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근대에 ‘훈구(勳舊)’는 “중요한 공로를 세워 공신에 책봉된 나이 많은 신하”를 의미하는 ‘원훈구신’을 줄인 표현이었다. 고려시대에는 그리 많이 쓰이지 않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자주 사용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훈구’라는 용어는 모두 320여 회가 나온다. ‘훈구’로 지칭된 인물은 대부분 공신이었고 60세 가까운 나이가 돼서야 그렇게 불렸다. 경력도 매우 화려해서 대부분 문과에 급제하고 고위 관원에 올랐다. 이런 측면은 조선시대에 ‘훈구’라는 용어가 ‘원훈구신’이라는 원래의 의미에 합당하게 사용됐음을 보여준다.
현대 한국사 연구가 시작되면서 ‘훈구’는 ‘훈구파’라는 개념으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훈구파’는 그 자체의 중요성을 인정받기보다는 새로운 지배층으로 평가된 ‘사림파’가 등장하기 이전의 대립 세력으로 파악된 측면이 컸다.
조선 건국에 공로를 세운 인물이나 그 가문을 중심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훈구파가 본격적으로 세력을 확장한 계기는 세조의 계유정난과 즉위부터 시작해 성종 초반까지 이어진 다섯 차례의 공신 책봉이었다.
처음 책봉된 공신은 정난공신이었다. 세조와 그 일파가 계유정난에 성공한 직후인 1453년(단종 1) 11월 43명이 선정된 정난공신은 그뒤 형성된 공신 세력의 원형이 되었다.
한명회(韓明澮) · 정인지(鄭麟趾) · 한확(韓確) · 최항(崔恒) · 권람(權擥) 등 12명으로 구성된 1등공신은 그 핵심을 이뤘다. 대체로 세조와 비슷한 나이인 30대가 많았고, 정난의 군사적 특징에 따라 무인이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였다.
두 번째 공신은 세조가 즉위한 직후인 1455년(세조 1) 1월 46명이 책봉된 좌익(佐翼)공신이었다. 정난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았던 신숙주(申叔舟)가 2등공신에 선정되면서 세조의 치세를 보좌할 주요 인물이 확정되었다.
정난 · 좌익 공신은 세조 때의 중앙 조정을 강력히 지배하였다. 세조 때 이뤄진 15회의 주요 인사 이동에서 임명된 120명 가운데 이 두 공신이 아니었던 인물은 28명뿐이었다. 삼정승은 모두 공신이었고, 정인지 · 정창손 · 신숙주 · 구치관 · 최항 등이 역임한 영의정은 1등공신의 명단과 거의 일치하였다. 핵심 관직인 이조 · 병조 판서도 대부분 공신이었다.
이런 공신 세력은 10년 넘게 안정적으로 유지되면서 확대되었다. 그런 흐름이 일시적이나마 크게 바뀐 계기는 1467년(세조 13) 5월에 일어난 이시애 난이었다. 그 사건은 반란이라는 성격 자체도 중요했지만 한명회 · 신숙주 · 김국광 등 주요 대신이 가담했거나 연루됐다는 소문이 돌면서 더 큰 충격을 줬다.
이런 혼란은 이시애 난이 진압된 직후인 1467년(세조 13) 9월에 책봉된 적개(敵愾)공신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45명의 적개공신은 이전의 공신이 대부분 배제되고 새로운 인물로 채워졌다. 이전에 공신으로 책봉된 사람은 조석문과 한계미뿐이었다. 아울러 반란의 진압이라는 성격 때문에 문신보다는 무신이 많았다.
그러나 크게 흔들렸던 기존 공신세력의 위상은 곧 회복되었다. 계기는 예종의 즉위와 남이(南怡)의 옥사였다. 신진 세력으로 떠오르던 병조판서 남이가 유자광의 고변으로 처형되면서 39명의 익대(翊戴)공신이 책봉됐는데, 한명회와 신숙주가 1등공신으로 선정됐다는 사실이 보여주듯 그것은 이전의 정난 · 좌익 공신 체제로 복귀한다는 결정이었다.
예종이 재위 1년 3개월 만에 붕어하고 왕위 계승의 정상적 경로에 있지 않던 성종이 13세의 어린 나이로 갑자기 즉위하면서 조선의 중앙 정치는 상당한 위기에 접어들 수도 있었다. 그런 가능성을 예방하기 위해 세 가지 조처가 시행되었다.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 자성대비)의 수렴청정과 원상제(院相制)의 실시, 그리고 이 시기 마지막이자 다섯 번째인 좌리(佐理)공신의 책봉이었다.
