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문정유고 ()

유교
문헌
조선 후기, 문신 민유중의 시 · 서(書) · 차자 · 상소 등을 수록한 시문집.
문헌/고서
저자
민유중(閔維重)
권책수
10권 10책
권수제
文貞公遺稿
판본
필사본
표제
민문정유고(閔文貞遺稿)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민문정유고』는 조선 후기의 문신, 민유중의 시·서(書)·차자·상소 등을 수록한 시문집이다. 10권 10책의 필사본이다. 이 책은 산절과 교정,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아 정상적인 문집 체재를 갖추지 못한 유고로 가편집본의 사본으로, 내용의 분류와 편차에 질서가 없다. 민유중은 인현왕후의 아버지로서 송시열을 추종한 노론의 중진이자 외척관료로서 오랫동안 권력을 행사한 인물이다. 따라서 이 유고는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의 분열·대립·갈등을 보여 주는 많은 자료들이 포함되어 있는 당쟁사 연구에 중요한 문헌이다.

정의
조선 후기, 문신 민유중의 시 · 서(書) · 차자 · 상소 등을 수록한 시문집.
저자 및 편자

민유중(閔維重, 1630~1687)은 자는 지숙(持叔), 호는 둔촌(屯村), 본관은 여흥(驪興), 봉호는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아버지는 민광훈(閔光勳)이며, 어머니는 이광정(李光庭)의 딸이다. 숙종의 비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아버지이다. 민시중(閔蓍重)민정중(閔鼎重)의 동생이다.

1649년(인조 26)에 진사가 되고, 1651년(효종 2)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검열, 시강원설서, 사헌부감찰, 사간원정언, 병조정랑 등을 역임하였다. 그 뒤 1657년 사헌부 지평이 되어 낭선군(朗善君) 궁노(宮奴)의 치죄(治罪) 문제로 체직되고 종성판관(鏡城判官)으로 나갔다. 이듬해 예조정랑이 되어 중앙 관리로 돌아와 부수찬, 부교리 등을 역임하였다. 1659년에는 김육(金堉)의 장사(葬事)에 수도(隧道)를 쓴 김좌명(金佐明)의 잘못을 탄핵하였다가 여론의 비난을 받아 체직되기도 하였다.

1663년(현종 4) 이후 이조정랑, 홍문관교리, 사헌부집의, 전라도관찰사, 대사간, 충청도관찰사, 평안도관찰사, 형조판서, 대사헌, 한성부판윤, 호조판서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숙종(肅宗)이 즉위하면서 남인(南人)이 집권하자, 벼슬을 내놓고 충주에 내려가 지내다가 끝내 흥해(興海)로 유배되었다. 그 뒤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실각하자, 다시 조정에 들어와 공조판서·호조판서 겸 선혜청당상·병조판서 등을 역임하며 서인 정권을 주도하였다.

1681년 숙종의 국구(國舅)가 되자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에 봉해지고, 이어 돈녕부영사(敦寧府領事)가 되었다. 이듬해 금위영(禁衛營)의 창설을 주도하여 병권과 재정권을 모두 관장하였다. 이후 점차 외척으로서 정권을 오로지 한다는 비난이 일어 관직에서 물러나 두문불출하다가 죽었다.

본집에 수록된 시문(詩文)의 배열이 정연하지 않는 것은 그가 생전에 적어 두었던 유고(遺稿)에 세심한 교정을 하지 않았던 탓인 것 같다. 혹시 생전에 적어 두었던 작품과 스스로 편차(編次)해 두었던 순서(順序) 그대로를 사후 자손들이 편찬해 낸 것인지도 모른다.

서지사항

10권 10책. 필사본. 이 책은 정상적인 문집 체재를 갖추지 못한 유고(遺稿) 가편집본의 사본으로, 내용의 분류와 편차에 질서가 없고, 서문·발문·지(識) 등 일체의 서지 사항이 누락되어 있다.

편찬 및 간행경위

본서는 산절(刪節)과 교정,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은 초본(草本)으로 다양한 필체로 이루어져 있고, 오랜 기간 동안 여러 사람들의 손을 거쳐 수집한 흔적이 있다. 분권(分卷)과 권별 배열 순서에 원칙이 없다는 점, 서간의 경우 한두 줄 짜리 안부 편지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어 산절(刪節)이 행해지지 않았다는 점, 〈경상우도어사서계(慶尙右道御史書啓)〉처럼 필적을 달리하여 중복된 내용이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본문에 대한 교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결문(缺文)이 있는 상소가 많은 것이나 서계(書啓) 등에 비변사의 회계(回啓) 사항이 그대로 실려 있는 점 등으로 보아 초고 상태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본서는 산절, 교감, 교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초고 형태로 필사 경위를 확인 할 수 없는 사본(寫本)이다.

구성과 내용

10권 10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서발(序跋)이나 부록이 없다.

권1은 시 160여수와 잡저(雜著), 응제문(應製文)이다. 시는 비교적 젊은 시절에 지은 것과 단오첩(端午帖), 춘첩자(春帖子) 등이 있고 선조인 민제인(閔齊仁)의 시에 차운한 시가 24편이다.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만시(挽詩)는 65편으로 대체로 연도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잡저는 저자가 왕의 측근에 있을 때 왕을 대신해 지은 교유문(敎諭文)이 대부분이다.

