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온가의 유품은 조선 문신 정온(鄭蘊)과 후손들의 전적, 복식, 생활 자료를 포함한 41점이다. 1987년에 정온의 제복과 조복 등 5점이 ‘정온의 제복’이라는 명칭으로 중요 민속 자료(현, 국가민속문화유산) 제218호로 지정되었으며, 이후 2004년에 후손들의 유품인 복식류, 전적류, 생활 자료를 추가로 지정하면서 ‘정온가의 유품’으로 지정 명칭이 변경되었다. 이 유품으로 정온의 당시 활동 현황이 확인되며 조선 후기 이후의 복식사 연구를 할 수 있어 가치 있는 자료이다. 현재 거창박물관에 기탁되어 있다.
정온(鄭蘊:1569~1641)은 호는 동계(桐溪)이며, 조선 중기 문신으로 1610년(광해군 2) 문과에 급제하여 사간원의 정언, 대사간, 대제학, 이조 주28 등을 역임하였으며 숙종 때 영의정으로 주29.
정온가의 유품(鄭蘊家의 遺品)은 조선 후기의 문신 정온의 집안에서 전해져 온 제복(祭服)과 조복(朝服) 등 5점과 정온의 자료가 포함된 전적류 5점과 후손의 유물인 복식류 21점, 생활 자료 10점을 포함한 41점의 주30이다. 정온의 집안에서 전해져 온 제복 중 흑초의(黑綃衣) 1점과 조복 중 적초의(赤綃衣), 주31, 주32, 금관(金冠) 등 총 5점이 ‘정온의 제복’이라는 명칭으로 1987년에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으며, 2004년 정온가 유물의 전반적인 조사를 통해 정온의 자료가 포함된 전적류 5점과 후손의 유물인 복식류 21점, 생활 자료 10점을 추가로 지정하면서 ‘정온가의 유품’으로 지정 명칭이 변경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 주33에 의해 문화재 지정 번호가 폐지되어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재지정되었다. 유품은 조선 후기 이후의 복식사 연구와 정온의 당시 활동 현황이 확인되어 가치 있는 자료이다. 현재 거창박물관에 기탁되어 있다.
1987년에 지정된 유물로는 제복 중 흑초의 1점과 조복 중 적초의, 훈상, 중단, 금관 등 총 5점이 있다. 당시에는 정온의 것으로 평가 받았으나 이후 축적된 연구 성과에서 이들 유물의 조형성이 1600년대 후반기 이후의 것으로 추정되어 정온보다는 후대에 입었던 옷으로 재평가되었다.
제복은 종묘와 사직에서 거행하는 제사에 참여하는 주34이 입는 복식으로 흑초의는 주35 중 제일 겉에 입는 옷이다. 주36 항라(亢羅, 얇은 여름옷감)로 만든 홑옷으로, 뒷길이 86㎝, 주37 96.2㎝, 뒷품 53㎝의 크기이다. 주38 주39에 주1이 부착되어 있으며 소매통이 다소 좁은 두리 주40 형태이고 가장자리를 주2으로 마무리하였다. 몸판은 5족 주3이고 소매는 7족 항라로 만들어져 있어 후대에 수선하였을 가능성도 있는 옷이다.
조복은 주45이 국가 대사에 착용하는 주46으로 일습 중 적초의 1점, 중단 1점, 훈상 1점, 금관 1점이 남아 있다. 적초의는 조복 중 제일 겉에 입는 옷이며 겉감과 안감이 동일한 홍색의 은조사(2경 익조직)로 만든 겹옷으로, 뒷길이 83㎝, 화장 88㎝, 뒷품 47㎝의 크기이다. 깃은 목판 당코 주6형이며, 소매는 두리 소매 형태이다. 깃, 주7, 주8에 흑색의 가선을 둘러 주었으며 가슴에는 홍색 주9로 만든 겹 주10이 부착되어 있다.
중단은 적초의의 주41이다. 연한 쪽빛의 5족 항라로 만든 홑옷으로, 치수는 길이 120㎝, 화장 94㎝, 품 42㎝이다. 수구, 깃, 도련 양옆의 트임에 아청색 선이 둘러져 있고 깃과 고름도 아청색이다. 훈상은 중단을 입고 허리에 두르는 주42 치마이다. 길이 77㎝, 허리 길이는 75㎝의 크기이다. 좌우 아래에 흑색의 주43을 먼저 두른 후 허리에서 도련까지 칼주름을 잡아 주었고, 앞이 좁고 뒤가 넓은 편이다.
금관은 백관이 조복을 입을 때 쓰던 관이다. 정온의 양관은 조선시대의 1품에 해당하는 5량관이다. 뒷부분은 넝쿨무늬의 주48와 꽃, 봉황문을 형상화한 화조문이 주47으로 장식되어 있다. 잠(簪, 비녀)은 소실되고 영(纓, 갓끈)만 남아 있다.
추가로 지정된 후손들의 복식류는 주11가 부착되어 있는 단령(團領) 1점, 철릭[天翼] 1점, 동달이 2점(겹1, 홑1), 주13 1점이 있다. 또한 원삼의 부속품인 주14 1점, 족두리(簇頭里) 1점, 주49 1점, 원삼대 1점, 주50 1점이 있으며 단령의 부속품인 주15 1점, 주16 1점, 목화 1쌍이 있고 동달이의 부속품인 주51 1점, 주52 1점이 있으며 조복과 제복의 부속품인 패옥(佩玉) 한 쌍[패옥집 포함], 홀(笏) 1점이 있다. 그 외에도 주17 1쌍, 차선(遮扇) 1점, 주18 1점, 주53 1쌍 등이다.
단령은 주19로 만든 겹단령으로, 가슴과 등에 쌍학흉배(20×22cm)가 부착되어 있으며 등솔기와 주54에는 4겹 바느질을 하였다. 원삼대 속에는 일본 신문이 심으로 들어 있어 조선 말기 이후의 유물임이 확인된다. 어사화는 길이 약 180㎝ 크기로 두 가닥이 한 쌍으로 되어 3쌍 6줄로 되어 있으며 꽃은 국화 형태와 유사하며 한지로 되어 있다. 주55 갑술(1634년) 6월의 묵서가 있는 기다란 목판 사이에 넣어져 있다.
이외에 주20, 주56 강씨 묘표문(墓標文), 내사본 중용(內賜本中庸), 주21, 치제문(致祭文)의 전적류 5점과 주23, 주24, 주22, 주57 2점, 주25 5점, 생활 자료 10점이 있다.
교지(敎旨)는 1626년 동계 정온이 경상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에 임명된 주26으로 우측 하단부가 일부 결실되었다. 석침은 주27에 정온의 화엽시(花葉詩)를 새긴 것인데, 정온이 만년(1637년)에 지은 시로 정조대 정사년(1797년)에 주58 주59 문제로 출제되기도 하였다.
정온가의 유품은 의복이 부속품과 함께 전래되어 복식 사료적 가치가 있다. 또한 한 지역에서 전래되었으며, 전적류를 통해 정온의 역사적 위치나 활동 현황을 알 수 있어 보존 가치가 높다. 그러나 복식의 경우, 시기가 16세기 후반에서 조선 말기까지 광범위하여 시대 고증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으므로 추후 연구를 통해 이를 보완할 필요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