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3권. 대장도감에서 발행한 고려 대장경 보유판인 목판본과 유경종(劉敬鐘, 1857-?) 교정본인 조선불교회본(朝鮮佛敎會本)이 전해진다. 최초 근대 영인본은 이 두 본을 교감하여 1958년 동국대학교에서 발간한 것이다. 영인본에 추가적으로 교정을 가한 것이 『한국불교전서(韓國佛敎全書)』 제1책에 실려 있다.
송나라 『고승전(高僧傳)』 권 4의 「신라국사문원효전 (新羅國沙門元曉傳)」에 비교적 상세하게 이 논을 저술한 연기가 소개되어 있다. 당시 국왕은 백고좌(百高座)를 설치하고 『인왕경(仁王經)』 대회를 열어 두루 석덕(碩德)을 찾았는데, 원효의 고향인 상주에서는 그를 추천하였으나 다른 승려들이 싫어하고 비방하므로 이에 참석할 수 없었다.
얼마 뒤 왕후가 종기를 앓는데 약효가 없었을 뿐 아니라 왕자와 신하들이 모든 산천 영사(靈祠)에 기도를 했으나 효험이 없었다. 그때 어떤 무당이 타국으로 사람을 보내 약을 구하면 병이 나을 것이라고 하므로 사신을 당나라로 보냈는데, 가는 도중 물결을 헤치고 한 노인이 나타나 그 사신을 용궁으로 안내하였다.
그 궁전에는 금해(鈐海)라는 용왕이 있었는데, 사신에게 “너희 나라 왕의 부인은 청제(靑帝)의 셋째 딸이다. 우리 궁중에 옛날부터 『금강삼매경』이라는 경이 있으니, 이각(二覺)이 원통(圓通)하여 보살행을 행하는 것이 그 내용이다. 지금 부인에게 병이 있으니 이것을 증상연(增上緣)으로 삼아 이 경을 보내 그 나라에 유통시키고자 할 뿐이다.” 하고, 30장 가량의 종이 뭉치를 사신에게 주었으나 순서가 뒤바뀐 책이었다.
용왕은 대안성자(大安聖者)를 시켜 흩어진 종이의 차례를 맞추고 원효에게 청하여 소(疏)를 짓게 하면 왕비의 병이 틀림없이 나을 것이라고 하였다. 사신의 말을 들은 왕은 곧 대안성자를 불러 그 차례를 맞추도록 하였다. 대안이 경을 받아 차례를 맞추어서 8품으로 만든 뒤, “속히 원효에게 강설하게 하십시오, 다른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경을 받은 원효는 사신에게 “이 경은 본각(本覺)과 시각(始覺)의 두 각을 종(宗)으로 하고 있으니 나에게 뿔 달린 탈것을 마련해 주고 책상을 갖다가 두 뿔 사이에 걸쳐 놓고 그 위에 필연(筆硯)을 놓으라.”라고 하였으며, 내내 이 소달구지 위에서 소(疏) 5권을 지었다. 왕이 날짜를 정하여 황룡사(黃龍寺)에서 법좌를 마련할 즈음에 도둑이 새로 지은 소를 훔쳐 달아나 버렸다.
이 사실을 왕에게 아뢰어 다시 사흘을 연기하고, 새로이 논술하여 3권으로 성론(成論)하였다. 이것을 약소(略疏)라고 부른다. 왕과 신하, 도인과 속인 등이 법당을 가득 메운 가운데 원효가 그 뜻을 펴는데 위엄과 격식이 있고, 어려운 대목을 해석하는데 가히 만고의 원칙이 될 만하였다.
원효는 시를 읊기를, “옛날 백 개의 서까래를 구할 때에는 참여할 수 없었는데, 오늘 아침 하나의 대들보를 가로지름에 있어서는 오직 나만이 할 수 있구나.” 하였다. 그러자 그곳에 모인 모든 덕망 높은 큰스님들이 얼굴을 숙이고 부끄러운 낯으로 엎드려 참회하였다고 한다.
원효 사상과 관련하여, 이 논 서분(序分)에 서술된 술대의(述大意), 변경종(辨經宗), 석경명(釋經名) 부분은 주목할 만하다.
첫째, 대의를 말하는 글은 시종 하나의 운율을 지닌 대단한 명문이다. 전편의 사상을 간결하게 말하면서 심오한 불교 사상을 남김없이 담고 있다.
