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후 4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설립되자 '고유문(告諭文)'을 발표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임시헌법에 따라 명칭을 대한국민회로 변경하였다.
본부인 총부(摠部)를 길림성(吉林省) 왕청현(汪淸縣) 하마탕(蛤蟆塘)에 두고, 그 아래에 민정 기관으로 8개의 지방회와 130여 개의 지회를 두었다. 회장 구춘선(具春先)과 부회장 서상용(徐相庸) 등을 포함해 임원 55명이 총부에 있었다. 북간도의 국민회는 연해주(沿海州)의 대한국민의회(大韓國民議會)와 연계하여 독립운동을 수행하였다.
특히 산하에 안무(安武)를 부장으로 하는 군사부를 두어 무력투쟁을 지향하였다. 군사부는 1920년 5월 27일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 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와 연합해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결성하여 1920년 6월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군사부는 국민회군으로 재편하였으며, 만주 연길현(延吉縣) 명월구(明月溝)에 사관학교를 설립하였다. 또한, 반일 무장투쟁 전개를 위해 군자금 모연(募捐) 활동을 벌였다. 홍범도 연합부대,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와 함께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후 러시아 연해주 이만(伊曼)을 거쳐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였다.
한편, 청산리전투 이후 북간도에 남은 독립운동단체들은 통합운동을 벌인다. 1920년 10월 29일 독립운동단체 통일운동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휘 하에 간북대한의민회(墾北大韓義民會), 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대한광복단(大韓光復團)과 통합하여 총판부(總辦部)를 조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