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일(海日, 1541~1609)의 성은 김(金)이며, 호는 영허(暎虛) 또는 보응(普應)이다. 그는 1541년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김제의 만경현(萬頃縣) 불기(不欺)라는 마을의 사족(士族) 집안에서 태어났다.
해일의 가업은 유학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여 파초 잎으로 책갑을 삼았고, 그가 말을 할 때면 그 소리가 글 읽는 것과 같았다고 한다. 8세에 『대학(大學)』에 나오는 증자(曾子)의 말 “열 개의 눈이 보고 있고 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바이니 매우 엄하도다[十目所視, 十手所指, 其嚴乎]”라는 구절을 읽다가 엄(嚴)자의 뜻은 “두렵다는 말입니다”라고 답해 모두가 그를 뛰어난 아이라고 칭찬하였다.
해일은 15세에 과거 시험을 보았지만 합격하지 못하자 19세에 능가산(楞伽山) 실상사(實相寺)로 출가하였다. 그는 실상사 인언(印彦)의 아래에서 5년 동안 경전과 논서를 공부하였다. 그 후 지리산의 부용 영관(芙蓉靈觀, 1485∼1572)을 찾아가 3년을 모시며 선과 교를 함께 배웠다. 다음으로 금강산의 학징(學澄)에게 가서 참선에 전념하였고, 묘향산의 청허 휴정(1520∼1604)에게 경전에서 의심가는 부분을 질의하였다.
해일은 상비로암(上毘盧庵)에서 10년을 주석한 뒤 1589년(선조 22) 능가산 실상사로 돌아왔다. 그는 실상사에서 『지장경(地藏經)』을 독송(讀誦)하며 정진하던 중 지장보살이 감로수(甘露水)를 정수리에 부어주는 상서로운 꿈을 꾸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묘향산 등 전국 각지의 산과 사찰을 두루 돌아다녔으며, 1605년에 실상사로 돌아와 대중에게 경론(經論)을 강의하였다. 1607년 봄에 광덕산(廣德山) 연대암(蓮臺庵)으로 가서 3년을 머물렀고, 두류산 대암(臺庵)에서 지내다가 1609년에 입적하였다.
영허 해일은 유 · 불 · 도를 회통하는 입장을 가졌고 선과 교 외에 정토신앙에도 관심을 가졌다.
해일은 시문집인 『영허집』 4권을 남겼다. 『영허집』에는 천태산인(天台山人)이 쓴 서문과 함영(涵影)이 쓴 행장, 신파거사(新坡居士)가 쓴 발문(跋文)이 수록되어 있다. 『영허집』 권1과 권2에는 자연을 노래하고 선적 풍취를 읊은 5언과 7언의 절구와 율시가 실려 있다. 권3의 부(賦)에 실린 『부설거사전(浮雪居士傳)』은 승려 부설이 성불하는 과정 및 행적을 서사적으로 묘사한 승전(僧傳) 형식의 소설이다. 권4의 「유산록(遊山錄)」 3편은 그가 직접 다녀왔거나 주석했던 지리산, 묘향산, 금강산의 절경과 그곳에서의 인연을 언급한 글이다. 『영허집』은 이른 시기에 승려가 쓴 유산기로 가치가 높다.