둘째, 경의 종지(宗旨)를 판별하는 부분은 원효의 불교관 전체를 이해하는 데 길잡이가 된다. 바꾸어 말하면 종지에 대한 설명은 원효의 교판(敎判)이라고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원효가 “합해서 말하면 일미관행(一味觀行)이 그 요(要)이고, 열어서 말하면 십중법문(十重法門)이 그 종(宗)이다.”라고 한 표현은 이 경이 대승불교의 신앙 지침서이며 믿음과 참회의 차원을 직결시킨 신비한 위력이 있음을 나타낸다.
셋째, 『금강삼매경』이라는 제명을 철저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풀이한 것이다. 원효는 이 논을 쓰면서 많은 경론을 인용하여 논리의 정립은 물론 학문의 조직을 집성하였다.
이하에서는 『금강삼매경』에 대한 본격적인 주석이 이어진다. 『금강삼매경』은 서품(序品), 무상법품(無相法品), 무생해품(無生行品), 본각리품(本覺利品), 입실제품(入實際品), 진성공품(眞性空品), 여래장품(如來藏品), 총지품(總持品)의 총 8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흔히 이 경을 중국의 위찬(僞撰)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경이 지니고 있는 사상 구조의 위치 때문이다.
경 안에는 대승의 공(空) 사상이 저변에 깊이 깔려 있고, 『금강반야경』이나 『중론(中論)』의 게송에 나오는 문구와 매우 비슷한 것이 여러 곳에 언급되어 있으며, 『반야심경』의 주명(呪名)과 같은 표현도 많이 삽입되어 있다. 또한, ‘삼계허망만법유심(三界虛妄萬法唯心)’이라는 화엄 교리의 사상이나, 『보살영락본업경』과 『범망경』의 십신(十信) · 십주(十住) · 십행(十行) · 십회향(十廻向) · 십지(十地) · 등각(等覺) · 묘각(妙覺)의 52위설을 내세워서 대승의 9경을 심오하게 유지하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재가, 즉 보살 불교를 지향하는 이론은 『유마경(維摩經)』의 경설과 매우 비슷한 점이 있으며, 회삼귀일(會三歸一)이나 궁자비유(窮子譬喩)는 『법화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열반경』의 사상을 강조한 것으로는 상락아정(常樂我淨) · 불성여래장(佛性如來藏) · 일천제(一闡提)에 대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서방 정토에 왕생하는 사상과 정법(正法) · 상법(像法) · 말법(末法)의 삼시 사상(三時思想), 참회 사상 등이 깊이 깔려 있는 것이 이 경의 특징이다. 나아가 『능가경』 · 『섭대승론』 · 『대승기신론』과의 밀접한 관련은 거의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경전의 내용이 난해하여 주석서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 원효는 이에 대해 다양한 전거들을 섭렵하여 내용을 풀이하였고, 이를 통해서 경전의 의미가 밝혀지게 되었다.
이 논에서 인용된 경론과 횟수는 대 · 소승의 경전 인용이 11경 28회이며, 논서의 수도 12종 24회이다. 구체적으로는 『능가경(楞伽經)』 3회, 『법화론(法華論)』 2회, 『법화경』 3회, 『기신론』 3회, 『십지론(十地論)』 2회, 『이장장(二障章)』 4회, 『부증불감경(不增不減經)』 1회, 『불성론(佛性論)』 2회, 『승만부인경(勝鬘婦人經)』 2회, 『무상론(無相論)』 1회, 『섭대승론(攝大乘論)』 2회, 『잡아함경(雜阿含經)』 1회, 『유가론(瑜伽論)』 3회, 『대열반경』 3회, 『해심밀경(解深密經)』 1회, 『중변론(中邊論)』 1회, 『지도론(智度論)』 2회,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 1회, 『화엄경』 3회, 『보성론(寶性論)』 1회, 『범망경(梵網經)』 1회, 『인왕경』 1회, 『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 9회 등이다. 또한, 자신의 논서인 『이장장(二障章)』이 인용되어 있는 것도 특기할 만하다.
『금강삼매경론』은 『기신론소(起信論疏)』와 함께 원효의 사상을 대표하는 2대 저술로서 평가받는다. 원효가 『금강삼매경』의 주석서를 내기 이전에는 어느 누구도 이 경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용궁 출입의 연기가 발생한 것은 원효에 의하여 처음으로 이 경의 존재 이유가 세상에 드러났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므로 이 저술은 당나라 학승들에 의하여 일반적인 주석서을 칭하는 소(疏)가 아니라 보살이 지은 주석서라는 의미의 논(論)으로 추앙되기까지 하였다. 불교 전반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이는 이 경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인데, 원효는 이를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주석서를 지은 것이다. 이 논의 사상적 성격은 중국 남북조시대에서 당나라까지 중국 불교에서 제기되었던 교리가 고루 포함되었고, 그러한 모든 교설을 회통하고 있는 것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