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신창(新昌). 자는 여평(汝平), 호는 하곡(霞谷). 온양 출신. 고려 수문전제학(修文殿提學) 맹희도(孟希道)의 9세손이며, 할아버지는 증 집의 맹유백(孟惟白)이고, 아버지는 맹희(孟喜)이며, 어머니는 양주조씨(楊州趙氏)로 조눌(趙訥)의 딸이다.
어려서 좌윤(左尹) 여유길(呂裕吉), 장령(掌令) 조익(趙翊), 참판 이명준(李命俊)에게 학업을 받았다. 김장생(金長生)의 문인으로 송시열(宋時烈)·김반(金槃)과 교유하였다.
1623년(인조 1)에 정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이어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박사(博士)·전적(典籍)을 거쳐 사헌부감찰, 호조좌랑이 되었다. 1626년에 형조정랑을 거쳐 예조정랑 겸 춘추관기주관(禮曹正郎兼春秋官記注官), 종묘서영(宗廟署令)이 되었다. 1629년에 금산군수로서 치적이 뛰어나 내직으로 호조낭관이 되고, 이어 외직으로 장흥부사에 나갔다가 다시 내직으로 제용감정(濟用監正)이 되었다.
1636년에 선산부사가 되어 금오성(金烏城)을 수축하고 군정(軍政)을 정비했으나, 병자호란에 패망하자 척화신(斥和臣) 등용 등 시무(時務) 10조를 건의하였다. 그 뒤 상의원정(尙衣院正)을 거쳐 울산부사가 되었는데, 항상 말하기를 “백성을 사랑하는 데는 반드시 먼저 절용(節用)해야 한다.”하며 스스로 쓰임을 절약하고 이서(吏胥)를 엄하게 다스렸다. 이에 부고(府庫)가 넉넉해져 백성들에게 상부(常賦)를 감면해주었다.
다시 내직으로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사예(司藝)가 되고, 여러 시정(寺正)에 여섯 차례나 임명되었는데 나가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 뒤 통례원통례(通禮院通禮)·정주목사(定州牧使)·개성부경력(開城府經歷)·안동부사를 거쳐, 끝으로 봉상시정(奉常寺正)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가 1656년에 69세로 죽었다.
어려서 낚시질을 좋아하였다. 하루는 어머니가 울면서 말하기를 “너는 과부의 아들로 학문을 폐하고 이리 하느냐.”하니, 슬프게 울고 이때부터 한 뜻을 새겨 마침내 자립하였다. 벼슬에 있으면서 무사한 때에는 하루도 어머니를 떠나지 않았고, 백성들에게는 양로의 잔치를 베풀어 민속을 교화하였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