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모는 그 성격상 같은 고용인이지만 진일하는 찬모(饌母)나 안잠자기보다는 우위에 있었다.
침모는 대체로 성품이 조신하고 손끝이 여물어, 대개 그 전형이 있었다. 항상 마루에서 기거하며 자기 손으로 바느질을 하기 때문에 옷은 언제나 깔끔했고, 치마는 길게 늘여 입었다. 또, 바느질 재주뿐만이 아니라 자수를 놓을 줄 아는 이가 많았다.
신분은 대부분 양민 이상이었다. 관청의 경우, 침선비(針線婢)는 상의원(尙衣院) 소속이며 주로 왕의 의대(衣襨) 짓는 일을 담당했지만, 이들 중에서 뽑혀 기생 구실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침비(鍼婢, 針婢)는 침선비와 혼동되기 쉬우나 이들은 공조 및 내의원(內醫院) 소속의 의녀 또는 의녀비(醫女婢)들이다. 이들은 나라에 잔치가 있을 때면 무기(舞妓) · 가기(歌妓)가 되기도 하는데, 이들을 가리켜 ‘약방기생’이라고도 하였다.
한편, 내직으로 민간여인이 자기집에서 삯바느질하는 경우는 침선가(針線家)라 하였고, 침모라고는 부르지 않았다. 조선시대 벼슬아치들의 관복이나 제복(祭服)은 너무 까다로웠고 도포짓기조차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으므로 침선가에게 맡기는 일이 많았다. 침선가는 남성들의 웃옷뿐만 아니라, 혼수옷도 짓고 어린이들의 복건 · 동달이 · 굴레 같은 것도 지었다.
궁중의 침선을 맡은 부서는 침방이라 하였다. 일의 성격상 침방의 상궁나인들은 왕의 침전인 지밀나인(至密內人) 다음으로 대우를 받았다. 예컨대, 입궁 연령이 지밀 다음으로 빨라 7∼8세이고, 일의 특수성 때문에 치마를 길게 늘여 입었다. 만일 지밀나인에 결원이 생기면 침방나인으로 보충하였다.
봉건시대 여성의 교양 중 침선방적(針線紡績)이라 하여, 어느 면에서는 가족들의 건강을 좌우하는 음식만들기보다 바느질솜씨에 중점을 둔 것은 그만큼 바느질이 어렵다는 증거이다. 이는 오늘날 ‘삯바느질’하는 여인으로 이어지고 있으나, 대량생산 · 대량소비의 산업사회에서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