하여 활동한 의병이다. 1907년 7월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하자 이에 항의하여 총리대신 이완용의 집에 불을 질렀다. 이 일로 진도로 유배되었으나 탈출하여 해남 일대의 의병과 함께 진도읍 습격 계획을 추진하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본서로 호송 중 탈출을 시도하였으나, 호송 경찰의 총격으로 순국하였다.
안진순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발안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5일 수원군 향남면 발안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중순부터 준비, 계획된 만세운동은 면사무소와 주재소가 파괴되고 일본 순사가 피살되는 등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4월 15일 일제는 제암리 교회에 마을 주민들을 몰아넣고 학살과 방화를 자행하였고, 이때 제암리 교회에서 순국하였다.
안진순 (安珍淳)
안진순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발안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5일 수원군 향남면 발안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중순부터 준비, 계획된 만세운동은 면사무소와 주재소가 파괴되고 일본 순사가 피살되는 등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4월 15일 일제는 제암리 교회에 마을 주민들을 몰아넣고 학살과 방화를 자행하였고, 이때 제암리 교회에서 순국하였다.
안필순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발안리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수원 지역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중순부터 준비 계획된 만세운동은 면사무소와 주재소가 파괴되고 일본 순사가 피살되는 등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4월 15일 일제는 제암리 교회에 마을 주민들을 몰아넣고 학살과 방화를 자행하였고, 이때 제암리 교회에서 순국하였다.
안필순 (安弼淳)
안필순은 일제강점기, 경기도 수원군 향남면 발안리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수원 지역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다. 3월 중순부터 준비 계획된 만세운동은 면사무소와 주재소가 파괴되고 일본 순사가 피살되는 등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4월 15일 일제는 제암리 교회에 마을 주민들을 몰아넣고 학살과 방화를 자행하였고, 이때 제암리 교회에서 순국하였다.
이규승은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사천 3 · 1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4일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에서 일어난 사천 3 · 1운동에 참여하였다. 시위대는 독립 선포식을 거행하고 만세를 부르면서 주재소에 구금되어 있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행진하다 일제와 충돌하면서 주재소를 불태우고 일본 소장 등을 처단하였다. 이후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규승 (李奎昇)
이규승은 일제강점기,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 사천 3 · 1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3월 4일 평안남도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에서 일어난 사천 3 · 1운동에 참여하였다. 시위대는 독립 선포식을 거행하고 만세를 부르면서 주재소에 구금되어 있는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행진하다 일제와 충돌하면서 주재소를 불태우고 일본 소장 등을 처단하였다. 이후 일제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징역 15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기봉은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창원의 진전면 · 진북면 · 진동면 연합 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3일 진전면 · 진북면 · 진동면이 연합하여 전개한 삼진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 주재소가 있는 진동면을 향해 행진하다 헌병대와 격렬하게 충돌하였고, 일제 경찰의 무차별 총격으로 순국하였다.
이기봉 (李基鳳)
이기봉은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창원의 진전면 · 진북면 · 진동면 연합 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3일 진전면 · 진북면 · 진동면이 연합하여 전개한 삼진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헌병 주재소가 있는 진동면을 향해 행진하다 헌병대와 격렬하게 충돌하였고, 일제 경찰의 무차별 총격으로 순국하였다.
이기선은 일제강점기,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3일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4월 1일 홍천읍의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4월 2일 동면에서도 만세운동을 시작하였고, 4월 3일 내촌면에서는 천도교단을 중심으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는데, 시위를 사전 탐지한 일제 헌병의 무차별 총격을 받고 순국하였다.
이기선 (李基先)
이기선은 일제강점기,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한 독립운동가이다. 1919년 4월 3일 홍천군 내촌면 물걸리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4월 1일 홍천읍의 만세운동 소식을 듣고 4월 2일 동면에서도 만세운동을 시작하였고, 4월 3일 내촌면에서는 천도교단을 중심으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는데, 시위를 사전 탐지한 일제 헌병의 무차별 총격을 받고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