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학산(鶴山). 평양 출생. 휘문고등보통학교를 마치고 일본 마쓰모토고등학교[松本高等學校]를 거쳐 1937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진단학회(震檀學會)에서 활동하면서 1940년부터 1944년까지 연희전문학교의 강사로 있었다.
광복 이후 경성대학 · 연희대학교 교수로 재임했고, 정부수립 후에는 문교부 고등교육국장을 역임하였다. 1949년 이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와 연희대학교 교수를 겸임하다가 6 · 25때 납북당해 생사를 알 수 없다.
실증사학(實證史學)에서 출발한 역사학자였으나, 광복 이후 손진태(孫晉泰)와 더불어 신민족주의사학(新民族主義史學)을 제창하였다. 1950년에 간행한 『국사요론(國史要論)』은 바로 신민족주의 사관의 입장에서 한국사의 체계화를 시도한 개설서였다. 주로 한국과 만주관계에 관심을 가져, 그 연구결과가 『한국만주관계사의 연구』라는 논문집으로 1954년에 출간되기도 하였다.
부호의 아들이었던 이인영은 일제시대에 많은 문화재(현, 국가유산)가 일본인들의 손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자 골동품과 고서의 수집에 힘을 쏟았다. 그러한 수집과 관련해 서지학과 활자연구에도 일가견을 보였다. 『청분실서목(淸芬室書目)』이라는 목록과 해제는 이인영의 수장서적을 정리한 자필본 원고로, 1968년에 영인되었다.
이인영이 강조한 한국사 인식의 출발점은 ‘민족적 자유와 평등’에 대한 관심에 있었다. 따라서 저서 『국사요론』에서는 민족의 성장과정에 기준을 둔 시대구분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또, 한국과 세계와의 관계(대외관계)를 중시해 ‘민족적 세계관에 입각한 세계적 국사’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이인영의 논리는 오히려 일제 식민주의사관(植民主義史觀)의 ‘정체성(停滯性)’과 ‘타율성(他律性)’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1998년에 『학산이인영전집(鶴山李仁榮全集)』 4권이 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