권2~3은 서(書) 40여 편으로 스승인 송시열(宋時烈)과 스승이자 장인인 송준길(宋浚吉)을 비롯하여 송시묵(宋時默)· 이단상(李端相)서인(西人) 노론계 인물들과 아들 민진후(閔鎭厚) 등에게 보낸 서신들이 대부분이다. 여기에는 당시의 여러 가지 정치 현안 문제에 관한 논의가 포함되어 있는데, 특히 예송(禮訟)에 관련된 내용들이 많다. 그 중 1674년(현종 15)의 제2차 예송에서 대공설(大功說)을 지지한 저자 자신의 견해도 잘 표명되어 있다.

권4는 상소(上疏)· 차자(箚子) 60여 편으로 연도순으로 편차되어 있다. 이 가운데 「봉작후걸해겸대제임소(封爵後乞解兼帶諸任疏)」와 「인박태유소척인혐소(因朴泰維疏斥引嫌疏)」는 각각 1681년(숙종 7)과 1683년 올린 것인데 전자는 저자의 차녀(次女)가 중전( 인현왕후(仁顯王后))에 뽑혀 국구(國舅)로서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에 봉해지자 병조 판서와 선혜청 등 겸대직을 사직한 상소이고, 후자는 정언 박태유(朴泰維)가 저자를 외척(外戚)으로서 국정(國政)에 참가한다고 탄핵하자 이에 대한 자열소(自列疏)이다.

권5는 제문(祭文), 표전(表箋), 조고(詔誥), 잠(箴), 설(說) 등이다. 제문은 70여 편인데, 이중 기우제문(祈雨祭文)이 13편이다. 표문(表文), 조고(詔誥) 등은 모두 중국(中國)의 고사를 인용하여 과제(課製) 등으로 지은 의작(擬作)이고, 이외에 「탄일전문(誕日箋文)」, 「근독잠(謹獨箴)」, 「심잠(心箴)」이 있으며, 음양(陰陽) 두 기(氣)의 순환을 통해 혼신(鬼神)의 이치를 설명한 「혼신자이기지량능설(鬼神者二氣之良能說)」이 있다. 잡저에는 성리학에 관련된 단편적인 논변(論辨)들이 포함되어 있다.

권6~7은 서계(書啓)· 장계(狀啓), 계사(啓辭)이다. 서계와 장계는 저자가 암행어사로 파견되었을 때와 지방관으로 있을 때 올린 보고서들이다. 당시 사회의 실상들이 잘 묘사되어 있다. 특히 「강화부군향번고별단(江華府軍餉反庫別單)」과 「각진별비군향(各鎭別備軍餉)」 등에는 당시의 군량미 비축 현황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조선 중기 군사 재정의 실태를 알려 주고 있다. 서계는 총 14편 중 13편이 1664년에 올린 것인데, 강화(江華)에 군량과 군기를 점검하러 갔을 때와 관서(關西), 청북(淸北) 지역에 염찰사(廉察使)로 갔던 시기이다. 계사는 모두 58건이 연도순으로 편차되어 있는데 대부분 삼사(三司)와 정원(政院)에 있을 때 올린 것이고 맨 끝의 「아방계사(兒房啓辭)」는 부원군(府院君)으로 봉작(封爵)된 뒤에 평시서(平市署), 장원서(掌苑署) 등의 제조를 맡으면서 올린 계사이다.

권8은 상소·차자이다. 권4의 상소보다 시기적으로 앞에 올린 상소들이 연도순으로 수록되어 있다. 내용은 저자가 삼사(三司)에 있을 때 올린 것이 대부분이다.

권8 이후의 것은 추후에 수집·등재한 것으로 보인다. 상소와 차자는 저자가 관직에 있을 때 올린 여러 가지 정책 건의와, 정적 남인들에 대한 탄핵 및 자신의 사직 표명 등이 중심 내용을 이루고 있다.

권9~10은 서(書) 70여 편으로 윤증(尹拯)· 박세채(朴世采)소론 인사들에 대한 비판적 논평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의의와 평가

본집의 내용상 특징은 학문적인 저작이나 문학적인 작품보다는 상소(上疏)와 계사(啓辭), 헌의(獻議) 등의 공거문(公車文)과 서간(書簡)의 비중이 매우 크다는 것이다. 약간의 시문(詩文)조차 당시 사대부(士大夫) 집안에서 교제상 짓게 되는 만시(挽詩)와 제문(祭文)이 대부분이다. 이는 저자가 학자(學者)라기보다는 관료(官僚)로서 대부분의 저작활동이 관직 생활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즉 본서는 조선 중기 당쟁시대에 송시열을 추종한 노론의 대표적 정객이었으며, 훈척대신의 문집이다. 따라서 본서에는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의 분열·대립·갈등을 보여 주는 많은 자료들이 포함되어 있어 당쟁사 연구에 중요한 문헌이다. 또한, 당시 상류 관료사회의 인맥과 그들의 의식 경향을 이해하는 데 유용한 자료가 된다.

현황

민문정유고는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한국고번번역원에서 필사 경위를 확인할 수 없는 사본인 서울대학교 규장각장 소장본을 저본으로 『한국문집총간(韓國文集叢刊)』 137집, 문정공유고(文貞公遺稿)라는 제명으로 영인하였다.

참고문헌

단행본

『한국문집총간 해제』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이연숙(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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