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일본기(續日本紀)』에서는 그를 숙위왕자(宿衛王子)라고 하고, 그가 돌아오는 편에 일본대사의 소식을 전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그는 왕자로 당나라에 숙위로 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767년(혜공왕 3) 7월에 이찬김은거를 당나라에 보내 방물(方物)을 바치고 인하여 책명(冊命)을 가해줄 것을 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구당서』신라전에는 “767년(大曆 2)에 헌영(憲英 : 경덕왕)이 죽자 국인(國人)이 그 아들 건운(乾運 : 혜공왕)을 세워 왕으로 삼고, 인하여 대신 김은거를 보내어 표문(表文)을 받들고 입조해 방물을 바치고 책명을 가해주기를 청했다.”고 되어 있다.『당서(唐書)』신라전에는 “766년에는 헌영이 죽자 아들 건운이 즉위하였다. 김은거를 보내어 당나라에 와서 대명(待命)하게 하였다.”고 한 것으로 보아 서로 상이한 내용이 담겨 있다. 물론 결과적으로 같은 일이지만, 미리 가서 대명하고 있었다는 것은 어떤 다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혜공왕은 8세 때 즉위해 어머니 만월부인(滿月夫人)이 섭정하였다. 왕과 모후를 당나라에서 봉책한 것은 768년의 일이다. 같은 해 7월에 30여 일 계속된 대공(大恭)의 난(亂)이 일어났다. 10월에는 이찬신유(神猷)가 상대등이 되고, 그는 시중이 되었다. 이는 어린 왕의 보호역으로 여겨진다.
770년에 대아찬김융(金融)의 반란이 진압된 뒤, 그 해 12월에 시중직에서 물러나고 이찬정문(正門)이 시중이 되었다. 또 774년 9월에 상대등신유가 퇴직하지 않았는데도 이찬양상(良相 : 선덕왕)이 상대등이 된다. 그리고 775년 3월에는 시중정문이 물러감 없이 이찬김순(金順)이 시중이 되었다. 그 해 6월에 드디어 이찬으로 있던 그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복주(伏誅)되고, 8월에는 이찬염상(廉相)이 시중정문과 모반했다가 복주되었다. 777년 4월에 상대등김양상이 소를 올려 시정(時政)을 극론하였다. 그리고 그 해 10월에 김주원(金周元)을 시중으로 삼았다.
혜공왕대의 이와 같은 인사난맥은 조정 중신들의 계속된 반란과 함께 정치적으로 상황이 극도로 불안했음을 말해 준다. 따라서 그는 혜공왕을 도와 국정을 바로잡아보려고 노력했으나 혜공왕의 어지러운 정사가 그로 하여금 반란으로까지 몰고 가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