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 광성보 ( )

건축
유적
문화재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에 있는 조선 후기 군사 진보.
이칭
약칭
광성보
유적
건립 시기
조선 후기
관련 국가
조선
관련 인물
어재연
면적
144,632㎡
소재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71년 12월 29일 지정)
소재지
인천 강화군 불은면
내용 요약

강화 광성보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에 있는 조선 후기 군사 진보이다. 조선 효종~숙종 연간에 강화도 해안을 따라 설치된 군사 진보 가운데 하나로 1658년(효종 9) 신설되었다. 별장의 지휘 아래 광성돈대 등 2~3개의 돈대를 관할하였다. 1871년(고종 8) 신미양요 당시 최대 격전지로 미군의 상륙 부대와의 전투에서 지휘관인 중군 어재연과 조선군 수비대 대부분이 전사한 역사적 현장이다.

정의
인천광역시 강화군 불은면에 있는 조선 후기 군사 진보.
건립 경위

1658년(효종 9) 강화도 주7를 위해 해안가에 설치된 군사 지휘소다. 조선은 병자호란 당시 강화가 함락된 역사적 경험을 교훈 삼아 섬의 방비를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그 일환으로 우선 효종~숙종 연간에 단계적으로 강화 연안을 따라 13개의 진 · 보를 다른 지역에서 옮겨 오거나 새로 설치하였다. 광성보는 당시 강화에 신설된 진 · 보 가운데 하나이다. 종 9품 별장의 지휘 아래 군관 15인, 토졸 45인이 배속되었고, 군선 9척과 조총, , 화포, 완구, 불랑기 등 각종 화포와 탄환, 화약이 비치되었다. 1679년(숙종 5) 강화 연안을 따라 축조한 48개의 돈대 가운데 광성 · 손돌목 2개의 돈대를 관장하였다가 이후 광성 · 화도 · 오두 등 3개의 돈대를 관할하였다.

광성보는 신미양요 당시 최대 격전지였다. 1871년(고종 8) 6월 1일(양력) 주4을 거쳐 강화해협(염하)을 따라 북상하던 미국 함대가 손돌목 근처에 도달하자 광성보에서 사격을 하였고 남쪽의 덕진진주8에 위치한 주1에서 이에 호응하면서 함대의 북상을 막았다. 북상에 실패한 미군은 6월 10일 초지진에 상륙하여 이튿날 점령하고 이어 덕진진을 함락한 뒤 광성보로 향하였다. 미군 상륙 부대의 마지막 공격 목표였던 광성보에는 진무중군 어재연(魚在淵)이 지휘하는 350여 명의 조선군이 방어하고 있었다. 군함의 함포 지원 사격을 받으며 공격한 미군은 조선군을 전멸시키고 광성보를 점령하였다. 당시 돈대의 주2주3가 파괴되었으며 ‘수(帥)자기’를 비롯한 깃발과 화포 등이 미군에게 노획되었다.

변천

신미양요 직후 파괴된 성축 등을 수리하였다. 1874년(고종 11)년 광성보와 덕진진, 초지진에 포대를 축조하여 염하 수로의 방비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또 신미양요 당시 미국 함대에 유효한 타격을 가하지 못했던 경험을 교훈 삼아 원거리 타격이 가능한 화포가 광성보와 덕진진, 초지진에 보급되었다.

광성보는 1971년 12월 29일 사적 제227호로 지정되었으며 1970년대 강화 전적지 보수 정화 사업을 시행하면서 돈대와 주9를 복원하여 지금의 모습에 이르렀다. 2011년 광성보에서 강화 광성보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매년 음력 4월 24일에는 신미양요 당시 순국한 어재연 장군과 무명용사의 넋을 기리기 위한 ‘광성제’가 거행되고 있다.

