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0년(선조 23) 진사가 되고, 1594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00년 사서가 된 뒤 정언 · 부수찬에 이어 1602년 이조좌랑과 성주목사를 역임하였다. 경기도암행어사로 다녀와 1606년 사예가 되었다. 1608년(광해군 즉위년) 중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한 뒤 사성 · 응교 등을 역임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1610년 강원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동부승지 재직 중 김직재옥사(金直哉獄事)에 장인인 황혁(黃赫)이 연루되어 삭직당하였다. 그러나 1623년 인조반정을 주동, 정사공신(靖社功臣) 3등에 책록되고, 익녕군(益寧君)에 봉해졌다. 병조참의 · 이조참의 · 대사간 · 동부승지 · 부제학 · 대사헌 · 병조참판 등을 차례로 역임한 뒤 1626년에는 도승지가 되었다.
1628년 유효립(柳孝立)의 모반을 고변, 영사공신(寧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지의금부사가 되었다. 예조판서를 거쳐 1630년 대사헌으로 재직 중 흉년으로 안팎이 곤궁할 때 사치가 심함을 지적, 이의 시정을 진언하였다. 이어서 우참찬 · 이조판서 · 좌빈객 · 병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한 뒤 1634년 예조판서와 부묘도감제조(祔廟都監提調)를 겸하였다. 이듬해 좌참찬 · 대제학을 지내고, 1636년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마침 그 해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화의(和議)를 주장, 최명길(崔鳴吉) · 김신국(金藎國) · 이경직(李景稷) 등과 청나라 군사 진영을 내왕하며 화의를 위한 실무를 수행하였다. 1639년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지고, 이듬해 영의정에 올랐다. 한편 한재(旱災)로 인한 기민(饑民)의 구제를 위해 부민(富民)들에게 실직(實職)을 주어 모속(募粟)할 것을 주장하였다.
1640년부터 1645년까지 영의정과 좌의정을 번갈아 역임하며 국왕을 적극적으로 보필하였다. 1645년(인조 23) 청나라에서 귀국한 소현세자(昭顯世子)가 급사하자 세손을 잇는 것이 상도(常道)임을 들어 봉림대군(鳳林大君: 뒤의 효종)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인조의 의사에 반대하였다. 일찍이 시명을 떨쳐 『청구영언』에 시조 1수가 전한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