1471년(성종 2) 3월 75명이 선정된 좌리공신은 세조 때부터 형성돼온 훈구 대신들의 지위를 총괄적으로 확인하는 최종적 조처였다. 이전보다 두 배 가까이 많은 좌리공신에는 그때까지의 주요 인물이 망라되었다. 그들은 그 뒤 성종 때의 주요 관직을 독점하였다. 이를테면 성종 때 삼정승 가운데 공신이 아니었던 인물은 치세 맨 끝 해에 우의정으로 임명된 윤호(尹虎)뿐이었다.
원상제도는 훈구대신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제도였다. 신숙주 · 한명회 · 구치관 · 박원형 · 최항 · 홍윤성 · 조석문 · 김질 · 김국광 · 윤자운 · 정인지 · 정창손 · 성봉조 · 윤사흔 등 14명의 원상은 당시를 대표하는 인물로 ‘ 승정원의 재상’이라는 그 제도의 이름에 합당하게 모두 승지와 정승을 역임했고 한 번 이상 공신에 책봉되었다.
이처럼 견고한 정치적 기반을 다져온 ‘훈구파’는 경제적으로도 큰 부를 쌓았다. 그들은 높은 관직에서 나오는 녹봉뿐 아니라 공신 책봉으로 받은 공신전과 별사전(別賜田)을 포함해 개인적인 매입 · 겸병 · 개간 등으로 대규모의 농장과 노비를 소유한 부유층으로 파악된다.
‘훈구파’의 학문적 · 사상적 면모는 실용적 관학파로 평가된다. 신숙주 · 정인지 · 최항 등은 뛰어난 학문적 능력을 인정받아 세종 때 집현전 학사로 재직했고, 그 뒤에는 『 경국대전』 · 『 동국통감』 · 『동국여지승람』 편찬 등 중요한 관찬 사업을 이끌면서 제도 정비와 학문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현대 한국사 연구에서 ‘훈구파’는 세조의 집권과 함께 형성돼 성종 때까지 큰 교체 없이 이어지면서 핵심적 지배층으로 자리잡은 세력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들은 거듭 공신에 책봉되고 대신직을 독점하면서 중앙 정치를 이끌었고, 공적 · 사적 수단을 이용해 거대한 부를 축적하였다.
중요한 제도 정비와 관찬 사업을 주도해 국가가 안정되는데 기여한 실용적 관학파이기도 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훈구파’는 긴밀하고 중첩된 혈연 · 혼인 관계를 형성해 영향력과 지위를 확대하고 재생산함으로써 견고한 특권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이처럼 독점적 지위를 차지한 ‘훈구파’는 권력의 편중과 경제적 부패 등의 문제를 점차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런 문제를 본격적으로 비판한 세력은 ‘ 사림파’였다.
사림파는 ‘재지의 중소지주’라는 사회 경제적 배경을 지니고 성종 중반부터 삼사를 거점으로 진출하였다. 사림파는 ‘훈구파’의 권력 독점과 경제적 비리 등을 탄핵함에 따라 두 세력의 갈등은 점차 격화되었다. 그런 충돌이 폭발한 정치적 사건이 연산군 때부터 명종 때까지 발생한 네 차례의 사화였다.
그때마다 ‘사림파’는 상당한 타격을 입었지만 그런 시련을 극복하고 선조 초반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자리잡았다.
지금까지 살펴본 이런 연구는 조선 전기 정치사의 전개를 지배 세력의 교체와 연결해 설명하고, 그런 변화의 배경에는 사회 경제적 기반과 사상적 지향의 차이가 있었음을 파악함으로써 한국사를 논리적이고 발전적으로 이해했다는 중요한 역사학적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충분하게 실증되지 않았거나 부분적으로만 증명된 개념에 입각해 여러 사실을 설명함으로써 실제와 어긋나는 역사상을 조립했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주요 쟁점으로는 조선시대 지배층의 가문적 연속성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았고, ‘재지의 중소지주’라는 사회 경제적 배경을 지나치게 강조했으며, 대신과 삼사의 고유 임무와 관직 체계의 연속성을 간과했다는 문제 등이다. 또한 새로운 지배 세력으로 등장한 ‘사림파’의 긍정성을 부각시키면서 기존의 ‘훈구파’와 도덕적 선악 구도로 대비한 것도 다시 검토해야 할 측면으로 지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