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조계종 12교구 본사인 해인사(海印寺)의 말사이다.
벽송사는 예로부터 수행처로 널리 알려진 곳이지만 사적기(事蹟記)가 전하지 않아 창건 연대 및 자세한 역사는 알 수 없다. 다만 현 위치에서 50m 위의 옛 절터에 있는 삼층석탑이 조선 전기에 세워진 것으로 보고 있으므로 창건 역시 조선 전기일 가능성이 높다.
1520년(중종 15)에 벽송 지엄(碧松智嚴)이 중창한 이후 ‘벽송’이라는 명칭이 생겼다고 한다. 조선 후기 기록에는 군자사(君子寺)의 산내 암자로서 ‘벽송암’이었다. 1658년경에 간행된 『지장보살본원경』에 “지리산 벽송암에서 간행하여 군자사에 목판을 옮겼다(智異山碧松庵開刊移鎭於君子寺).”라고 되어 있고, 1797년에 간행된 『범망경노사나불설심지법문품보살계본』과 『지장보살본원경』에도 벽송암이라고 되어 있다. 또한 근대의 여러 문헌에서도 벽송암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벽송암은 6 · 25 때 소실된 뒤 곧 중건하였으며, 지금은 독립된 사찰로서 ‘벽송사’가 되었다.
조선 중기 벽송암을 중창한 지엄은 고려 말 태고(太古) 보우의 법통을 이어받은 조사로 여겨진다. 즉 태고 보우 – 환암(幻庵) 혼수 – 구곡(龜谷) 각운 – 벽계(碧溪) 정심 – 벽송(碧松) 지엄 – 부용(芙蓉) 영관으로 이어지는 법통을 계승한 조사이다. 지엄의 제자 부용 영관의 법맥이 청허(淸虛) 휴정(15201604)과 부휴(浮休) 선수(15431615)로 이어져 조선 후기 양대 계파인 청허계와 부휴계를 성립시켰다. 그러므로 오늘날 불교계에서 벽송사는 태고 보우의 법통이 전해진 중요한 수행처로 여긴다.
한편 1746년(영조 22)부터 1907년까지 벽송암에서 개최된 강회(講會)의 참석자가 기록되어 있는 『강회주반록(講會主伴錄)』이 전하고 있는데, 강회의 평균 참여 인원은 4045인이었다. 이는 1819세기에 벽송암이 강원으로 유명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많은 수행자들이 모인 벽송암에서는 지속적으로 불사가 이루어졌다. 1700년에 삼단 탱화를 조성하였고 동별실과 서실을 세웠다. 1760년에는 불상과 후불탱을 보수하고, 1783년에 삼존불을 개금했다. 1876년에 선법당(禪法堂)을 중건하고, 1881년에 산신각을 중창했으며, 1894년에 법당을 새로 세웠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인 보광전(普光殿)을 중앙으로 좌우에 방장선원(方丈禪院)과 간월루(看月樓)가 있으며, 전면에는 산문(山門)과 종루를 배치하였고, 후면에는 산신각이 있다.
벽송사에는 보물 1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현,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2점, 경상남도 민속문화재(현, 경상남도 민속문화유산) 1점이 지정되어 있다.
보물 <삼층석탑>은 조선 전기에 세워진 탑으로 신라석탑의 기본 양식을 충실히 이어받고 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는 <묘법연화경 목판>과 <벽송당 지엄 진영>이 있다. <묘법연화경 목판>은 1685년(숙종 11) 함양 안국사(安國寺)에서 간행되었는데, 언제 왜 벽송사로 옮겨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가로 85㎝, 세로 134㎝의 크기의 <벽송당 지엄 진영>은 1860년에 조성되었다.
경상남도 민속문화유산 <벽송사 목장승>은 벽송사로 들어가는 길가의 양쪽에 마주 보고 서 있는 한쌍의 목장승이다. 2기 모두 몸통이 절반 가량 땅 속에 묻혀 있어, 드러난 높이가 2m 내외이고, 한쪽 장승은 윗부분이 불에 타 파손이 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