형태와 특징

광성보는 강화 동남쪽 해안선이 손돌목 방향으로 돌출한 언덕에 자리한다. 약 1.5km 남쪽에는 덕진진이, 강화해협(염하) 건너편에 덕포진이 위치한다. 현재 광성보 경내에는 광성 · 손돌목 · 용두 등 3개의 돈대와 강화외성 6개 문루 가운데 하나인 안해루(按海樓)가 위치한다. 손돌목돈대 남측 해안 저지대에는 3개의 지점에 총 16개의 주6를 갖춘 포대가 복원되어 있다. 광성, 손돌목돈대는 1679년(숙종 5)년에 축조된 것이고, 용두돈대는 해안 포대와 함께 19세기 후반 두 차례의 주10를 겪으면서 축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안해루는 1745년(영조 21) 강화외성을 석성으로 개축하면서 건립된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 사적으로 지정된 경내 전체가 광성보의 영역으로 인식되지만 보(堡)는 개별 성곽이나 방어 시설이 아니라, 군사 지휘부이다. 광성보의 본진이 따로 존재하였고 옛 지도를 통해 광성돈대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지금까지 구체적인 위치는 확인되지 않았다.

광성보 경내에는 신미양요 당시 전사한 어재연 · 어재순 형제와 조선군을 기리기 위해 1873년 건립한 2기의 순절비인 쌍충비(雙忠碑)와 무명 순국자들의 시신을 7기의 무덤에 나누어 합장한 것으로 전하는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 순절묘단)이 조성되어 있다.

의의 및 평가

광성보는 17~18세기 보장처 강화와 도성의 방어 체제 구축과 관련된 유적 가운데 하나이다. 1871년 신미양요 당시의 최대 격전지로서 조선 후기 국토 방위와 국난 극복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는 역사적 현장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원전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강도지(江都志)』
『여지도서(輿地圖書)』
『강화부지(江華府志)』

단행본

『강화도의 국방유적』(육군박물관, 2000)
『한국고고학전문사전- 성곽편』(국립문화재연구소, 2012)
『신편 강화사 증보』(강화군 군사편찬위원회, 2015)
『19세기 서구열강의 침입과 강화해양관방체제』(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 2019)
신효승, 『신미양요』(글누림, 2021)

논문

배성수, 「관방의 보루, 보장처 인천」 (『미추홀 2000년 인천정명 600년』, 인천광역시사편찬위원회, 2013)

인터넷 자료

국가문화유산포털(http://www.heritage.go.kr)
국립문화재연구원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https://portal.nrich.go.kr)
주석
주1

경기도 김포시 대곶면 신안리에 있는 조선 시대의 진영. 조선 현종 7년(1666)에 강화에 포함되었다. 이곳은 서울로 통하는 바닷길의 중요한 요충지로, 돈대와 포대 및 파수청이 설치되어 있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 이곳에서 각각 프랑스 함대와 미국 함대에 맞서 싸웠다. 사적 정식 명칭은 ‘김포 덕포진’이다. 우리말샘

주2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여기에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거나 한다. 우리말샘

주3

궁문, 성문 따위의 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 우리말샘

주4

조선 시대에,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구축한 요새. 신미양요ㆍ병인양요 때의 격전지로,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초지리에 있다. 사적 정식 명칭은 ‘강화 초지진’이다. 우리말샘

주5

싸워서 물품이 획득되다. 우리말샘

주6

대포를 올려놓는 장치. 우리말샘

주7

적의 침입이나 피해를 막기 위하여 미리 지키고 대비함. 또는 그런 설비. 우리말샘

주8

강, 호수, 바다 따위의 건너편에 있는 언덕이나 기슭. 우리말샘

주9

궁문, 성문 따위의 바깥문 위에 지은 다락집. 우리말샘

주10

구한말에, 서양 세력이 천주교 탄압이나 통상 문제 따위를 빌미로 일으킨 난리. 조선 고종 3년(1866)에 대원군이 천주교를 탄압하자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범하여 일으킨 병인양요와 고종 8년(1871)에 미국 군함이 통상을 강요하기 위하여 강화도를 침범하여 일으킨 신미양요가 있다. 우리말샘

집필자
이희인(인천시립박물관 학예연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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